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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지금, 여기, 빛을 기억하는 우리! | 김정원 김현준 함유선 | 2018-03-11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23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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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3-11

지금, 여기, 빛을 기억하는 우지금, 여기, 빛을 기억하는 우리!

 

(민수기 21:4-9, 에베소서 2:1-10, 요한복음 3:14-21)

 

김정원 목사

 

교우 여러분, 혹시 “에바 쎄바 쓰레빠” 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어떤 ‘지나친 상황’들을 말할 때 사용하는 젊은 친구들의 표현인데요, “over야~”라고 하는 말에서부터 시작된 이 표현은 “에바야~”가 되고, 이제 여기에 ‘라임’ 즉 운율을 붙이게 되니 “에바 쎄바 쓰레빠”가 된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이렇게까지 설명하고 있는 것 자체자 “옛날 사람”임을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표현들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는 친구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내고 있는 목사 김정원 입니다.

 

현재 탄자니아에서는 wcc 한창 진행 중인데요, 김희헌 목사님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며칠 전 wcc에서 온 서신의 주요 내용은 젊은 신학자들 발 기존 기독교 사명에 대한 혁명적 개선의 요청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들의 요청이 넘치는 wcc의 현장에서의 소리는, 지금, 여기 우리 청년들의 생동감과도 비슷하기에 제 원고에 몇 자를 담아왔습니다. “The truth we are all sharing with the world is a living truth coming out of the life of people, it is not a dead dogma” 번역하면, ‘우리가 현재 나누고 있는 진리는 사람들의 삶에서부터 전달되어 오는, 즉 죽어있는 도그마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진리입니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즉, 살아있는 진리란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전해지는 것이라는 말이겠지요. 

 

오늘 읽은 본문 중 하나인, 에베소서는 바울이 첫 번째 감금생활을 할 적에 쓰인 서신서인데요, 바울은 에베소에 사는 믿는 자들에게 “그대들은 모두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작품이든 지간에, 그 속에는 그것을 만든 이의 의도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다시 묻습니다. 우리 속에 들어 찼을 그 의도, 다시 말해 우리를 만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바로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바울은 그 물음에 답합니다. 

 

자, 그런데 한 번 더 묻습니다. 그럼 그 ‘선한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 대답을 오늘의 다른 본문인 요한복음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선한 일이란, 어두움이 아닌 빛을 쫓는 일이라고 요한이 말해줍니다. 요한복음에서의 이 빛, 어둠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이 빛은 여실이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물음들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는, 다시 말해, 선한 일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리 작품들은, 예수가 그러했듯 어둠이 아닌 빛을 쫓는 이들입니다. 

 

요한은 바로 이 빛을 쫓는 자들이야말로 진리를 행하는 자들이라 말합니다. 설교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죽어 있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진리란,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흩어져 있는 이 이야기들을 모아, 하나의 명제를 완성할 수 있겠습니다. ‘참 진리란, 빛을 쫓는 사람들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빛을 기억하는 우리가 여기, 이곳에 모였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청년’들과 더욱 함께하는 자리입니다. ‘청년’, ‘청년’, ‘청년’.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지 않는지요? 청년이 이토록 벅차고 이토록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연유는 무엇일까요? 체 게바라의 말을 인용하자면, “가슴 속에 항상 불가능한 꿈을 갖기 때문이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주지하시듯 우리네 청년들의 삶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푸코는 만일 개인이 사회적 구조를 내면화할 경우 사실상 체제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개인은, 자신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 채 자기 스스로가 자기 의지로 자기를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저항한다고 할지라도, 이 저항은 권력 안에서의 저항이지 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통적인 권력개념에서의 권력이란 억압과 배제, 그리고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현대의 규율사회에서 이 권력은 보다 정교하고 효율적이고 교묘하게 지금의 현실 자체를 생산해 내기 때문에 종국에 우리들은 체제 유지 및 체제 재생산에 기여하도록 사용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이 체제 내에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을 해 보아도, 다시 말해 이 억압과 차별을, 이 배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암만 노력을 한다 하더라손, 이것이 저항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는 아주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 속에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요? 많은 좌파 철학자들이 이 절망을 해결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었는데, 그러던 중 바디우, 지젝, 아감벤 등은 바울을 하나의 대안적 텍스트로 제시합니다. 그 중 바디우는 진리를 몰고 오는 사건을 경험하는 사람 즉 다메섹에서 진리 사건을 경험한 바울과 같은 사람이 이 자본주의의 벽을 허물어 낼 가능성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기쁜 소식입니다. 이 현실 속에, 이 절망 속에 우리가 머무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갇혀 있는 희망을 건져내 올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바울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오늘 바울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 끝에 우리는 하나의 명제를 얻었었지요. ‘참 진리란, 빛을 쫓는 사람들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다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나 봅니다. 여기서 그 사람들이란, 빛을 쫓으며 진리 사건을 꿈꾸는 이들입니다. 비록 세상은 녹록하지 않고, 우리의 저항은 늘 실패일 수 있으나,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불가능할지 모르나, 그 불가능한 꿈을 매일 꿀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예수의 삶을 지향하는 이유이고, 이곳 향린에서 예배를 보는 근거일 것입니다. 

 

진리를 경험하고자 하는 우리, 빛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 그 우리가 되려는 의지를 갖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요, 은총일 것입니다. 

 

물론, 그 불가능을 꿈꾸는 일은 고단한 것이 사실입니다. 어둠이 그득한 곳에서 빛으로 서있는 것은 외로운 길이요, 고독한 길일 것입니다. 다만, 오늘 요한이 모세의 이야기를 전한 데에서 위로를 얻고자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황량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와 물이 없는 사막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 분입니다. 지친 우리의 마른 목을 축이게 해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며, 갇힌 자들을 해방시키셨던 그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 은총의 하나님이,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들을 위로하며 진리의 자리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우리 향린 교우분들에게 부탁드리기로는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예배를 주관한 이 청년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빛을 품고자 결단하는 우리 청년들을 위해 응원해 주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청년 교우들과 제 스스로에게 권면하기로는, 우리 함께 불가능한 꿈을 품고 살아가봅시다. 쫄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봅시다. 이 혹독한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작품이며 빛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따뜻한 기운을 잃지 말고, 더디 가도 진리의 길을 함께 걸어 가 봅시다.

 

이제, 이야기의 바통을 다음 청년에게 넘겨봅니다. 

 

  

 

  

 

작은 생명을 보듬는 교회공동체

 

김현준 집사

 

안녕하세요. 저는 희년청년회에 몸담고 있는 30대 후반의 청년이자, 두 돌이 조금 넘은 은휼이를 유아부에서 함께 키우고 있는 김현준 집사입니다. 청년주일을 맞아 저에게 하늘뜻펴기를 할 기회를 주신 향린교회와 교인 여러분께 진심을 담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처음에 하늘뜻펴기를 제안 받았을 때 “새청, 청신, 희청에서 한 명씩 나와서 이야기하니 한 사람당 5분밖에 시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좀 편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난 목요일 김정원 목사님께서 카톡으로 말씀하시기를 “개인의 신앙 이야기, 아빠로서의 이야기, 아이에게 갖는 신앙인으로서의 희망, 세상 속에서 젊은이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담아서 나눠주세요.” 너무 다양하고 하나하나가 어려운 주제이고, 평소에 고민을 많이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라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오늘 제가 나눌 하늘뜻펴기가 조금은 어설프고 덜 익은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저 아빠가 처음인 초보 아빠의 구구절절 육아분투기로 가볍게 들으셔도 될 듯합니다. 이제 본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청년들은 참 힘듭니다. 물론 이곳에는 배를 곯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젊은 시절을 보내신 분도 있으실 것이고, 독재정권에 대항하며 청년기 내내 최루탄을 마셨던 분도 있으시기에 말씀드리기 다소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먹을 것 걱정 없는, 민주화시대가 되었지만, 요즘 청년들도 참 살아내기 팍팍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12년간 밤을 낮처럼 공부만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 이제 끝인가 생각했는데, 취업의 문은 더더욱 좁아 꽃 같은 20대 초반을 스펙 쌓기에만 몰두하며 지냅니다. 취업을 했다고 끝인가요? 이제는 결혼을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비혼을 선언하신 분도 향린교회에는 적지 않지만, 많은 이들은 결혼을 앞두고 자기 연봉의 열 배는 되는 내 집 장만 걱정에 그나마 남아있던 자존감이 콩알만 하게 쪼그라듭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주로 새청과 청신에 몸담고 있는 청년들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제가 속한 희청의 청년 앞에는 또 다른 벽이 있습니다. 직장에 적응을 하고 결혼까지 했으니 이제 한숨 돌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으니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이는 단순히 아이를 키우는 비용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생명을 오롯이 책임지기에는 너무나 약한 두 사람과, 그것을 통해 직면하게 되는 우리의 밑바닥 이야기입니다. 

 

저는 아내인 김현경 집사와 9년을 만나고 결혼했습니다. 아내가 스물한 살, 제가 스물세 살 만났으니 20대를 더불어 함께 보낸 셈입니다. 짧지 않은 기간 많이도 싸웠고 그러면서 서로에게 적응해갔습니다. 싸우면서도 서로에게 덜 상처 주는 대화방법을 익혔고, 내가 용납할 수 있는 경계와 상대가 이해해줄 수 있는 선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결혼을 하고 하나의 가정을 꾸리면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맞벌이 부부라 둘 다 바빴지만 집안일을 절묘하게 나누어 하며 착착 가정을 꾸려갔습니다. 저는 빨래를 하고 개서 정리하는 일이나 냉장고 안을 치우는 일, 재활용과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일을 잘 하고 그것에 부족함이 있으면 눈이 자꾸 가고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러나 싱크대 위의 흥건한 물이나 마룻바닥의 머리카락, 책장 위의 먼지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은 아내가 불편해하며 깨끗이 치웁니다. 저는 요리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아내는 설거지가 더 편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서로가 상대의 모자란 곳과 집안의 필요를 찾아서 하다 보니 자연스레 집 전체가 잘 돌아갔습니다. 대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대에게 아쉬운 점이 있으면 솔직히 이야기하고 이해하니 결혼생활이 연애할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아내는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밤새 두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먹어야 하고, 하루에도 열 번 이상 똥을 싸는 아이와 생체리듬을 맞추며 살았습니다. 매 순간 너무나 피곤했고 자연히 신경은 날카로워져 있습니다. 물론 저도 육아에 동참하였지만 제1양육자인 아내가 지니는 부담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평소였으면 자신이 채워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이를 챙기느라 케어가 불가능한 제 모자람이 아내에게는 너무나 크게 보였고 그것을 지적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저는 또 어땠을까요. 온종일 직장에서 일과 사람에 치이고 들어왔는데 예전보다 더 많은 집안일이 제 몫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육아로 지친 아내의 어두운 얼굴을 보면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인 듯한데 나도 피곤해 죽겠고. 밤에 아이는 왜 이리 수시로 깨서 우는 것일까요. 저는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말이죠. 

 

이렇듯 서로가 몸과 마음의 한계까지 치이다 보니 자연스레 상대에 대한 자연스러운 배려심이 줄어들고 내 밑바닥을, 그것도 엄청 치사하고 소인배 같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집에서 아이와 합법적으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곳이 화장실인데요,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 화장실에 오래 앉아있게 되고, 평소였으면 1분이면 끝났을 양치질이 3분을 넘게 됩니다. 갑자기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싶어지고, 주말 아침에는 애기가 깨서 우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질끈 감게 되었습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이는 아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아내와 많이 했던 이야기가 ‘아이는 애초에 둘이 책임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어찌어찌 키울 수는 있겠지만 가족 모두가 생명력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함께 책임지는 관계가 더 필요합니다. 다행히 저희는 양가 부모님이 은휼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함께해주시는 편인데요, 부모님이 은휼이를 봐주시면서 짬이 날 때 생각합니다. ‘아이를 잘 보고 못 보고를 떠나 함께 살며 은휼이를 챙길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사람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어른들이 자주 이야기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은휼이에게 동생 만들어주면 어때?” 우리를 위해 하시는 말씀인 것은 알지만 쉽게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전 어르신들이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었던 데는 대가족이었던 이유도 있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삼촌 등이 짬 날 때 살짝씩만 봐줘도 엄마 아빠는 한결 숨통이 트이니까요. 지금은 그 자리를 자본이 대체하고 있습니다. 만만찮은 비용으로 육아도우미를 고용해 아이를 맡길 수 없는 사람들은 아이를 키우는 부담이 더 클 수밖에 없겠지요. 요즘 젊은이들이 아이를 적게 낳기로 결정한, 또는 내몰린 이유는 분명합니다. 아이는 애초에 가족과 공동체가 함께 책임져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향린교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은휼이가 백일이 지나자마자 교회에 다시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아내와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아이를 낳기 전부터 향린교회의 오르간 반주자였습니다. 아이를 가졌을 당시, ‘주중에는 내가 일을 하고 아내가 아이를 보니 주말, 최소 주일에라도 아내가 교회 사역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내가 은휼이를 챙기자’고 약속했습니다. 한나절 정도라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정작 교회에 나오자마자 바로 후회했습니다. 1층 향우실의 방에서 은휼이를 보면서 TV 화면으로 예배에 참여했는데, 아이를 챙기느라 설교 말씀도 거의 듣지 못하고, 예전에 함께 하던 희청모임에는 전혀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가며 만나는 교인들이 “아유~ 아빠가 아이를 참 잘 보네. 진짜 기특하네” 등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때마다 ‘내 속은 아무도 모르지’라는 말만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교회에는 나오는데 신앙생활은 멈춰있는 듯한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에서 만난 것이 유아부였습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은휼이가 유아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뛰어다니며 함께 놀고 찬양하며 율동하는 형님들 사이에서 이제 막 기기 시작한 은휼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도움을 받은 것은 오히려 저였습니다. 함께하는 어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당시 유아부 목사님, 선생님들과 소통하며 한결 마음이 트였습니다. 이듬해에는 형님 또래들이 모두 유치부로 가고 유아부에는 은휼이 혼자 남았습니다. 아이는 은휼이 하나인데 전도사님과 선생님들, 저까지 어른 다섯 명이 은휼이를 챙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희들끼리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관계하는 재미도 늘어났습니다. 은휼이를 챙길 수 있는 분이 많으니 그만큼 몸과 마음도 평안해졌습니다. 또 일 년이 지났습니다. 친구인 주원이를 비롯해 보라, 래온이, 수아, 주혁이 등 동생들도 들어왔고 은휼이는 어느덧 가장 큰 형님이자 듬직한 교회오빠가 되었습니다. 지난주부터는 예배 전 엄마 아빠들도 함께 지난 한 주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직은 많이들 어색하지만 육아를 하며 어려운 지점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앞으로 더 깊은 나눔이 되고 그것이 서로의 삶에 또 다른 기운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예전에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8학군으로 이사하고, 유치원 때부터 여러 개의 학원에 보내는 이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자기 아이가 학업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가족 모두 몸담고 있는 터전을 옮기는 것이 얼마나 큰 아이사랑인가요. 저는 같은 마음으로 은휼이와 향린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은휼이가 향린교회의 관계망 안에서, 믿음으로 자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로 살아가게 하고 싶습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은휼이를 향린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키울 수 있고, 유아부 전도사님, 선생님 그리고 다른 부모님들과 함께 키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요새 은휼이에게 자주 이야기하는 말이 있습니다. “은휼아.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 실수할 때가 많으니 이해해줘”라고요. 아빠가 처음인 저는 아직 많이 서툴고 아이를 신앙 안에서 키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은휼이가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사는 신앙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향린교회가 책임져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향린의 어른들께 부탁드립니다. 오가며 만나는 아이들이 있다면 꼭 한 번씩은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춰주시고, 그 아이의 부모에게 힘내라는 한 마디 건네주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는 행동이 향린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한 마음을 갖고 싶어요!

 

함유선 교우

 

안녕하세요. 새청 함유선 교우입니다. 반갑습니다. 낮꿈 공연에서 뵈었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6년이란 시간이 흘렀네요. 대학교를 입학하고는 한동안 주일에 나오지 않다가 다시 교회에 나와 이 자리에서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 십대인 제가 어떤 생각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향린교회를 다시 찾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를 여러 교우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시절 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활발한 아이였습니다. 티비에 나오는 드라마들을 보며 저 드라마들 보다 더 재밌게 만들 수 있는 감독이 되어야겠다란 막연한 자신감을 품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어서 우연히 접하게 된 에드워드량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이란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하나의 작품으로 삶에서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부분들을 세심하게 그려내는 영화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꿈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저는 삶에 지쳐있는 여러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제게 꿈이 있다는 것이 부러워했었고, 저는 미래에 관한 고민들을 함께 이야기 나누곤 했습니다. 그 고민들의 대부분은 좋은 대학교를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과 그로부터 파생될 부모님의 실망감, 그로 인한 부담감을 견디기가 힘들다는 것들이었습니다. 많은 친구들에게 꿈을 꾼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과 같았습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 그저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이 저마다의 큰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좋은 대학교를 가면 ‘남편감이 바뀐다’는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들을 숱하게 말해주셨고 학교와 학원에서는 성적에 따라 차별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적으로 힘들어하는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줄 때면 그 친구들의 장점을 이야기하며 함께 꿈을 찾고는 하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사하게도 저는 영화를 배울 수 있는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부푼 욕심을 가지고 3학년까지 정신 없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명절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고 친한 친구들과도 떨어져서 3년이란 시간을 보낼 때쯤. 늦은 밤 작업실에서 편집을 하고 있을 때, 몇 주간 연락을 드리지 못했던 아빠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셨다는 연락이었습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외할아버지 또한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얼굴 한번 제대로 보여드리지 못하고 떠나 보내드린 것에 대한 자책과 후회 그리고 죄송스러움이 끊임없이 마음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한테 있어서 소중한 가치들을 너무 당연하게 여겨 소홀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쉼을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소중하게 간직해야 될 것 들을 다시 한 번 되짚는 시간을 가져보자 하고 말입니다. 휴학을 하면서 극장에서 일을 하며 좋아하던 영화도 많이 보고 많은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친한 친구와 뜻 깊은 유럽여행도 다녀왔고,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수영을 새벽녘에 아빠와 함께 다니고 있으며, 3년간 보지 못했던 친구들 그리고 친척들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지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가치들을 찾아가며 꽤 괜찮은 일상을 보내고 있던 제 생각에 큰 혼란은 주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건 다름이 아닌 친구들과 고민을 나누었던 학교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른 새벽 수영장에 가면 어르신들이 많은데, 그분들은 저를 보시고 가장 먼저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학생이야?” “네.” “넌 학교가 어디야?” 라고 말입니다. 가끔 어르신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니 우리 며느리가 무슨 대학인데. 애가 아주 똑 부러져.” 등 학교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시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하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 또한 학교를 이야기 한다는 것에 주춤하게 되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연스레 제가 걸었던 길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주변 친구들 중에서도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싶은 욕심에 사수를 하여 수능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고 이년간 편입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친구들처럼 이삼년을 투자해가면서 더 좋은 대학 간판을 달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보다 현실적인 선택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반복적으로 하다 문득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인정해주고 있지 않구나 하고 말입니다. 제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들의 눈치를 보고, 그래서 꿈보다 나의 외적인 것을 가꾸기 위해 필요한 돈이나 명예 등을 먼저 생각했던 그 몇 달 동안 저는 누군가의 상처를 들여다 볼 내적인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보다 건강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어떤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할까 생각했습니다.

 

현재 제가 내린 결론은 첫 번째, 나를 내가 사랑하고 존중해주자. 두 번째, 선함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자. 세 번째, 젊을 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자.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제가 저를 사랑한다면 타인의 시선에 저의 가치가 휘둘리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선함을 베풀수 있다면 마음의 풍요로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고, 젊음을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는 격언처럼 틀에 갇혀 안락함을 느끼기보다 새로움에 대한 도전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매번 엄마 때문에 힘든 순간들이 많아서 엄마와 다툴 적마다 이렇게 불행을 주는 사람이 하나님이면 믿지 않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많이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삶의 끈이 놓일 것 같으면서도 항상 저를 바로 잡고 계시는건 바로 하나님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구보다 걱정해준 향린교회 언니, 오빠, 동생, 목사님, 가족에게도 다시 한 번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 이 자리에서 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교우분들과 함께 나눌 수 있음도 감사함이네요^^. 저를 향린교회로 다시 부르신 건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쁘게 살았던 저한테 ‘너한테 있어서 중요한 가치들을 잊지 말라’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에게 위로가 되어주려고 노력하는 향린교회처럼 타인을 돕는 선한 마음과 소중한 관계들을 다시 한 번 마음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조금 더 욕심이 있다면 저의 친구들도 타인의 시선에 상처받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소망을 함께 나누고, 이 길을 함께 걸어갈 제 친구들을 소개할까 합니다. 제 친구들을 불러볼까요?

리! / 김정원 김현준 함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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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제목
2018-02-25 희망이 피어나는 시간 | 조은화 | 2018-02-25
2018-09-02 흠이 없는 경건 | 김희헌 | 2018-09-02
2018-07-15 화해, 회복, 시작 | 허학범, 김하나 | 2018-07-15
2021-09-26 화목하게 지내어라 l 김지목 목사 l 2021-09-26
2023-10-08 홍근수, 통일의 사도 민족의 목회자 | 김경호 | 2023-10-08
2021-01-10 혼돈에서 튀어나온 빛 | 김희헌 | 2020-01-10
2018-08-12 향기로운 예물 되어 | 강정구 김희헌 | 2018-08-12
2018-10-07 해방과 환대의 교회 공동체 | 임보라 | 2018-10-07
2018-01-21 함께 부르는 노래 | 오현선 | 2018-01-21
2018-06-17 함께 마주하기 | 조은화 | 2018-06-17
2020-01-12 하늘이 열리는 사건 | 김희헌 | 2020-01-12
2023-05-21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 ㅣ 김지목 ㅣ 2023-05-21
2023-07-30 하늘나라 살아내기 ㅣ 박희규 ㅣ 2023-07-30
2018-02-11 하느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 | 김희헌 | 2018-02-11
2021-07-25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따라 ㅣ 김지목 ㅣ 2021-07-25
2018-12-16 하나님의 평화 | 김희헌 | 2018-12-16
2019-01-06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 김희헌 | 2019-01-06
2020-07-26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 김희헌 | 2020-07-26
2020-11-22 하나님을 '아는' 교회 | 김지목 | 2020-11-22
2020-03-01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 김희헌 | 2020-03-01
2021-09-19 하나님께로 가까이 | 김희헌 목사 | 2021-09-19
2019-03-31 하나님과의 화해 | 김희헌 | 2019-03-31
2019-09-22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 김희헌 | 2019-09-22
2018-09-16 하나님과 사람의 일 | 이세우 | 2018-09-16
2018-07-22 하나 되게 하신 그리스도 | 김희헌 | 2018-07-22
2023-12-25 포대기에 싸여 구유의 누인 갓난아기 ㅣ 김지목 ㅣ 2023-12-25
2020-12-25 평화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 | 김희헌 | 2020-12-25
2018-12-25 평화의 소식 | 김희헌 | 2018-12-25
2021-08-08 평화의 길을 찾아서 | 김희헌 | 2021-08-08
2022-11-13 평화의 길은 어디에 | 김희헌 | 202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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