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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동풍이 일어날 때 | 김희헌 | 2020-09-13

by 김희헌 posted Sep 13, 2020 Views 21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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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9-13

동풍이 일어날 때 (14:19-31, 14:1-12, 18:21-35)

2020.09.13. 창조절 두 번째 주일

 

[문명의 전환, ()의 바람]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고, 긴장감이 높은 상태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커다란 위기 앞에 오랜 시간 노출되다 보니,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도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코로나 사태가 인류에게 던진 질문이 무엇이냐를 두고 토론하는 모임이 많습니다.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중에 반복해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코로나 사태와 같은 총체적인 위기는 이미 예견되었고, 이 사태로 인해 우리는 근본적인 삶의 전환이라는 과제를 더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서 있다는 반성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이 고통은 사실 우리가 만들어온 삶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그분은 지난 30년 동안 우리 사회에 생태주의 사상을 불어넣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그가 들여다본 인류의 삶은 자본의 마력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는 삶이요, 그 속에서 발휘되는 지혜는 미래를 더욱 위태로운 곳으로 몰고 가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책은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라는 제목을 가졌습니다. 평생 외쳤던 주장이 압축된 표현이라고 봅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인류를 끌고 온 근대문명은 그 동력을 산업에서 찾고, 성장을 절대적인 목표로 삼고 움직여왔습니다. 이 문명은 아무리 성장해도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할 수 없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4차산업혁명이 아니라 5, 6차 혁명이 이뤄진다 해도,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자연에 대한 약탈을 멈출 수 없는 방식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익숙했던 그 삶이 파국을 향해가면서도 잠시 이른 곳이 코로나 사태입니다.

이 사태 한가운데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바이러스의 활동이 아니지요. 이 사태를 채우고 있는 것은 인간의 고통입니다. 우리 가운데 선한 사람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맞고 있는 이 고통의 현실에서 더욱 큰 고통은 약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영적인 사람은, 인간의 고통만 아니라 자연의 고통과 신()의 고통 또한 느낄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이 앞으로 걸어갈 길을 가리켜 생태문명이라고 부른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비틀거리고 있는데, 그 이유를 들춰보면, ‘생태문명의 시대로 나아가는 믿음의 방식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여전히, 타인의 운명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풍요를 쌓을 수 있다고 여기는 근대문명시대의 믿음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근대문명은 서로의 운명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근대의 기독교는 상대방의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신에 관한 무자비한 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당연히 지각 있는 사람은 신 없이도 가능한 무신론적 삶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근대문명이 깊어갈수록 무신론이 승리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근대의 유신론과 무신론 모두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위기를 신의 기적적인 개입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유신론이든, 그런 일은 없다고 보는 무신론이든 간에, 삶을 스스로 건사해야 한다는 뼈저린 개인주의로 얼룩진 근대문명을 극복하는 일에는 무력합니다.

기독교가 생태문명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구조부터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성서의 믿음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성서 전반에 흐르는 가장 커다란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거대 제국의 지배와 억압, 차별과 폭력을 거부하는 정신입니다. 그것은 세 번의 주요 변곡점을 거쳤습니다. 성서 안에서 움직이는 믿음의 공동체는 먼저 이집트 제국으로부터 탈출하면서부터 형성되었고, 바빌론 제국의 포로기를 거치면서 자신의 신앙을 단련하여 완성하였고, 로마 제국의 시대를 지나면서 민족적 울타리를 넘어 전 지구적으로 공동체를 일구는 실험을 확산시켜 나갔습니다.

이들이 믿었던 신은 약자들의 고통과 비애를 포용하는 방식에서 무한하였고, 정의와 평화를 향한 자신의 불타는 사랑에서 완전했습니다. 그 신의 사랑(agape)이 역사와 우주를 새롭게 지어가는 동력이라고 믿었습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신의 창조는 고난의 흔적 하나 없는 절대 힘의 자기표출이 아니라, 피조물의 애달픈 외침을 동력으로 삼아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성서의 신은 탄식하는 이들의 동반자, 절망하는 세계를 부르짖어 깨우는 우주의 시인(Poet)이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창조가 바로 이 우주적 시인의 부르짖음(cry)에서 비롯된다 하겠습니다. 근대문명 시대의 기독교가 신봉한 신에 대해는 냉소적이었던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지적 여행을 그린 소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과 땅을 휩쓸며 불어오는 거대한 호흡, 우리들의 마음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심장에서 일어나는 위대한 함성,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신이라고 말한다.” (Report to Greco, 291)

이와 비슷한 성서의 증언을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서 듣습니다. 거대한 동풍이 일어나면서 시작되는 해방의 사건입니다.

 

[마른 바다를 걸어간 믿음 / 출애굽기 1419-31]

출애굽기 14장은 이집트 제국을 탈출한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바다가 갈라진 기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 사건을 둘러싸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벌어진 교감에 관한 것입니다.

성서가 주목하는 대목도 모세의 인도를 따라 해방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발걸음이 성서가 앞으로 그려갈 해방사건의 원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퇴양난의 시기에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뒤에서는 중무장한 군대가 추격하고 앞에는 바다로 가로막힌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아직 공포가 다 씻기지 않은 자리에서 믿음으로 일어서야지만 감당할 수 있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들이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용기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보다 먼저 움직이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았습니다.

21절을 보면, “주님께서 밤새도록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내셨다고 말합니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마른 땅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나님은 밤새 노동을 합니다. 바다를 휩쓸며 불어오는 거대한 동풍이 되어 바닷물을 밀어내고 있는 이 신의 노동은 해방의 몸부림입니다. 바람을 통해 나타난 이 신의 몸부림을 히브리인들이 보지 못했다면, 옛 시대의 노예살이는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풍이 일 때 하나님이 만들어내는 새길을 보고, 그길로 나아갑니다.

보통 바람이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동풍이 불어도 인과관계가 분명치 않은 그 현상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친구에게 쓴 시의 마지막에 마이동풍’(馬耳東風)이라는 구절을 넣어 시대를 한탄했는데, 그것은 시인들이 아무리 좋은 시를 짓더라도 세상의 속물들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울분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일어서는 삶을 동풍(東風)으로 표현한 출애굽기의 가르침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얼어버린 동토의 땅에 동풍이 불면 새싹이 돋고 꽃이 핍니다. 동풍이 불면, 혼돈의 바다가 갈라져 새로운 길이 생겨납니다. 여전히 그 길의 좌우편에는 언제 쏟아져 내릴지 모르는 위협적인 물 벽이 있습니다. 약탈의 세계를 지속하려는 세력들에게 그 물 벽은 패배와 죽음을 주는 위협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앞으로 가는 사람들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새길이 됩니다.

성서는 세 번이나 반복하여 (16, 22, 29), 사람들이 마른 땅을 밟고 지나갔다고 말합니다. 바닷길을 마른 땅으로 그려낸 해방의 상상력을 반복해서 표현한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이들은 동풍이 일어날 때 새 시대를 향해 앞으로 걸어나간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회가 동풍이 일어난 시대의 꿈을 잊고 빠르게 침체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4년 전 혹한의 겨울을 촛불로 밝히고, 동풍이 부는 이른 봄에 완성된 촛불 혁명의 과제는 점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2년 전 남북관계에서 동풍이 일 때 <판문점 선언><평양 선언>을 만들었지만, 제국이 둘러쳐 놓은 장벽에 갇혀 과감한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 통한이 <평양선언> 2주년을 앞두고 더욱 커집니다.

교회가 맞은 위기는 어떻습니까? 노동의 신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약자들의 절규를 외면한 교회는 푸른 꿈이 담긴 역사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피해에는 아랑곳없이 자기 신념에 몰두한 집단을 낳게 되었습니다.

다시 우리는 평화와 사랑에 충동하는 감각을 지닌 영혼을 교회의 품에서 길러낼 수 있을까요? 극단적 열정을 따라 춤추지 않으며, 중요성을 분별하는 지혜와 절제의 감각을 갖고, 은총의 세계 앞에서 고요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면, 우리 시대의 수치도 씻겨질 것입니다.

 

[심장이 지어내는 삶 / 18:21-35, 14:1-12]

2성서에 나오는 오늘의 두 본문은 용서와 용납에 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죄를 자꾸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용서의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용서의 횟수가 아니라 용서의 감각입니다. 그것이 이어지는 <왕과 종의 용서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용서의 기준이 되는 것은 왕의 행동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하늘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 종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여, 일만 달란트(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 품삯)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용서였습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받은 종은 자기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 되는 빚을 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갚을 때까지 갇혀있게 한 것입니다. 그의 괘씸한 행동은 왕에게 알려졌고, 결국 끌려가서 책망을 듣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용서의 횟수로 보자면, 왕은 두 번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용서의 가르침은 다른 데 있습니다. 왕의 입을 통해 표현된 예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하는 용서입니다. ‘진심으로’(ἀπτν καρδιν)라는 말의 문자적인 표현은 심장으로부터 우러나온’(from the heart)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용서가 진정한 용서요, 공동체를 세우는 용서입니다.

로마서 14장의 본문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공동체 안에는 서로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과 강한 사람이 있으며 (1-2), 중요성을 가늠하는 판단이나 삶을 대하는 방식도 다양합니다. (5-7) 바울은 그 각각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셨다고 말합니다. 공동체 안의 용납과 조화의 과제를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강한 믿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강한 믿음은 어떤 특별한 방식의 행위나 태도로 표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강함은 역사의 전통이나 행동의 헌신이나 성서의 지식 등에서 오지 않습니다. 용서하고 용납하는 공동체가 강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바울이 살아간 예수 운동은 작은 일에서 출발하지만, 포괄적인 해방을 향한 운동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질서를 극복하는 길이 단지 체제 모순만 없애면 열리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구조적 병폐를 마음공부로 해소할 수 있다고도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동체적 관계성을 살려갈 수 있는 생태적 감각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빗거리로 삼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일종의 생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신앙의 세계를 살리는 생태적 감수성은 단지 의리라고 하는 정서적 일치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평화의 전망이 없어서 기능주의로 시들어버린 세계가 얼마나 많습니까? 광활한 꿈을 잃은 세계는 공동의 침체를 상식이라 말하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로 여기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로 부르며 살아갑니다. (김영민, 동무론 : 인문연대의 미래형식, 198) 하지만, 생태적 신앙을 가진 믿음의 사람은 새로운 상식의 양육과 새로운 평화의 파종과 새로운 질서 구축을 향해 나갈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작은 몸짓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생명의 모험적 본성이자 사명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이 고통의 시대에 하나님의 바람은 어디서 불어올까요? 이제 인간의 역사와 사회의 수준은 문명의 진보를 물질적 풍요에서 찾지 않고, ‘소비의 절제정의의 회복에서 찾기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이 지구의 생태적 위기는 새로운 삶을 요구합니다. 큰 전환의 시대에 믿음의 지혜를 서로 모아가며,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새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평화와 사랑의 가능성을 잃은 세계는 자신을 파괴하는 절망에 이르곤 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늘과 땅을 휩쓸며 불어오는 하나님의 바람이 역사를 새롭게 지어냅니다. 가로막힌 바다 앞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밤새도록 동풍이 되어 마른 바닷길을 낸 하나님의 은총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평화를 향해 가십시오. 따뜻한 맘으로 새 삶을 짓는 행진을 이어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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