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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 김희헌 | 2020-08-30

by 김희헌 posted Aug 30, 2020 Views 19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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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8-30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3:1-15, 12:9-21, 16:21-28)

2020.08.30. 성령강림절 열네 번째 주일

 

[위기의 시대, 새로운 출발을]

성령강림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여름을 지나면서 코로나 사태가 잦아들기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상황이 위중해지면서 오늘부터 거리두기의 수준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간 한국사회가 방역에 성공을 거두면서 어려움 속에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었지만,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사회적 피로감이 쌓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 얼마 전부터 교회가 사회적 위기의 진원지가 되면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전광훈 씨와 사랑제일교회가 있는데,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상식적 시민의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가짜뉴스로 뭉친 집단의식도 기이하거니와 타인을 아랑곳하지 않는 노골적 이기주의는 인간에 대한 기본 신뢰조차 허물어뜨릴 지경입니다. 그들을 향해 쏟아지고 있는 사회의 질책은 마치 개신교 전체에 대한 사망선고처럼 느껴집니다.

지난주 월요일에는 기장총회에서 <코로나19 재확산에 즈음하여>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며 발표한 글이기에 주보의 목회마당에도 실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코로나19 감염사태는 멈추어서서 돌아보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라는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가 멈추어선 동안에도 욕망의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돌아보는 일에 게을렀습니다. 삶의 대전환을 요구하는 거대한 문명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돌이켜 사는 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결국, 복음을 전파해야 할 교회는 도리어 코로나19의 슈퍼전파자가 되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분노와 아우성 속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가 결코 세상보다 이타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합리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라는 준엄한 꾸짖음을 듣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회개로 무릎을 꿇고 참회로 엎드립니다.

극우적 정치이념과 근본주의적 믿음이 결합한 전광훈 현상은 한국교회의 민낯이었습니다. 분단체제에서 화해의 가교가 되어야 할 교회가 대결과 증오를 부추겼습니다. 극단적 혐오와 막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전광훈 현상은 이 엄중한 시기에 국가적 방역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코로나 상황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예배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집단이기주의, 거짓 우월감과 자가당착, 편견과 혐오를 전파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은 코로나19를 통해 생명의 존엄을 위협하는 개인과 집단과 문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그 심판의 대상이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이 성명은 교단 차원에서 발표하였지만, 우리 교회도 함께 책임을 느끼며 그 고백에 참여합니다. 실로, 교회의 환골탈태가 필요한 때입니다. 코로나가 닥치기 전부터 교회는 사회적 위기를 더하는 집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찰과 책임의 종교로 성숙해지기보다는 극우주의 선동정치에 물들어서, 여전히 차별과 혐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다시 교회의 자리를 분별하고, 위기 속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성서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부름 앞에서 / 출애굽기 31-15]

출애굽기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오랫동안 신앙공동체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당시 모세는 도망자 신세로 장인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40년째 양을 치는 목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미 80세가 된 그는 아마도 자신의 삶이 끝나가고, 현재는 의미 없는 일상의 연속이라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민족해방의 지도자로 부르십니다.

어느 날, 모세는 양을 몰고 광야를 지나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갔습니다. 성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산의 이름을 호렙’(horeb)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불모지’(wasteland)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낼 장소로 버려진 땅을 선택했고, 마치 버려진 듯한 존재 모세를 선택합니다.

모세는 그 산에서 이상한 장면을 봅니다. 불이 붙었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천사가 불꽃으로 나타난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습니다. 왜 연약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를 부릅니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대답합니다. “,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간략한 대답에는 지난 40년의 삶을 정리하는 모세의 결단이 엿보입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는 뜻의 히브리어 hin.ne.ni(הִנֵּֽנִי)는 창세기에 몇 번 나오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결단의 대답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hin.ne.ni /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22:1, 11), 야곱의 가족들이 가나안의 삶을 다 정리하고 이집트로 내려가며 브엘세바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야곱아하고 부릅니다. 야곱은 ‘hin.ne.ni /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46:2).

오늘 본문에서 대답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 여기서, 거룩한 땅이란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선 곳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요구한 경건은, 단지 신발을 벗는 행위가 아니라,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보냄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뒤이어지는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7~10절을 보면, 하나님의 계획은 노예 생활로 고통받는 백성을 구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요, 그것을 위해서 모세를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의 거룩함은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듣는 깊이에 담겨 있고, 그가 요구하는 경건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삶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모세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이스라엘 자손을 구해내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격려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확신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다라고 하는 분이 너를 보냈다고 해라.”

14절에 나오는 이 하나님의 이름은 해독이 어려운 성서 본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새번역>에서 나는 나다라고 번역된 원문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인데, <개역성서>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것은 <칠십인역, LXX>이라는 헬라어 역본(Ego eimi ho on)을 따른 것인데, 히브리적인 사고방식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서학자들에 따라서 14절의 내용은 세 가지로 번역됩니다. 1) 가장 일반적인 번역은 나는 곧 나다라고 하여 존재의 근원성을 강조하는 것이요, 2) 미래형으로 번역해서, ‘나는 있을 곳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하나님의 신실한 동행을 강조하기도 하며, 3) 사역형으로 번역하여, ‘나는 있을 것을 있게 하는 존재이다.’라고 하여 하나님의 창조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번역은 해석자들의 신학적 성향에 따른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이름의 비밀은 14절에 대한 문법적인 해석에 달려 있지 않고, 15절과 연계하여 읽을 때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5절은 이렇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모세가 알고자 했던 신은 이전에 몰랐던 신이 아니라, 조상들과 함께 한 신이요, 지금까지 함께 해온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길이 새로운 발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진정성의 문제라는 것을 함의한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성서 일과로 함께 읽은 시편 26편에 나오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늘 바라보면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26:2-3)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른 자신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을 들으면, 하나님의 부름 앞에서 진실한 존재로 서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종교 영성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베드로의 오해 / 마태복음 1621-28]

마태복음의 본문은 베드로가 책망받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앞에서 고백했던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하기를, 메시아는 고난을 받거나 죽어서는 안 된다고 봤습니다. 자고로 메시아라는 존재는 압제자들을 몰아내고 민족을 해방하는 영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스승을 힐난하면서 (ἐπιτιμν, rebuke), ‘그런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외칩니다.

이 이야기의 구도가 아주 특이합니다. 마태복음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는데, 오늘 본문은 그때부터’(from that time on)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후반부의 출발입니다. 후반부 주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전반부는 예수의 메시아적인 활동에 관한 것인데, 그 이야기의 절정을 이룬 대목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스승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요, ‘하늘을 푸는 열쇠가 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야기를 뒤이은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책망을 받습니다. 예수는 베드로를 향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책망하시며, 앞에서 축복한 제자를 향해 사탄이라고 꾸짖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고자 하신 말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란 수난의 제자도(discipleship of suffering)’에 관한 것입니다. 24~25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우리 교회의 벽에 걸린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ψυχὴ, soul)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16:24-25)

이것은 군중들(ochlos)에게 준 설교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한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고단한 민중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질병과 배고픔을 해결해주던 때와는 다른 주문을 제자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삶이 요청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이 수난의 제자직을 잃을 때 생겨납니다. 역사 속의 교회는 많은 위기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속의 베드로처럼 오해할 때입니다. 하지만, 어두운 마음을 씻어내는 하늘의 믿음이 다시 역사에 솟아납니다.

 

[꾸밈없는 사랑의 윤리 / 로마서 129-21]

로마서 12장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11장까지는 하나님의 은총에 긴 설명이 있었는데, 12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12장은 하나님의 은총에 잇대어 살아가는 신앙인의 새로운 삶에 관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은 이십여 개의 명령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서, 1) 진실한 사랑(9-13), 2) 선한 생각(14-16), 3) 평화로운 관계(17-21)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은 근본적으로 낙관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을 이겨내는 기술적인 사랑이 아니라, 은총의 세계에 대한 믿음에서 솟아난 지혜로운 사랑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위선적인 사람들에게 빼앗겼다고 느낄 때 사랑의 힘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의 근원이 되는 분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사랑을 권면합니다.

성도가 가져야 할 선한 생각은 먼저 고통당하는 사람을 향해 맘을 쓰는 것이요, 또한, 고통을 주는 사람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입니다. 스스로 높아지거나 교만하지 않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평화로운 관계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너무도 오랫동안, 파괴적인 갈등과 대립으로 고통당해왔습니다. 정복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는 피비린내 나는 문명에 시달렸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득을 위해서라면, 진리도 상식도 멸시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새로운 관계, 하나님의 평화를 드러내는 관계를 지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종교의 정신이 어두워질 때는, 믿음으로 사랑과 평화를 밀고 가기보다는, 욕망과 편견을 동력으로 삼아 세상을 분열시킵니다. 역사 속의 기독교 역시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성차별과 인종차별,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자신을 차별과 증오의 율법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내맡기는 믿음의 사람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중층적인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 장마와 폭염이 이어진 기후변화시대의 위기, 공동체의 평안보다는 자기 욕망과 신념에 몰두한 종교적 무지와 높아진 사회적 갈등 등이 겹쳐있습니다.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모세처럼 ,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는 대답을 하며, 새로운 삶을 지어가야겠습니다.

성령강림절을 고단하게 견뎌온 교우들과 이웃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다음 주부터 시작될 창조절에 새로운 하늘의 은총이 있기를 빕니다. 하늘뜻펴기를 마치면서, 앞에서 읽었던 기장 교단의 성명서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마음을 모으고 싶습니다.

우리는 2020년의 한국교회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땅 위에 생명을 살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이 다짐을 실행하는 기장 교단의 모든 교회와 또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리고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애쓰는 수많은 사람과 사회경제적 피해자들에게 하늘의 위로가 가득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전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일어설 사람을 부르십니다. 고통의 부르짖음이 클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고, 모세는 ,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믿음의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걷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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