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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아, 사람! | 김희헌 | 2019-03-17

by 김희헌 posted Mar 17, 2019 Views 27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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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3-17

, 사람! (15:1-12,17-18, 3:17-4:1, 13:31-5)

2019.03.17. 사순절 둘째 주일

 

[구원의 수레를 밀고 가는 사람]

최근에 상이 이어져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장충협 장로님께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지난달에 92번째 생신을 맞아 전화통화를 하면서 조만간 뵐 것을 약속했는데 불현듯 소천 하시니 안타깝습니다. 해외에 거주하는 자녀들이 입국하고 있는 중이라 장례절차는 내일부터 시작될 것 같습니다.

또한 지난 화요일에는 문동환 목사님의 발인예배가 있었습니다. 금년에 98세이셨으니 거의 한 세기를 사신 셈인데, 그분의 긴 삶에는 우리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을 느낍니다. 짧은 생을 살다간 작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생에는 진화하는 우주의 갈망이 스며있습니다. 하물며 한 세기를 역사와 함께 호흡하며 큰 가르침을 주셨던 분을 보내고 나니 허전한 마음이 그지없습니다.

문동환 목사님을 기리는 예배를 드리는 동안 제 마음을 채운 것은 인간을 잃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기품 있는 인격을 가진 종교인, 특히 대승적인 기독교 신앙을 태동시킨 지역에서 솟아난 마지막 인간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컸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개신교는 크게 보면 두 개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수레를 개인의 영혼으로 좁힌 소승 기독교그 보폭을 역사와 우주로 넓힌 대승 기독교라고 하겠습니다.

평양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신교 신앙은 대체로 소승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초에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개신교인들이 많아서,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들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근본주의적 교리신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신앙은 예수를 잘 믿어서 구원의 수레를 타고 천국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국운이 기울자 희망을 잃은 이들은 역사를에 비관하며 신비주의적인 신앙에 경도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반공주의와 성공주의와 배타주의로 대부분의 한국교회를 물들였습니다.

반면에 능동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간도에서 형성된 대승적인 기독교인데, 이들은 주체적인 신앙인으로서 구원의 수레를 타기보다는 자기 몸으로 밀고 가려는 기질을 가졌습니다. 역사의 격랑을 민중들과 함께 헤쳐 가면서, 율법적인 종교를 개혁해가려는 진취적인 태도를 가졌습니다. 문동환 목사님은 이런 대승적인 기독교가 꽃핀 명동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정신에 막힘이 없고 자유로웠습니다.

그 동안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배타적인 신앙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따라서 신앙인들의 영혼에는 구김살과 상처가 많았습니다. 특히 분단체제가 70여년이 지나는 동안 갈등과 증오가 내면화 되어왔습니다. 따라서 역사를 품고 드넓은 자유정신으로 살아온 대승적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은 세상적으로는 고난을 받았지만, 깨어있는 믿음의 공동체에게는, 오늘 빌립보서 41절에 나오는 표현대로, ‘기쁨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 문동환 목사님이 그런 분이셨지요.

문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찍은 동영상이 발인예배 때 소개되었는데,저는 그 말씀을 들으며 다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역사의 부름에 순종할 수 있도록, 믿음의 행진을 가로막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과 낡은 관념의 찌꺼기를 마음에서 빠르게 씻어내야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깊이깊이 기도하기를 바라며, 문동환 목사님의 당부의 말씀을 전합니다.

바라건대 사심을 다 버리고 남북이 갈라졌던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든지 하나가 되어야 해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가 2차 대전이 우리를 갈라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이것을 거부하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국가를 이룩해야 돼요. 사랑하는 동포, 동지 여러분,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일이에요.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서 인류의 평화에 공헌하는 나라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나는 나이가 많아서 여러분과 같이 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 개인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일체, 일심이 되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부디 이 정신을 잃지 말고 되살려서 조국의 통일 평화와 인류의 평안을 위해서 공헌하는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사람 / 창세기 151-12, 17-18]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 조선 사람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세계를 펼쳐가며 역사의 새 장을 연 상징적인 인물로서 창조적인 삶을 위해 분투하는 인류의 원형적인 삶을 대표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에 있던 일입니다. 그는 수많은 도전과 삶의 전쟁을 거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세워가야만 했습니다.

무엇이 인간 아브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것에 대한 대답입니다. 아브라함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를 약속합니다. 하나는 자손에 관한 약속이요, 다른 하나는 땅에 관한 약속입니다.

1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환상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요청합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손이 아직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대를 이을 자손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었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실재를 확인합니다. 성경의 나레이터는 그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게(amen) 되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롭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약속은 땅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주 나의 하나님,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번제물로 사용할 짐승들을 준비하게 한 다음, 캄캄한 밤에 불길이 되어 그 위를 지나가면서 언약을 체결하고, 아브람에게 약속합니다.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준다.”

자손과 땅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떠돌이 삶을 사는 아브라함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신앙인에게 주어진 약속치고는 너무 물질적인 면에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저도 이 본문을 읽을 때면, 자손과 땅을 매개로 하나님과 거래하는 아브라함의 종교심이 저차원적인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종교가 너무 물질적인 것에 몰두하는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반발감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그 자손들에게는 정복주의 슬로건이 되어, 자손에 관한 약속은 배타적인 선민사상으로 변질되고, 땅의 약속은 이방 땅을 정복하는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삶에 필요하고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손과 땅에 관한 이 약속은 물질에 관한 잘못된 편견으로 인해 그 의미가 잘못 받아들여지곤 했습니다. 물질에 대한 과잉감정에 치우치면, 그것이 세속이 되었든 종교가 되었든 잘못된 태도를 유포합니다.

물질에 집착하는 세속적인 욕망은 세계를 물질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물론이요, 윤리에서도 물질주의적인 태도를 갖게 하여 인간의 삶을 메마른 것으로 만들곤 합니다. 반면에 물질을 악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실제로는 재물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키는데 봉사하면서 인간의 정신을 분열시키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과 땅이라는 물질의 약속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이 벌이는 모험적 삶에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필요하고, 보다 나은 삶을 지어가기 위해서는 물질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욕심을 부리지 말고 필요한 만큼만 구하라는 뜻도 있지만, 고차원의 창조 사역을 위해서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데 필요한 것들을 얻었지만, 그것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아들을 바쳐야만 하는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아가고 또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자기 삶을 지어가는 모습이 모든 신앙인들이 살아갈 삶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 / 누가복음 1331-35]

아브라함보다도 더 자유롭게 하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간 이는 예수입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서 우리는 인간 예수의 면모를 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찾아와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말합니다. 헤롯은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인물로서, 만일 그가 누구를 죽이려 한다면 세례자 요한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당시는 로마 제국이 통치하는 광폭한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묘사가 131절에 나오는데,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시대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일까요?

누가복음서는 오늘 본문 앞에서 이미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삶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살아있기는 하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에 관한 것이요 (6-9), 둘째는 안식일을 핑계로 삼아 생명을 외면하는 위선적인 종교인에 관한 것이요 (10-17), 마지막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 겨자씨와 누룩과 같이 사는 삶에 관한 것입니다 (18-30).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맞은 상황은 위태롭고, 선택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는 어떤 길을 선택하나요? 그것이 사순절을 지나가는 우리들의 묵상 주제입니다.

헤롯의 위협을 전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여우에게 전해라.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며, 나는 내 길을 가겠다.” 권력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생명의 길을 걷겠노라고 선언하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우리 맘을 후련하게 해줍니다. 예수는 항상 이렇게 자신의 삶으로써 따르는 이들에게 가야할 길을 보여줍니다.

문동환 목사님이 쓴 첫 번째 책의 제목은 [자아확립]입니다. 교육학자로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던 수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 책의 서문은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문제는 이어진 질문에 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하는 것입니다.

문동환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다운 사람, 건강한 자아를 확립한 사람은 스스로 일어선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올바로 맺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올바른 관계인지는 예수님이 당시의 사람들과 맺었던 관계방식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오늘 본문 34-35절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입니다. 이들은 사회적 특권 계층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고에 부대끼며 쩔쩔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권을 옹호하는 데에만 급급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고 해도, 그들을 회개시켜서 가던 길을 돌아서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 스스로 회개하는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일에 집착하고, 자신의 잘못을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의 권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국가의 권위를 동원하고, 종교의 명분을 활용하고, 전통의 관습을 뒤집어씌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반문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대드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요, 나라에 반역하는 자요, 전통을 짓밟는 자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매섭게 비판하고, 그들 속에 있는 악을 노출시킵니다.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속한 종교에 충실하고, 전통에도 어긋남이 없으며, 이웃을 생각하며 자기 재물과 시간도 내어놓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사람 모두 자기들처럼만 산다면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자기들이 가는 길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언제든지 돌아설 용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는 그 길이 그릇된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에게 다가와 헤롯의 위협을 전달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하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판합니다. 이들은 남의 생을 비참하게 만들면서도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매정한 사람들이요 (23:2-4). 자기 뒤를 따르라고 해서 제자들 얻으면 자기보다 몇 배나 더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23:15). 예수님은 이들에게 경고하기도 하고, 찾아가 깨우쳐주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이들에게 아직 소망이 있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제자들마저 도망을 갔을 때, 예수님의 장례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한 이들이었고 (27:57-58), 초대 교회에서 자기의 집을 제공해서 교회가 이뤄지게 한 것도 이들의 공헌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부류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류가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사람들인데, 이들은 그 시대의 민중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가 헤롯의 위협을 당해도 변함없이 자기 길을 가겠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가난에 쪼들려 허덕이고, 땅에 붙은 사람들이요,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기본도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그들 스스로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는 원한이 차고 넘칩니다. 죄 많았던 부모에 대해서, 매정한 이웃에 대해서, 잔악한 지배층에 대해서, 무관심한 종교에 대해서 원한에 사무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자신의 무지와 경솔, 게으름과 무책임과 나약함을 저주합니다. 그들은 다시 일어날 수도 없는 지경에 있습니다. 로마의 착취, 관리들의 약탈, 종교인들의 저주, 사회적 조롱이 겹쳐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과오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세리 삭개오를 대할 때에도,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도 그들의 약점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을 푸는 것이요, 쌓이고 쌓인 죄책감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사람대접을 받아보고, 새로운 생의 가능성을 제시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가 함께 하며, 그들의 깊은 심정을 이해해 주십니다. 몸으로 용서를 선포하고, 참 친교 가운데서 새로운 생의 현실을 맛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 새사람을 지어주고, 세상과 자신을 용서하고 화해하며,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것이 예수의 일이었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운동이 되었습니다. (문동환, [자아확립], 100-8)

 

[기쁨이 되는 사람 / 빌립보서 317~ 41]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에게 외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본받는다는 것은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에 예수를 화육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 바울은 그것을 절절한 심정으로 고백했습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3:8-11)

이것은 바울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길을 걷는 모두의 바람이요, 이 사순절에 우리를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성서의 말씀이 됩니다.

우리 시대는 돈이 생명을 지배하는 질서를 너무도 오래 지나왔고, 갈등과 증오가 평화를 억누르는 세계에 익숙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따라 분열하고, 의로운 삶에 대한 동경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빌립보서 본문 18-19절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 시대는 십자가의 원수가 된 삶을 살며, 하나님나라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호소를 들으십시오. 우리 시대보다 훨씬 더 어둡고 참혹했던 시절에도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비천한 몸을 변화시켜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빌립보서 41절 말씀,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이 말씀처럼, 우리도 이 시대의 기쁨이요, 면류관이 되는 삶과 믿음을 일구어가기를 바랍니다.

예언의 말이 아무리 차고 넘쳐도 예언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 예언은 관념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시대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니, 새로운 시대란 새로운 믿음의 사람이 등장해야 열립니다. 이 사순절을 보내면서 자신을 깎고 깎으며, 또 세우고 세우면서, 그리스도를 살려내는 사람으로서 우리 모두가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주님 안에 굳건히 서십시오.

여러분, 우리 시대의 기쁨과 면류관이 되어 주십시오.

세상과 자신을 용서하고 거듭난 새 사람이 되어

성령의 친교 속에서

비천한 몸을 영광스럽게 변화시켜주시는 그리스도를 살아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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