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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온 누리에 서로 사랑 |김가흔/ 조은화 | 2019-06-16

by 조은화 posted Jun 21, 2019 Views 27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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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6-16

[성정의주일]

온 누리에 서로 사랑

(시편 8; 잠언 8:1-4,22-31; 로마서 5:1-5; 요한복음 16:12-15)

 

김가흔 집사 / 조은화 목사

 

향린공동체 4개 교회는 2018년부터 매년 6월 셋째 주일을 성정의주일로 정하여, 차별과 혐오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올해 벌써 두 번째 해를 맞고 있습니다. 성정의주일에 앞서 6월 첫 주에는 성평등 부서가 신설되는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아직 세밀히 다루어야 할 절차적 과정이 있기는 하나, 우리가 성평등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과 실천의 마음이 담긴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그 또 한걸음의 길을 함께 가고자 합니다. 먼저 김가흔 집사께서 하늘 뜻을 펼쳐 주시겠습니다.

 

 

(김가흔 집사)

 

안녕하세요. 하늘뜻펴기는 처음이라 어떤 이야기로 시작할지 고민을 많이 하다가, 저한테 가장 익숙한 이야기부터 해보기로 했습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학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으로 하는 대학원생입니다. 석사 과정 때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사와 정치사를 했고요. 지금은 해방 후 기독교사, 개신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올해가 3.1운동이 있은 지 꼭 백주년이라 올 초부터 기념행사가 많았습니다. 소위 민족대표 33인 중에 개신교인의 비율이 높았던 것은 다들 아실 것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질 때 기독교 학교, 교회 등을 통해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자연스레 시위꾼 중에도 개신교인의 비율이 높았습니다. 때문에 일제는 제암리에서 교회당을 통째로 불태우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1930년대부터는 친일로 얼룩지게 되지만 적어도 1920년대까지 개신교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의 핵심 세력이었습니다. 이 시기 기독교인의 시대적 사명은 민족을 계몽시키고, 부강하게 해서 독립을 쟁취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해방 후의 과제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동참하려는 의지와 열정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동일했습니다. 기독교적 건국론 같은 것이 형성되면서 기독교인, 심지어 목사 중에서도 정당을 설립하거나, 국회의원에 출마하거나, 정부 관료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니면 청년 단체를 조직해서 정치권과 접촉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구체적인 방향이야 사람마다 달랐겠지만 새로운 국가에 기독교인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고민했던 때입니다. 향린교회도 이러한 시기에 해방의 열기와 한국전쟁의 충격 속에서 탄생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군정기와 남한 초대 정부인 이승만 정권이 다분히 기독교 친화적이었기 때문에 목사나 교회를 향한 세간의 비판이 많아졌습니다. 장로교가 순식간에 네 개 교단으로 분리되는 교권다툼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다행히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보수파와 달리 연합 조직을 형성하고 활동의 영역을 넓혀가던 이들도 있습니다. 김재준, 문익환, 김관석, 강원룡, 조향록, 김춘배, 오재식, 박형규 같이 우리가 익히 아는 이름들입니다. 이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군부 독재에 항거해서 싸우고, 산업선교회를 만들어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하게 됩니다. 이 시기 기독교인의 사명은 진정한 민주 시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1987년에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면서 형식적으로는 민주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제법 안정되었고요. 이제 다음 단계의 과제로 통일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민사회운동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고요. 우리에게 익숙한 생명, 평화 같은 구호가 대중들에게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희망을 안고 있던 시대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시기에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한국의 개신교는 오히려 급속도로 보수화했습니다. 일례로 앞에 언급했던 교계 어르신들 중에 80년대 행적이 논란이 되는 분들도 계시지요. 사회는 이전 시대에 비해 안정화되어 가는데 향린교회로써는 할 일이 더 많아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향린교회 내부적으로도 장로님들, 오래 활동하신 어르신들 중심으로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그 깊은 원인은 까마득한 후배인 저로서는 다 알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그 시기 교회 내외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보수화될 수밖에 없었던 분들의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등과 분열, 연이어 홍근수 목사님의 16개월의 옥바라지를 마친 향린교회는 이제 앞으로의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경험과 방향성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회갱신선언에 천명된 대로 지금까지 향린교회는 사회 곳곳의 현장을 찾아가고 깃발을 드높이며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해왔습니다. 저도 교우의 한 사람으로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시점에서 여태 제가 말씀드렸던 믿음의 선배들의 활동의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일제의 식민지가 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만주나 상해로 가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혹시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집안의 남성들이 전부 독립운동 하겠다고 나서면 생계유지는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말입니다. 여성이 할 수 있는 경제적 활동의 영역이 협소하던 시절임은 말할 것도 없고요.

 

식민지 조선에 남아 혼자 생계를 꾸려야 했던 이들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함께 중국으로 가서 생활했던 여성들은 가족과 함께 오지 못했거나 혹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성들의 먹고 입고 자는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은숙, 정정화, 허은 같은 분들이 남긴 수기를 보면 당시의 고초가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이들의 조력이 없었다면 사실상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그나마 1920년대 초반 이후로는 본국이나 소련 정부, 하와이 한인의 독립자금 지원도 거의 끊긴 상태였거든요. 그런데도 최근에 피우진 보훈처장이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겠다고 밝힌 뒤로 서훈 기준을 새롭게 하고 작년에야 서훈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그저 안살림만 했다는 이유로 이들의 활동이 국가적으로 평가 받지 못한 것입니다.

 

조금 경우가 다르긴 하지요.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에 국한된 이야기일까요? 제가 1950-70년대 활동했던 훌륭한 목사님들이 남긴 기록을 많이 봅니다. 이분들이 평생을 활동가로 나라와 민족과 민중과 교회를 위해 노력해 오신 분들이라 노년에 회고록, 혹은 생애에 걸친 긴 인터뷰를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회고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부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한다는 거예요. 바깥으로 나도느라 자식 교육에 한번 참여해본 적이 없다. 나의 아이들이 훌륭하게 잘 큰 것은 모두 아내의 공이다. 다 이런 식이더라고요. 뒤늦게 이제라도 잘 해주겠다 남은 세월은 아내와 함께 오붓하게 보내겠다 하는 분은 좀 다행이고, 그런 와중에 부인이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분은 그저 후회뿐이고 

여성들의 노력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던 독립운동가 세대보다는 조금 낫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고마움을 표현할 줄은 아니까. 그렇지만 세대가 달라진 만큼 이분들 대부분 연애결혼들 하십니다. 같이 활동하던 영역에서 동반자로 만나서 일생을 함께 하고자 결심하며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훌륭한 활동을 하는 동안 여성들이 생계를 꾸려나가며 뒷바라지해야 했던 구조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두각을 드러내는 분들도 계시지요.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능력을 갖추고도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제가 너무 옛날이야기를 많이 했습니까? 재밌긴 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지금은 안 그런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는데 하는 생각이 드시나요? 맞습니다.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얼마나 달라졌냐 하면 향린이 중요하게 여겨왔던 노동, 통일, 평화, 생명 같은 이슈만 가지고는 더 이상 앞으로 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부 아직 유효한 가치이고, 중요한 가치인데 왜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하는 걸까요? 더 이상 배우자나 가족의 희생을 전제로 한 활동으로는 설득력과 지속성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대가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죄악이 너무나도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지난 61일 서울퀴문화축제가 있었습니다. 일 년에 하루 서울과 수도권의 성소수자들이 모여서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즐거운 축제의 날입니다. 그러나 올해도 어김없이 건너편 길목에서, 행진로 주변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사랑이 아닌 혐오의 표현을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세등등했던 예년에 비해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는 점입니다. 퀴어문화축제 행사장 안에 성소수자와 함께 하기로 결심하고 동참하는 무지개교회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매년 전국의 퀴어문화축제 현장마다 다니며 예수의 이름으로 혐오를 흩뿌리던 이들이 올해 많이 줄어든 것은 결코 저들이 잘못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정치적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또 얼마든지 혐오가 확장될 수 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는 혐오 언어를 먹고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바로 지금이 우리가 마음 깊이 결단할 때입니다.

 

단순히 퀴어문화축제에 향린의 깃발이 휘날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볼 때인 것 같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티셔츠를 나눠입고 깃발을 들고 플래카드를 들고 함께 뛰며 춤추고 기뻐했습니다. 그렇지만 축제 전체 참가자가 늘어난 것에 비해,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올해 향린의 참여는 평소보다는 저조했습니다. 당일 다른 집회나 행사들도 많고 하다 보니 참여를 결정하기 쉽지 않은 사정들이 있으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또 많은 분들에게 퀴어 이슈는 잘 알지도 못하고, 아무래도 거리감 느껴지고, 적극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적극 활동하기에는 어색함과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겠습니다. 쉬운 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70여 년 간 향린의 발걸음이 결코 쉽지 않은 일들을, 험난한 길을 예수의 정신을 떠올리면서 감내해왔음을 기억하신다면, 어려움을 핑계로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이제는 혐오의 언어에 적극 대응해야 합니다.

 

직업별 성범죄자 일순위가 성직자라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회가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 되어버렸고, 피해자가 힘들게 사건을 공론화 시켜도 솜방망이 처분 일색인 교계 뉴스를 보면서 혀를 차신 경험들이 있으실 겁니다. 다행히 그나마 최근에 한신대 교수 박경철 성폭력 사건이 한신대에서는 파면 처분을, 해당 노회에서는 면직 처분을 받은 것은 그래도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작은 변화입니다. 거기서 희망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성폭력 사건의 정의로운 해결은 교회가, 이 나라 기독교가 고작해야 정상화 되어가는 아주 작은 시작일 뿐입니다. 이에 한층 더 나아가 교회 내에도 만연한 불평등한 문화를 없애도록 일상의 작은 부분부터 돌아보고 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향린 교우 여러분은 성서의 문자 그대로, 일점일획도 비판할 수 없다고 하는 보수적 입장에 반대하고 역사비평의 성서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백 년 전에는 민족의 독립이었습니다. 80년 전에는 민족국가의 수립이었습니다. 사십년 전에는 민주화였습니다. 노동운동이고 통일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구성원이 안전하고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작지만 중요한 변화, 바로 성평등입니다. 이것이 낮은 자리에서 우리와 같은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제자된 우리가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조은화 목사)

 

최근에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찾다가 보기 시작한 드라마가 하나 있습니다. 미국 여성들의 사회관과 정체성을 현시대의 새로운 스타일로 재조명한 코미디 드라마입니다. 예쁘고 날씬한 금발 모델이 교통사고로 죽지만 자신 살기 전 세상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리턴 키를 과감하게 누릅니다. 결국 다시 이생으로 온 그녀는, 자신의 몸이 아닌 정반대로 뚱뚱하고 온 종일 법적 논쟁을 펼치는 제인이라는 변호사의 몸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성감수성이 그리 뛰어난 드라마는 아니지만, 한 가지 면을 계속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몸은 같지만 그 안에 다른 영혼이 들어오면서 삶이 변하는 과정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뚱뚱한 이에 대해 보이는 사회적 시선에 맞서며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보지 못한 부분을 보게 되고 더 매력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여성지혜가 안내하는 삶]

 

오늘 제1성서의 잠언 말씀은 우리가 신의 속성을 따라 어떤 존재인지를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잠언서는 하나의 통일된 작품은 아닙니다. 당시에 잠언이라는 문학 장르는 나라 곳곳에서 교육적 안내서로, 혹은 지배 이념을 강화 전승시키기 위한 지침서로 작성되었습니다. 솔로몬 왕국의 세계주의적 시각과 실용정치 노선의 선봉에 있던 궁중 서기관들은 야훼 신앙과 고대근동 문화의 관심사들을 결합시키기 위해 주변 왕국들의 이런 지혜문학적 흐름을 도입했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형성하고자 했습니다. 각 부족의 문헌들과 민중 안에서 구전으로 떠돌던 내용들을 모으고, 이후 포로기 후기 험난한 고난의 시기를 넘기면서 찾게 된 삶의 깊은 통찰이 더해지며 오늘의 지혜서가 되었습니다. 가부장적 남성언어가 가득한 성서임에도 오늘의 잠언은 여성으로 의인화된 여신지혜를 이야기 합니다. 여신지혜가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 도시 중심지의 광장으로 초청하고 성읍 입구에서 부르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여신지혜는 도심의 중심지로 가는 길가에서, 장사하고 거주하며 각종 기관들이 서있는 세계에 나타나서 자신을 배우려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여성성을 나타내며 창조활동에 함께 동참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로서 여신지혜는 창조주와 인간이 거하는 세계의 거리를 극복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어디에서 찾는가? 바로 창조주 앞에서 여신지혜가 기뻐 춤추듯 그런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오늘의 요한본문은 예수의 처형 이야기를 향해 가는 암울한 공포 속에서 그들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가기로 결정했는지를 보게 합니다.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사회의 회당들은 로마제국의 지방 권력과 권력 연합을 이루고 있었는데 회당 외부로 추방된 이들은 그 지역사회 외부로 밀려난 이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밀려난 요한공동체는 회당에서 재산과 자격을 박탈당하며 배제되고 폭력을 당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도 온갖 혐오의 대상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의 좌절을 겪는 삶 속에서 주의 제자들이 선택한 길은 바로 세상을 이기는 법으로서, 서로 사랑하기를 터득해 갑니다. 보냄 받은 존재로 이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세상을 거스르는 법으로서, 아래로부터의 사랑을 겹겹이 쌓아갔습니다. 정의로운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거룩한 영을 체험하고, 변화해 갔습니다.

 

[로마서]

 

바울서신에서도 로마시대 안에 배제와 차별을 당하며 어떻게 극복의 길을 갔는지를 보여줍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소수자로서 당해야 했던 고난 속에서 그들이 고통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찾았는가? 바로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에 비겁함에서 용기로, 슬픔에서 위로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건널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주일]

 

성정의주일인 오늘은 교회력으로는 성령강림 후 첫째주일이며 삼위일체주일이기도 합니다.

성령강림절 다음 주일을 정하여 지내고 있는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로마 전례력에 들어온 것은 14세기, 요한22세 교황 때로 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과 이 세계를 지어간다고 고백되어진 하나님을 우리가 함께 믿고 간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가슴 뛰는 실천의 삶이 없이, 조직체계만 남을 때 우리는 공허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가부장적 언어체계, 그것이 교리로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는 그 폭력성을 보았고 종교적 독단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한 집단이 우월하다는 생각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배타적인 하나님, 개별화된 군주 하나님, 성차별, 성직중심주의, 인종차별, 계층화 시키는 하나님, 자신은 관여하지 않고 공정한 관찰자로 멀리서 지켜보는 하나님, 피조물을 보살펴 달라고 설득해야만 하는 하나님으로 존재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다시보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3중의 관계성 속에서 세상에 관여하시는 분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관점에서 가부장적 남성의 언어를 버리고 우리 시대의 언어로 바꿔볼 수도 있습니다. 창조하고 구속하고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지혜 소피아의 여성적 이미지를 충분히 담아 성모 성여 성령으로의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고백과 만남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자기 파괴적인 폭력에 대항할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맺은 야훼의 언약,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과 삶, 성령에 의해 이 땅에 창조된 공동체의 풍성한 연대는 세상을 향해 자비심을 지닌 한분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관계적인 본성을 보여주는 힘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변화란 무엇인가]

 

인도출신 가야트리 스피박 교수(Gayatri C. Spivak)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사랑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삶에 있어 생명성을 부여하는 사랑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글로벌한 사랑에 취해 있는데, 이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억누르고 획일성이 미덕이 되도록 만든다고 봅니다. 또한 타인을 억누르는 기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획일적으로 만들어 힘없는 이들의 소리가 죽임 당하게 만듭니다. 이런 획일성의 문화는 우리 사회를 보다 더 비인간적 세상을 만들어 내어, 우리의 신앙, 우리의 관계가 정해진 틀에 의해 혐오의 대상을 정하고 틀리다고 규정할 수 있게 합니다. 기준을 설정하는 주체로 인해 불합리한 기준이 세워지기도 하며 계속된 혐오와 차별이 양산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반면 행성적(planet) 사랑은 어떤 것이 우월한가에 대한 우리의 비교의식이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계를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행성적 사랑을 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존재함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관계성을 알게 해주는 사랑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오늘 여성지혜는 창조된 우리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차별과 혐오 속에서도 창조주의 사랑을 잔뜩 머금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도록 그래서 사랑하기를 선택하고 기쁨의 존재로 살아가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성정의주일이 제정되고 성평등부서가 신설되고 하는 움직임은 우리가 사랑하기를 선택한 결단의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해 생겨난 차별과 혐오로 인해 힘겨워 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만나기 위한 노력들입니다.

 

기도란 일상에 파묻힌 마음에 영원한 광선이 가늘게나마 들이비칠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내는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라는 칼라너의 말처럼 우리 모두가 우주적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내는 작업을 함께 해나갔으면 합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만트라의 만은 마음을 의미하고. ‘트라도구라는 뜻입니다. 말그대로 번역하면 마음도구 인 것이지요. 특정한 음절이나 단어, 문장을 반복하면 강력한 파동이 생겨 마음이 집중되어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 만트라의 원리입니다. 오늘부터 만트라 형식을 따른 기도를 함께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온 누리에 서로 사랑!!”

우리의 간절한 마음이 조금씩 전해져 성평등하고 성정의한 세상이 피어나길 기대해 봅니다.

 

다 같이 침묵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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