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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예수의 조직론 | 이성환 | 2020-01-26

by 이성환 posted Jan 28, 2020 Views 16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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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1-26

예수의 조직론(사9:1-4 시27:1,4-9 고전1:10-18 마4:12-23)

2020.01.26. 주현절 셋째주일 / 설 주일

 

설 연휴라 많은 분이 모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배로 모이고 예배는 어김없이 진행됩니다. 이게 2천 년 교회의 역사를 이끌어온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지역에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풍습, 전통과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기독교 전통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는 일찌감치 가톨릭에서 인정한 제사문화가 그렇습니다. 우리 기장에서도 헌법으로 그것을 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교회에 따라 신앙과 신학 전통에 따라 제사문화를 수용하는 문화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만큼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져 온 굳건한 전통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전에 일했던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는 보통 주일에 노동상담을 비롯한 한글교실, 컴퓨터 교실 등의 행사가 많아서 한동안 토요일 오후에 예배를 진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시대에 부름에 맞게 예배를 진행하는 시간과 장소가 바뀌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도 최근 매 년 한번 쯤은 고난의 현장에서 예배로 모인 바 있습니다. 올해에도 예정대로라면 5.18 기념주일에 광주 망월동에서 모이게 됩니다. 

 

전통과 시대정신, 전통적인 예전과 현장의 파격적인 목소리가 역동적으로 어우러지는 것이 살아있는 예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 우리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예배와 예전에 대한 자세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명절인 설 연휴에 여기 예배의 자리로 모이신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한 해 건강하시고 뜻 하는 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잘 일궈 가시길 빕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추려 표현하면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같은 이름의 책도 있어서 저는 더 줄여 예수의 조직론이라고 표현해봤습니다. 과거 대학시절 기숙사까지 침탈한 경찰이 어떤 신학생 책장에 꽂혀 있는 ‘조직신학’이라는 책을 보고 ‘아니 이놈들이 지하조직같은 집단을 만들려고 하는가’하면서 그 책을 압수물에 포함 시켰다는 얘기가 전해져 옵니다. 조직신학의 조직이나 지하조직의 조직이나 같은 한자어니 그리 오해를 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은 예수의 본격적인 공생애의 시작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가 40일 광야의 시험을 마친 후 처음 한 일이 케리그마 즉, 복음의 선포라고 말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리고 난 후 착수한 일이 제자단의 조직이라고 서술합니다. 어떠한 일을 감행하기 위해 그 일을 함께할 동지들을 규합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기에 앞서 예수가 공생애의 자리로 뛰어든 그 상황을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육하원칙에 따라서 보면 예수의 공생애 처음의 시간과 장소는 마태복음 4장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이겁니다.

 

때는 요한이 잡힌 후이고 장소는 갈릴리입니다. 때를 먼저 살펴보면 세례요한이 잡힌 후 이후 예수는 비로소 본격적인 활동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장소는 갈릴리입니다. 친절하게도 마태복음 4장 14절에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1성서 본문 이사야 9장 1절을 보면 “어둠 속에서 고통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님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활동 개시를 마태복음 저자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완성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몇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마태는 구약시대의 역사와 예언전통이 예수에게서 완성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구절도 그러한 맥락에서 봐야겠습니다. 

 

오늘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공생애는 저에게 한 인물을 떠오르게 합니다. 문익환 목사입니다. 뒤늦게 이 역사의 한복판에 뛰어들어서 ‘늦봄’이라고 호를 지었다고 하지요. 문익환 목사는 1975년 친구 장준하의 주검을 앞에 두고 ‘내 남은 인생을 이 친구가 이루지 못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장준하 선생의 염을 하는 과정에서 오른쪽 두개골이 함몰된 것을 문동환, 문익환 두 목사님이 확인했다고 하지요. 그 이듬해인 1976년 3.1구국선언을 시작으로 그의 옥살이가 시작됩니다. 

 

예수가 이 모순과 억압의 땅 갈릴리로 뛰어든 시점도 한 때 세례를 받고 깊은 관계를 맺고 지냈던 세례요한이 잡힌 후였습니다. 역사적인 자리로 보자면 정의가 고난을 받는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때는 일상(日常)이 아닙니다. 비상(非常)입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들여다보면 로마의 식민지 모순만 있던 단순한 구도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암울했던 식민지 상황을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집단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체제 안에서의 계몽을 꿈꿨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세속의 상황에서 말씀으로, 즉 율법으로 민중들을 계몽하고자 했습니다. 율법에 따른 생활신앙운동, 이것을 통해 그들은 이스라엘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예수는 처음의 시작은 유대교 회당종교에서 시작했지만 세례요한이 잡힌 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선포합니다. 예수가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원한 논리가 율법이 아닌 점에서 바리새인들의 운동방식과 구별됩니다. 그리고 예수의 활동 근거지가 갈릴리였던 것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합니다. 시대의 모순과 갈등이 극에 달했던 곳, 세금 거부운동을 비롯한 각종 저항이 줄을 이어 나타났던 곳, 갈릴리. 그곳에서 예수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외칩니다. 여기서 회개란 윤리 도덕적인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삶의 좌표를 하나님께로 맞추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의 다메섹에서의 그 변화를 뭐라고 하십니까? 개종? 회심? 개종은 믿는 신이 바뀌는 것임으로 야훼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에서 옳은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면 회심은 맞습니까? 마음을 돌이켜 삶이 변화하는 것이 회심인데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회개’에 그 내용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회개의 전후로 그의 삶의 좌표가 바뀌고 가치가 바뀌는 게 회개라고 볼 때 ‘전향(轉向)’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에 가까운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그저 그렇게 살아오는 방식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다.’ 예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혁명적인 방식으로 초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부르면서 자기의 재주를 하나님 나라 운동에 녹여 내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 어떤 고매한 학식이나 통찰력, 지혜, 이런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기가 가진 것을 하나님 나라 운동 전선에 내놓고 복무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가진 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 지금까지 맺어온 관계를 버리라고 주문합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말한 회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능력을 하나님 나라 운동에 쏟아부으라는 것이 아니죠.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사고방식, 지금까지 믿었던 가치, 이념 이런 것 다 필요 없다.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이런 이야깁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 사람의 자세 또한 이래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쌓은 업적, 관계, 재산, 지식, 삶의 방식, 삶의 지혜, 이런 것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필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그런 방식으로 회개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 내려놓고 삶의 좌표를 예수께 맞췄습니다. 그런 바울이 말하는 공동체는 어때야 할까요?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이죠. 예수의 복음을 전승하기 위해 반평생을 바쳤던 바울, 그가 말하는 교회는 예수가 조직했던 제자 집단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하기에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바울의 교회론을 성찰의 재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어때야 하는가. 오늘 2성서인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 분열이 없어야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고린도교회 갈등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일단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갈등의 골이 깊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 강요하는 등 율법을 강조했습니다. 제사음식과 같은 먹는 것을 갖고 싸우기도 했고 교인들 내에 다툼이 법적인 소송으로 비화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내에 성적인 스캔들까지도 있었습니다. 가지 수로 따지면 고린도교회 내에 존재했던 갈등의 항목만 열한 가지나 됩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파벌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파벌의 양상이 스스로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그 갈등의 심각성을 나타냅니다. 어떠한 가치가 이론이 아닌 사람, 인물로 수렴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미 그 공동체의 갈등이 끝 간데없이 치달았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게바는 베드로의 본명인데 베드로가 고린도교회에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베드로의 제자들이 고린도에 방문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할례와 같은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베드로파를 형성했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 계파 중에 그리스도파, 예수파가 있었다는 것도 특이한 대목입니다. 모든 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자신들이야말로 예수파이므로 복음의 원형에 가까운 사람들이다.’라고 주장했을 수도 혹은, 여러 파벌을 중재하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노력한 이들일 수도 있었겠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도록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뭉치십시오.” 여러분, 이게 심각한 고린도교회의 상황에서 가당키나 했을까요? 교회 내의 온갖 갈등 상황을 품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하는 바울의 권면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오늘 고린도전서 내용을 살펴보면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를 두고도 계파를 가르는데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례라고 하는 예전,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관례로 여겨졌던 행위조차 교회가 갈라지는 데 악용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회복의 가능성을 결국 예수의 십자가에서 찾습니다. 13절에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예수에 대한 경험 한 자락, 혹은 예수의 말씀 가운데 한 부분만을 발췌해 ‘이것이 예수고, 이것이 복음이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바울의 일갈이 아닌가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7절에서 18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도 사도바울의 고린도교회에 대한 권면도 결국 궁극적인 사랑의 표징인 십자가로 귀결됩니다. 마태복음 4장은 산상수훈으로 이어지며 그곳에서 예수는 ‘원수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의 고린도전서도 고린도교회의 온갖 갈등 상황을 열거한 후 ‘내가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길을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결국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어리석을 수 있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이 앞에 있는 십자가가 여러분에게는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를 예수와 관계를 맺게 해주는 것은 결국 십자가이고 사랑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우리를 구원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음을 압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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