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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하나님과의 화해 | 김희헌 | 2019-03-31

by 김희헌 posted Mar 31, 2019 Views 31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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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3-31

하나님과의 화해 (5:9-12, 고전 5:16-21, 15:1-3, 11b-32)

2019.03.31 (사순절 4)

 

[십자가에 달린 신, 민중의 이야기]

꽃들이 앞 다투며 피고 있습니다. 하얀 목련과 노란 산수유 꽃이 집 앞에 피었습니다. 꽃샘추위가 몇 차례 반복되고 있지만, 한반도에 평화의 봄은 오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화해의 길을 내고 있고, 북미관계도 전쟁을 끝맺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진통하는 역사의 징후들이 남아있습니다. 낡은 정쟁과 폭력이 제철인 듯 벌어지고 있지만, 새로운 세대는 이 어둠을 걷어가는 지혜를 발휘할 것입니다.

무엇이 역사의 진보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풍요와 번영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온 지난 세대의 목표는 재점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사는 이 푸른 별은 인류의 고삐 풀린 욕망을 더 이상 받아주기 어렵게 되었고, 수백 년 동안 경험해온 이 체제에서 사람들은 돈이 스스로 너그러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배웠습니다.

기독교가 전한 복음이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요, 또 그것이 2천년 동안 인류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진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폭력의 문명에 시달린 인류가 새롭게 꿈꾸는 세상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서가 주장하는 역사의 진보란 지배의 문화를 섬김의 문화로 바꿔가는 것이요, 성서가 제시하는 인생의 과제는 십자가 정신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기록, 다시 말해서 인간의 마음을 훑고 지나간 하나님의 자국을 보여줍니다. 성경책에는 다양한 모습의 하나님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모습이 변해가는 것은 신앙공동체의 믿음이 성숙해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성서가 그 가르침의 절정에서 제시한 하나님의 모습은 십자가에 달린 신입니다. 그것이 사순절에 묵상할 주제입니다.

최근에 백기완 선생님이 <버선발 이야기>라는 소설책을 내셨는데, 그 내용은 버선발이라는 이름을 가진 머슴의 아들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잠깐 그 이야기를 하면 이렇습니다.

가난해서 늘 맨발로 벗은 상태로 지내서 벗은 발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다섯 살배기 소년은 산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냅니다. 새벽부터 머슴살이를 나가는 어머니는 산짐승이 먹지 못하도록 아들의 밥을 보자기에 싸서 매달아 놓습니다. 그것을 붙잡기 위해서 콩콩 뛰는 것이 일상이 된 버선발은 어느 날 자기가 사는 집이 바위 위에 지어진 사실을 알게 됩니다. 땅 한 평 갖지 못한 어머니가 호미로 바위를 깨서 그 위에 집을 지은 것이었지요. 땅에 대한 민중들의 한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 때 버선발은 머슴으로 끌려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한 많은 머슴살이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버선발을 도망치게 하고 자신은 처참한 모습으로 끌려갑니다. 이 가슴 아픈 광경을 마음에 새긴 버선발은 쫓기며 사는 거친 환경을 견디고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어렸을 때부터 맨발로 단련된 버선발은 어느덧 발로 땅을 한 번 구르면 큰 바위나 건물을 무너뜨리는 능력을 가진 청년으로 자라납니다. 한 번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땅을 나눠주기 위해서 단 한 번의 발길질로 바닷물을 말리고 거대한 농토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끝없는 욕심은 그 바다처럼 넓은 땅으로도 해소되지 않는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세상에서는 자신을 위대한 장수로 여기는 소문이 커가는 한편, 버선발은 부귀영화의 삶에 얽힌 죄악의 현실을 깨달아갑니다. 그러다 마침내 민중들의 투쟁이 시작됩니다. 이때 버선발은 앞장서 해결하지 않고, 민중들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맞아 피 흘리면서 맨 마지막 행렬을 울면서 따라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버선발 이야기는 종교적 결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재물에 관한 축복이나 가족들의 반가운 해후가 아니라, 피 흘리는 십자가를 진 민중들의 행진입니다. 민중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이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 행진에 초대됩니다.

 

[새로운 시작, 길갈에서 그친 만나 / 여호수아 59-12]

오늘 제1성서의 본문 여호수아서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노예들이 40년간의 광야 방랑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호수아서 처음 다섯 장은 가나안 진입을 준비하는 내용입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알리는 사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할례를 받은 사건입니다. 이전 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었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는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할례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의 9절은 그 할례사건에 이어진 내용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할례를 통해서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없애고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없애다는 뜻을 가진 길갈이라는 지명이 생깁니다.

길갈은 이후에도 계속 성소가 있는 중요한 도시로서 기능을 하게 되는데, 그 출발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근거지였습니다.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는 관문이 된 요단강을 건너면서 열두 개의 돌을 가져왔는데, 그것으로 기념비로 세우고 거기에서 먼저 남성들은 할례를 받으면서 가나안 땅의 정복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감각으로 본다면 이런 모습은 폭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지만, 율법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라 하겠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보다 극적인 사건은 광야생활의 음식이었던 만나가 내리기를 그친 일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길갈에 진을 치고 거기에서 나온 땅의 소출을 먹기 시작하자 더 이상 하늘에서는 만나가 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나가 더 이상 내려오지 않게 된 사태는 비극만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다양한 음식을 먹게 되었고, 땅의 것을 먹고 하늘을 섬기는 새로운 삶의 실험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음식을 먹고 이집트를 탈출했던 그들이 이제는 가나안 땅에서 난 소출로 유월절 음식을 만들어 먹고 또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지 않고,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게 된 그들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요? 성서에서 가나안땅은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갖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출애굽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가라고 한 약속의 땅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된 풍요의 땅을 의미합니다.

가나안은 출애굽 노예들에게는 행진의 목표가 되었던 기회의 땅이었지만, 그들의 진입은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약탈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의 삶은 역사의 영욕과 인간사의 질곡을 맛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늘의 양식을 먹고 살았지만, 가나안에서는 땅의 소출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찾고 버리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풍요를 맛보며 그 속에서 탐욕과 은총 사이에 문명과 영성을 뿌리 내리는 삶의 실험을 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탐욕과 폭력을 율법으로 합리화하면 할수록 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요, 하늘의 은총을 따라 살려고 하면 파괴된 세계에서도 새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의 삶이란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요에 대한 성서의 경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제 시작될 가나안에서의 생활에 대한 모세의 우려에서 잘 나타납니다.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신명기 31장에 나옵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섬기다가 재앙과 고통을 당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떠난 자신들의 삶을 돌이켜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31:16-20)

풍요를 추구하는 문명하나님의 맘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하는 종교는 과연 서로 공존할 수 있을까요? 율법에 매인 종교는 풍요를 축복으로 해석하며 옛 시대의 질서를 따라 매끄러운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종교는 무엇을 잃고 살아가는지를 끊임없이 묻습니다. 깊이 묻다 보면 깨닫게 됩니다. 잃어버린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요,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마저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은총이 만드는 새 세계 / 누가복음 15:1-3, 11b-32]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잃어버린 것을 찾은 기쁨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고 죄인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자유를 갈구하는 작은 아들의 당돌한 행동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에게 돌아올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합니다. 그것은 가족의 유대감을 깨뜨리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뜻대로 재산을 나눠줍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 것을 챙겨 멀리 떠나서 방탕한 삶을 살아가다 가진 모든 것을 날리고 맙니다.

둘째 아들은 자유를 원했고 종속된 삶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만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삶이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들은 자유의 땅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고, 배가 고파 쥐엄 열매라도 먹고자 했지만 그것마저도 없었습니다. 비참한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서 굶주려 죽게 되었는가, 돌아가자.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으니,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 그냥 품꾼으로라도 받아들여달라고 아버지께 빌자. 이런 각성과 다짐으로 다시 집을 향합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오는 작은 아들을 보고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잔치를 베풉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용서를 빌 것을 요구하지 않고 은총을 베풉니다.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성실했던 큰 아들로 인해 긴장감이 생깁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큰 아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나서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성실했던 자신에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도 주시지 않았으면서, 재산을 삼킨 녀석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느냐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인자한 아버지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네 아우를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니? 아마 머잖아 큰 아들도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과연 자신들의 편견을 벗고 살 수 있게 될 것인지를. 잃었다 찾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 아버지처럼, 바리새인들도 죄인들을 용납하고 같이 살 수 있게 될까요?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살아있는 종교는 율법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이끌어낼 각성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각성이라는 것은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무엇이라기보다는 찾는 방식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 세상의 세속적 질서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 세상을 다르게 보는 능력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서 회복되듯이, 새 삶을 사는 믿음은 은총의 경험에서 탄생합니다.

 

[번역이 아닌 변혁, 하나님과의 화해 / 고린도후서 516-21]

정신분석학을 통합적으로 조망한 철학자 켄 윌버는 종교의 기능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하나는 번역(translation)이고, 다른 하나는 변혁(transformation)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번역의 기능을 합니다. 번역의 종교는 의미를 전달해주는 종교입니다. 여러 가지 신화와 비유와 담론과 이야기를 해석해 들려줌으로써 개인의 삶을 견고하고 풍요롭게 해줍니다. 번역의 기능을 하는 종교는 의식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보다는 허약한 마음을 강하게 하며 자아를 변호해주며 증진시킵니다. 그래서 번역의 종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예배에 참여하고, 기도를 하고, 교리를 믿을수록 구원의 확신이 열정적으로 생겨납니다.

반면에 매우 소수의 사람들에게 종교는 근본적인 변혁과 해방의 기능을 합니다. 이때의 종교는 자아를 강화시키기보다는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위안을 주기보다는 비탄에 빠뜨리고, 자아의 견고성보다는 공허함을 보게 하며, 자기만족보다는 자기를 깨뜨리도록 이끕니다. 그것은 파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율법적인 종교는 번역의 기능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종교는 변혁을 향해 나아갑니다. 진보적 입장을 가졌든 보수적 입장을 가졌든 종교를 번역의 기능에 가두는 것은 비극입니다. 거기에는 자기만족의 언어만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변혁적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성서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울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에게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삶을 의미합니다.

17절과 18절은 기독교적 가르침의 핵심을 말해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변혁적 종교의 모습을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사는 것이요, 둘째는 새로운 피조물(καινκτίσις)이요, 셋째는 하나님과 화해(καταλλαγή)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혁적 삶에 관한 세 가지 다른 표현입니다. <새로운 삶>이란 <하나님과 화해>한 삶이요, 하나님과 화해한 삶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삶의 근원적인 목표를 하나님과의 화해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일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일까지도 포함합니다. 사회적 분쟁의 극복과 역사의 문명적 성취 역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종교가 신의 이름으로 저지른 난동과 파괴를 고려하면, 사회적 차원에서 이룰 하나님과의 화해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분단과 독재의 시대에 잔인한 범죄와 추악한 부역을 해왔습니다. 이념으로 번역된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결국 자신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죽은 교리로 뒤바꾸고 삶을 질식시키는 일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한국역사와 화해해야 하고, 역사와 화해하기 전에 하나님과 먼저 화해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마치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가 면죄부 장사를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용서를 값싼 교리로 번역하여 가르치며 위선적인 신앙인을 양산해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스스로의 믿음에 담긴 진실을 의심하는 질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는 삶,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며 새롭게 거듭나는 종교적 변혁을 꿈꾸지 않습니다. 저마다 이로운 논리로 사태를 번역하고, 하나님의 변혁적 은총을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무마시키고 맙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생명운동의 의미를 잃은 큰 불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해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정관념과 이성적 신념에 머물기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부르심을 따라 변화를 감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과 실패라고 하는 즉자적인 결과물에 대한 집착과 소란에서 벗어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을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분투하면서 살아가고, 아파하면서도 전진하는 것은 그렇게 하려는 의지’(will)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근대의 이성적 인간은 의지를 자기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우리를 잘 들여다보면, 스스로가 의지를 갖기에 앞서 먼저 그런 의지를 갖도록 요청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의지는 그 요청에 대한 순종이요, 그 부름에 대한 응답입니다. 사랑하려는 의지에 앞서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으며, 믿으려는 의지에 앞서 부르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하나 되기까지 쉬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밝히 알고 그 부르심에 순종할 때 평화를 누립니다. 이 신앙의 길은 변혁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고되고 끈질긴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힘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먼저 그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생명의 길을 발견하는 사순절의 깨달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길을 그리워하며, 하나님과 화해한 삶을 통해서 삶의 가장 커다란 부름을 안고 살아가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반드시 지나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요, 은총에 힘입어 이뤄지는 세상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여 생명의 길을 걷고,

화해의 직분을 감당하며 평화를 일구는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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