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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oo 으로는 못가요! | 조은화 | 2019-09-29

by 조은화 posted Oct 04, 2019 Views 24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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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9-29

ㅇㅇ으로는 못가요!”

(예레미야 32:1-3,6-15; 디모데전서 6:6-19; 누가 16:19-31)

 

요즘 서점에 가보면 잘사는 길을 제시한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자기개발서부터 시작해서 말 잘하고 돈 잘 벌고 웰빙하는 방법까지, 잘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알아서 채워주려는 듯 솔깃한 제목의 책들이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추구하고 계신가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이야기는 네 개의 복음서 중에 누가에만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1세기 팔레스틴 토지를 기반으로 가난한 소작농과 소수의 부유층이 있었음을 감안할 때 부자를 비유하는 표현과 거지의 이름으로 나사로를 거명하는 것에는 뭔가 의도된 바가 있어 보입니다. 부자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살았다고 전합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인생의 어려움을 겪으며 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현실은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하고 척박한 삶의 최악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사람들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어먹고 살라고 나사로를 들어다 부자의 집 앞에 놓았습니다. 그는 몸에 궤양과 피부종양을 달고 살았고, 사나운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에서 나오는 진물을 마구 핥아 먹을 정도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회에서 방치된 체 살아가는 버려진 존재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이름의 뜻이 무색할 정도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비참히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그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지옥, 음부)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저위에 아브라함 품에 안긴 나사로를 봅니다. 죽어서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아니면 살아있을 때처럼 자신이 명령하면 종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신에게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자신이 불 속에서 무척이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부자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가 나사로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살아생전 나사로가 자기 집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아랑곳 하지 않던 그가 나사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그 부자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전합니다.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누가 16:25b)

 

더욱이 그쪽과 이쪽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오고 갈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부자는 자신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고 하는데, 부자는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형제들이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에, 누군가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가서 얘기해야만 들을 것이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부자의 형제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끝이 납니다.

 

이 본문을 생각하면서 계속 떠오른 찬양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보수교단에서 부르던 노래로, 어린이 교회학교계의 고전과 같은 노래인데요. 불러보겠습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나라(1)

 

이 찬양의 가사가 보수 색채를 물신 갖고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전체 가사의 의미를 부정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이 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는 구절이 있는데요. 바로 3절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마디에 들어있는 맘 착해도 못가요라는 가사가 우리를 고민하게 합니다. 아니 마음이 착해도 하나님 나라를 못 간다니,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생깁니다. 가부장적 교회체계에서 교리를 강화하기 위해 믿음만을 강요하는 이 가사는 교인들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게 하는 노래말이 되기도 합니다.

 

천국에 가려고 예수 믿는다거나 지옥에 가기 무서워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가? 물론 이 두 가지 질문 어디에도 요즘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개의치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질문 하나 더 해봅니다.

만약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누구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면, 그래도 예수를 따를 것인가?”

저는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면 지옥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인데요 사실 죽어서 가보지 않아 확신하기가 어렵다는 저의 생각에 대해, 목회를 하고 있는 동기 목사사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지옥은 있어야 된다. 그래야 이명박 박근혜 같은 적폐들을 보내지. 악한 이익충들이 갈 때가 있어야 우리가 사는 지금이 덜 억울할 것 같다.”

 

[부의 빈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단순히 천국과 지옥 혹은 권선징악의 구도로 보기보다는 이 비유가 뜻하는 본심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천국 지옥 개념은 제2성서가 페르시아의 선악 이원론 대결 구도 신화를 받아들인 측면이 있습니다. 본문은 누가가 작성된 당시 사회에도 가난과 저주는 하나님의 부재로, 부는 하나님의 축복과 임재란 위치로 인식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이야기에서 부함이 지닌 빈곤함을 봅니다.

 

우리는 오늘 부자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자색 옷을 입고 있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정황을 고려할 때 당시 세계에서 자색옷이라 하면 최고의 통치자들에게만 허용된 의복이었습니다. 권력과 지위를 상징한 것으로 특권 계층에만 한정되었기에 세리장이나 웬만한 이들은 입기 어려운 옷이었습니다. 더욱이 자색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염색 원료를 뿔고둥이라 불리는 달팽이의 하부 기관지선에서 극히 소량을 얻는데, 천을 자색으로 염색하려면 1만 마리 뿔고등을 잡아야 했으니 고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실의 1파운드 자색 염료 가격은 1000데나리온, 현대가치로 보자면 못해도 6천에서 1억원 사이를 오가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두로 산 자색 염료는 로마에서 특별히 황실에서만 사용되었고 이를 법으로 제정했을 정도였다 하니 이 부자를 묘사하는 자색옷의 의미는 단순히 부자였다를 넘어서 정치적 힘을 갖고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지금 여기]

 

예수 당시 1세기 팔레스틴 사회는 정치 경제 분리가 독립적이지 않은 사회였습니다. 부는 정치적 측면에서도, 정치적 권력을 바탕으로 부를 획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은 앞서 마리아 찬가에서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1:52)”라는 말씀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결코 끝까지 호위호식 하며 살지는 못할 것이다. 끝내 주님의 심판이 함께 할 것이라는 결연한 뜻을 나타낸 바 있습니다. 나사로를 집 앞에서 계속 방치시킨 것을 곱씹어 봅니다. 부함이 권력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듯 물질적인 풍요와 복이 꼭 의의 표식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모세율법은 결코 가난한 자를 무시하지 않는다. 가난 역시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듯 저주나 악의 상징이 될 수 없다. 가난한 사람으로 묘사되나 경건한 자를 암시하는 나사로의 이름이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합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의 이중폐단을 말하며 구원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대단한 권력을 가진 부자의 가족이 현재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권력과 재물을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사용하는 참 신앙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본문을 통해 깨닫는 바는 이것입니다. 어떻든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순응하지 않는 지상에서의 안락은 당대의 판단과는 전혀 달리 이미 심판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그 심판을 피할 길도 재촉할 길도 지금 여기에 있을 뿐 나중은 없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노력]

 

오늘 디모데전서 말씀에서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돌파해 가려는 의지를 봅니다.

 

디모데전서는 바울 사후 익명의 저자가 2세기 초 교회의 훈육을 위해 쓴 일종의 핸드북이라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 글을 쓰는 위명은 고대세계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에게 흔한 것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도 바울 서신들을 수정하거나 보완하여 그의 권위를 빌어 공동체를 향해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저자가 풀어가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돈과 권력이 난무하는 세속적 주류가치에 대항하면서, 교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의 활로를 뚫어내고자 한 노력이었습니다. 이는 오늘의 본문에서 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시오. 교만해지지 말며 믿을 수 없는 부귀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희망을 두라고 이르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착한 일을 하며 선행을 풍부히 쌓고, 있는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주라고 하시오.”(딤전 6:17~18)

 

[결단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

 

오늘 예레미야 본문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희망을 실천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시드기야 10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바벨론군에 의해 함락될 것이라고 선포하였고, 이 때문에 국가반역죄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러한 때에 예레미야가 아나돗에 있는 고향 땅을 사게 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는 그가 제일 가까운 친척으로서 땅을 가문의 소유로 보존키 위한 법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587년 국가적 재난 이후 군사적으로 어떠한 내일을 기대할 수 없고, 나라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할 때에, 과연 희망이 있겠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주님이 이끌어 주시는 대로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밭을 샀습니다.

3215절에서 전하듯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사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을 향한 행보는 막연히 내세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위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재산을 써서 밭을 사는 일을 감행했습니다. 하나님이 요청하시는 새 세상을 위해 지금 여기를 바라보는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실행이었습니다.

 

[행동하기의 차이: 이완용 VS 이회영]

 

좌절의 숲에서 바라보는 희망의 행보는 우리 선조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가는 교회마다 이분의 흔적을 마주하게 됩니다. 서촌 근처에 있었을 때는 교회 밑에 바로 우당기념관이 있었고 지금 향린에서는 교회 인근 명동성당 가는 길에 우당 이회영 선생의 흉상과 함께 이회영 이시영 6형제 집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안타 증권 옆 길 향린으로 들어오는 길은 2017920일에 우당 이회영 길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이회영 선생은 이항복의 11대 후손으로 8대를 이어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의 자녀입니다. 이회영과 6형제는 1910, 일제 침략으로 경술국치를 당하자, 조선 최고의 명문 집안의 명예를 버리고, 나라를 위해 모든 재산을 정리하는데, 현재 시가로 600억원의 재산을 처분하고 가족 40여명과 함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로 길을 떠납니다. 이후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지도자 약35백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독립투사를 양성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후 이회영 선생은 일본군 장교 암살을 시도하다 붙잡혀 1932년 중국 여순 감옥에서 고문으로 숨지셨습니다.

 

반면 나라를 판 대가로 엄청난 부를 착복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 을사오적으로 불리는 이완용의 친일 행각을 다들 아실 겁니다. 조선말 일제의 조선 침략과정에서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할 당시, 조약에 찬성한 다섯 중 한 사람으로, 이완용은 자신의 권세와 이권을 챙기기 위해 힘의 논리에 따라 친미, 친러, 친일로 변신을 거듭했습니다. 그렇게 영악한 처세술로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자 이완용은 고종을 퇴위 시켰고, 한일합병에 앞장서며 나라를 망치면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습니다. 이후 이재명의 칼에 폐를 다친 후유증으로 천식을 앓다 죽었는데, 그의 무덤은 매국노의 무덤이라고 알려지면서 자주 파헤쳐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무덤 훼손이 계속되자 미국에 숨어 있던 손자들이 무덤을 파서 시체를 화장하고 무덤을 없애버렸다 하는데, 그의 손자와 증손자들은 지금도 미국과 서울에서 출신을 숨기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잘 살아 보이는 것에 머물 것인가? 그것 넘어의 세상을 희망할 것인가?]

 

이제 우리의 지금 여기의 자리를 봅니다. 지난주는 기독교 교단별 총회가 있었습니다. 각 교단마다 총회 이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총신대가 소속되어 있는 예장합동은 아직까지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는 교단입니다. 여기에 대응하여 총회 장소 앞에서는 여성목사안수 퍼포먼스가 있었습니다. 총회 중에는 퀴어 신학이 이단임을 결의해 달라는 헌의안을 올라왔고, 동성애자와 동성애 지지자 퀴어축제 참가자를 중징계하는 방안도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총대들은 이 안건을 반기독교세력대응위원회로 보내어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3항의 성적 지향종교 차별문구를 삭제하도록 국회와 청와대 등에 청원해 달라는 헌의를 맡기기로 했다고 합니다.

 

예장통합 총회 결의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크게 두 가지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20185월에 장신대 예배당에서 무지개 퍼포먼스를 한 학생들 중 2명이 목사고시를 봤는데 고시에서 통과했음에도 면접에서 불합격으로 처리했습니다. 고시위원들은 당시 이제라도 잘못을 시인하고 동성애 인권운동을 하지 않겠다 서명하면 우리가 협조하겠다.’라고 했고, 학생들은 거기에 응답하지 않고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하겠다.’고 자신들이 소신을 밝혔다고 합니다. 총회 셋째 날인 25일에 규칙부 보고에서 해당 학생들에 대한 고시위원회의 불합격 방침은 문제없다.’라고 보고했고, 총대들도 박수로 화답해 그대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총회에서 가장 핫한 이슈인 명성교회 세습 문제 결과가 나왔습니다. 총회 초반에 김삼환 목사가 등장해서 교단이 품어달라. 명성교회 사태를 총회기간에 종결지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사과인지 봐달라는 사인인지 알 수 없는 인사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명성교회도 살리고 총회도 살려야 한다.’는 취지로 전개된 것인데, 총회 마지막 날 부자 세습 수습 안을 발표했습니다. 결과는 총회 재판국 재심 결과를 받아들이되 김삼환 목사 은퇴 후 5년이 지난 시점에는 세습이 가능하게 한다는 발표입니다. 결국 시간만 20211월 이후로 지연된 것이지 부자 세습을 이제 대놓고 인정하겠다는 본심이 드러난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결정 이후 언론과 사회단체 교계 내에서도 비판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자신들 이득에는 눈이 멀어 합치와 수습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사랑 어쩌고 하면서 얼렁뚱땅 세습을 용인하면서, 성소수자들을 지지한 목사후보생들에 대해서는 이단시 하며 목사안수를 무기로 단칼에 잘라버리는 모순된 결정 앞에 교회의 갈 길은 어디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기장도 같은 시간 104회 총회가 열렸습니다. 이번 총회 시작 직전 성폭력 특별법을 위한 기자회견 있었습니다. 성정의 실연을 위한 연대가 주최가 되고 향린공동체도 참여단위로 함께 준비한 시간이었습니다. 다행히 이번총회에서 성과라면 교회 내 성폭력 특별법제정이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법은 헌법위원회에 넘겨 1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연구하는 동안 내용이 어떻게 수정될지는 모릅니다. 무엇보다 예의 주시하면서 성폭력 희생자들에게 불리한 법으로 바뀌지 않도록 계속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교단의 미래가 밝아야 우리의 하나님 나라 구현을 위한 길도 밝을 터인데요. 기장총회에 잠시 다녀오며 새삼 인지하게 된 것은 생물학적 남성 총대로 목회자, 장로가 정말 많구나 하는 것입니다. 각 노회에서 대표하는 총대들의 모임이라 남성권력의 힘이 작동하는 더욱 묵직한 곳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노회마다 여성총대의 비율을 하루속히 높여서 전체 비율을 늘려 나가는 것이 중요하겠다 싶습니다. 그래서 필요하고 예민한 안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성총대의 역할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장로선출이 있지요. 이번 총회에서 교회 내 뿐만 아니라 외로도 여성장로의 중요성을 다시금 실감하면서, 여성장로가 더 많이 선출되어 교회공동체가 건강해져 가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주간은 검찰개혁 관련 사건과 각 교단별 총회 관련 이슈들이 계속된 정신없는 한 주를 보낸 것 같습니다. 어제 서초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검찰개혁 사법적폐 청산 촛불집회가 열렸는데요. 참여 인원 거의 200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이렇게 초반에 많이 모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이 모여 검찰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그간 조국 검증에 대해 각자가 다양한 의견들을 갖고 있었는데, 개혁의 길 앞에서는 모두가 마음을 같이한 것 같습니다. 검찰은 계속해서 검찰개혁이 될까 두려워 무소불의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정작 철저히 수사해야 할 세월호 사건’, ‘장자연 사건의 연루자들’, ‘성상납 김학의 사건등에 대해서는 미온 수사를 하면서, 어찌 법무부 장관의 집 압수수색은 그렇게 초고속 으로 진행 할 수 있었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검찰이 이제는 정신 좀 차리고 국민의 힘이 더 무섭다는 것을 좀 깨닫기를 바래봅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검찰이 수구정치세력, 언론과 연대하며 검찰 개혁의 길을 막고 있는 현실 앞에, 우리가 이를 어찌 볼 것인가가 이제 남은 과제일 것으로 보입니다.

검찰의 수사건 기소권을 분리하고 검사들도 신설될 공수처의 견제를 받게 하려는 현 정부의 검찰개혁이 하루 빨리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OO으로는 못가요!]

 

우리는 잘 살아 보이는 것과 잘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 성서본문은 이 둘 사이를 혼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의 것을 내어 놓으면서 결단하고 행동할 때, 분명한 변화가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하늘뜻펴기 제목은 “OO으로는 못가요!”라고 정해보았습니다. 조금은 유치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분명 죽어서 가는 저기 있는 세계라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 가는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서 맑은 생각을 가지고 중심을 세워 실천해 보면 좋겠습니다. “OO”안에 어떤 말을 넣어볼까요? 세습으로는 못가요!”, “성소수자 차별로는 못가요.”, “이단시비로는 못가요.”, “검찰권력으로는 못가요.”, “편협한 이기주의로는 못가요.”, “꼰대정신으론 못가요.”, 이번주 J방송사의 뉴스 앵커브리핑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만나고자 찾아온 교계 목사들에게 한 목사님께서 언급한 예수 잘 믿으세요에 빗대어 말해본다면 목사도 못가요!”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잘 살아 보이는 것에 속지 않았으면 합니다. 잘나 보이는 것들 있어 우리가 너무 집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고 그것을 담아서 함께 일하는 일에 힘을 썼으면 합니다.

 

약자들의 삶, 좌절과 고통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혼자 감당하기 때문에 좌절의 늪에 빠져 곤두박질치는 것은 아닐까요? 고통과 힘듦에 겹겹이 쌓여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은 이 세상의 약자들에게 결코 혼자 감당해야 하는 외로운 길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이고, 지금 여기를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의 고통을 함께 메고 아픔을 함께 이해하고, 자신의 것을 내어 놓으며 공유하는 것 속에서 그 힘은 더욱더 커질 것이고 희망이 될 것이고 변혁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늘뜻펴기 이후 응답찬송으로 어둔밤 마음에 잠겨를 부르고자 합니다. 가사에 하나님’, ‘예수님이라는 용어가 없다하여 보수교단에서 천대받고 금지곡처럼 생각되어온 찬송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찬송은 본래 1,2절 가사는 김재준 목사님께서, 3절은 문익환 목사님께서 지으신 곡으로, 암울한 군사 독재정권 치하에서 기독교 역사의식을 가지고 새날에 대한 희망을 담아 낸 노래입니다. 오늘 이 찬송의 가사처럼 우리 삶에 희망을 꿈꾸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기를 기대합니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순응하지 않는 지상에서의 안락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당신과 함께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가 되도록 늘 결정하고 행동하는 힘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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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2 주님의 약속 | 김희헌 | 2023-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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