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이끄는 곳 | 김희헌 | 2020-06-28

by 김희헌 posted Jun 28, 2020 Views 16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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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이끄는 곳 (22:1-14, 6:12-23, 10:40-42)

2020.06.28. 성령강림절 다섯째 주일

 

[역사의 웜홀을 지나는 시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세계적 감염이 일천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발병하여 두 달 동안 일백만 명이 되더니, 그 후 석 달 만에 일천만 명이 되었습니다. 지난 5개월 동안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처음에는 공포와 혼돈으로 속수무책의 시간을 보내다가, 나중에는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이기심의 민낯을 보기도 했고, 고난을 함께 극복하고자 하는 격려와 연대도 경험했습니다. 삶의 전 영역에서 새로운 인식과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계가 어디를 향해 갈까요?

히브리대학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새로운 실험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성공할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미 역사적인 웜홀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안희경, “코로나 이후, 과거 이루지 못한 개혁을 감행할 시간,” 경향신문, 2020.6.25)

웜홀’(wormhole)을 번역하면 벌레구멍을 의미합니다. 둥근 사과의 표면을 따라 이동하면 멀리 돌아가야 하지만, 이쪽과 저쪽을 뚫은 구멍을 통과하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웜홀은 우주의 시공간을 잇는 가상의 터널로 알려져 있습니다. 웜홀을 통과하면 머나먼 다른 은하계에도 금방 도착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역사의 웜홀이란, 미래의 시간으로 나아가는 전대미문의 사회적 실험을 벌이는 때라고 하겠습니다. 인류의 빛나는 가능성을 모두 빨아들이는 역사의 블랙홀에 빠질지, 아니면 불평등한 신자유주의 질서를 벗고 새로운 사회로 도약하는 화이트홀의 시간으로 나아갈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까지 익숙했던 일들을 중지하고, 지난날의 생활방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예전에는 꿈꾸지 못한 일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정부가 모든 시민에게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할 때, 이상주의적 순진함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는 없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쌓여가면서 모두가 자연스럽게 배우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영원할 것 같던 사회체제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상상이 필요한 때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학교 수업을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것에 익숙해지자, 새로운 방식의 교육에 대해서 고민하던 것이 깊어지면서, ‘학교가 필요한지를 묻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으로 옮겨가기도 합니다. 종교는 어떤가요? 비대면 관계와 언택트 문화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 공동체를 강조하는 신앙 세계를 어떻게 바꾸어갈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역사의 웜홀을 지나면서, 우리가 지닌 문제와 한계만이 아니라, 우리가 진실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짚어보고 있습니다.

 

[절망의 과제 앞에 선 아브라함의 믿음 / 창세기 221-14]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아브라함의 인생과 믿음에서 웜홀을 지나는 사건으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인생에 생겨난 최대의 고비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 이삭을 죽여서 바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기치 못한 이 명령으로 인해, 아브라함의 모든 삶은 위기에 처했고, 그의 믿음은 고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의 고뇌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침묵 속에 행장을 꾸리고,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으로 떠납니다. 사흘 만에 가까이 이르자, 종과 나귀는 기다리게 하고, 아들 이삭과 둘이서 산을 오릅니다. 번제에 쓸 장작은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겨서 함께 걷습니다. 정말로 아브라함은 아들을 잡아 바칠 생각이었을까요?

길을 걷던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상식적인 질문이지만 가장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이 말이 아브라함의 심정과 믿음을 제대로 표현한 것일까요? 이 질문은 잠시 접어두겠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걷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에 이릅니다. 아브라함은 제단과 장작을 쌓고, 이삭을 묶어서 그 위에 올린 다음, 손에 칼을 들고 내리치려고 했습니다. 과연 이 행동은 마음먹었던 계획의 실행이었을까요, 아니면 절망의 자포자기가 불러온 것이었을까요?

다행스럽게 그때 천사가 불러서 멈추게 하고, 아들까지 바치려고 한 그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의 눈에 수풀에 뿔이 걸린 양이 보였고, 그것으로 아들 대신에 번제를 드립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주님이 준비하셨다는 뜻으로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위기의 순간을 지나는 믿음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그동안의 해석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 교훈을 보상신학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아들까지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상을 주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신앙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 이야기가 미개한 인신제사짐승제사로 대체하는 종교의 문명화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것보다 더 깊은 주제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봐야 할 것은 절망적 과제 앞에 선 아브라함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 절망의 상황에서, 그의 믿음은 그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이해하기 힘든 두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불합리한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와 파토스입니다. 이 두 가지 예측할 수 없는 사실이 뒤엉키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영화로 본다면, 가장 극적인 장면은 이삭을 죽이려고 칼 든 손을 치켜든 9~10절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신학적인 장면은 7~8절이라고 봅니다. 7절은 길을 걷는 도중 아버지에게 묻는 이삭의 질문입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아들의 질문은 모든 아버지의 정신을 파산시키고도 남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묵묵히 대답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아브라함의 이 대답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이삭에게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아들의 맘을 잠시라도 편하게 해주려는 거짓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삭을 잡아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짜로 여겼고, 실제로는 숫양을 준비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단지 이삭을 바치는 시늉을 해본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아브라함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묘한 현실에서, 살과 피가 마르는 질문을 안고 씨름하면서, 길을 걷고 산을 오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6절과 8절에서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라고 반복되는데, 그들은 도대체 무슨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브라함에게 그 걸음은 확신에 찬 믿음의 걸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고통 이외는 의지할 것이 없는 절망적인 발걸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들을 죽여서 신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확신하기보다는, 자신의 믿음이 도대체 자신을 어디까지 끌고 가는지를 지켜보는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앞에서 아브라함은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잊어버린 신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나중에는 자신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하나님이 겨우 인신 제사나 즐기는 하급신에 불과했다는 자괴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게 욕을 퍼붓고, 맺은 약속을 취소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의 고뇌는 제단 앞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아들을 잡기 위해서 칼을 쥔 손을 치켜들 때, 도대체 무엇이 아브라함의 손을 들도록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그의 믿음금쪽같이 소중한 아들을 죽이려고 치켜든 그의 행동사이의 간격은 논리적인 설명으로는 메울 수 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을 끌고 가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게 됩니다. 그가 보여주는 신앙의 파토스, 그 파토스가 표현하는 깊이와 신비를 묻는 것입니다.

성서의 믿음을 순종과 보상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해석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현실은 순종과 보상의 사이클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서의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인간에게 상과 벌이나 주는 천상의 존재는 관념 신학이 만들어놓은 신이지, 역사의 현장으로 돌진하여 화육하는 성서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침묵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외에는 다른 기초가 없는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더욱 깊은 믿음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서, 예수가 광야의 고독 속에 발견한 것이자, 욥이 모든 고통을 견디며 추구한 것이요, 신앙공동체가 목숨을 걸고 지켜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낸 시험문제 / 로마서 612-23]

바울이 로마의 신앙공동체에 보낸 편지에는 믿음의 삶에 관한 큰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로마서 6장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지난주에 읽은 전반부는 믿음으로 얻은 의로운 삶’(justification)에 관한 가르침이요, 오늘 본문은 믿음이 이끄는 거룩한 삶’(sanctificat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본문은 거룩한 삶을 향한 권고와 명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시의 노예제도를 반영하여, ‘’(δολος, slave)이라고 하는 메타포를 사용하여 묻습니다. 죄의 종으로 살며 죽음의 길을 걸을 것인가, 의의 종으로 살며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추상적인 답은 간단하지만, 삶으로 살아가야 할 구체적인 답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공동체를 이루는 삶에서 생명과 죽음을 분별하며 살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지난주에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았습니다만, 종전선언조차 없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쟁상황은 도대체 생명의 길입니까, 죽음의 길입니까? 함석헌은 나라의 허리를 가른 ‘38의 의미를 현대문명의 낙제선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낸 시험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열강이 뭉쳐 국가적인 지혜를 발휘하여 만들어낸 것이 고작 38선이라면, 그것은 가히 현대문명의 낙제선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하나님이 낸 시험문제인데, 우리는 그 그것을 아직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함석헌은 한국전쟁을 가리켜 통일 정부를 세우지 못한 죄의 결과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다가오는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라고 말합니다. 역사의 깊이를 응시한 믿음의 눈입니다. 오늘 우리는, 전쟁의 죄악을 씻고 새 시대를 향한 진군나팔을 불며 나아가는 믿음의 길을 놓아야 하겠습니다.

 

[선교 3.0 시대 / 마태복음 1040-42]

마태복음 1040-42절은 선교에 관한 가르침의 마지막 대목으로서, 예수의 사람들이 만들어가야 할 이상적인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의인을 의인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물을 건네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진리와 생명을 향한 정직한 길에 대해서 말합니다.

얼마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신학포럼에서 한 가지 개념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선교 3.0운동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시대를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선교 방향이 바뀌면 교회의 역할도 바뀔 텐데, 우리 교회 역시 새로운 과제와 역할이 필요한 때입니다.

한동안 한국개신교회는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한국 사회에서 의미 있는 종교로 성장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사회적 의미와 필요성을 획득했기 때문에 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 시기를 가리켜 전도선교의 시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기간을 선교 1.0시대라고 불러보았습니다. 이 기간에 진보적 교회의 역할은 주로 신학운동에 있었습니다. 더 진취적인 사명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점차 권력을 탐하고, 근본주의 신학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복음의 좌표를 잃어갔습니다. 교회가 성장주의 신학에 몰두하면서 몸집을 키웠지만, 그 정신은 자라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행동의 모양만 있었지, 정신의 성숙은 없었습니다. 여력이 있는 교회는 믿음의 열정을 해외 선교에 붓기도 했지만, 그것은 교회의 내적 한계를 외부적 헌신을 통해서 해소하려는 것이었다 하겠습니다. 지난 한 세대 남짓 이어진 이 시기를 선교 2.0시대로 분류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를 살아온 진보적 교회는 보수화되어가는 한국교회가 놓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고자 사회선교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대마저 저물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교회의 동력 자체가 생산되지 않는 때를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패러다임이 변하지 않고서는 쇠락의 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분단시대의 증오와 대립을 부추기는 시대적 적폐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대부분 교단이 혐오와 차별 담론에 발목이 잡혀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옛 시대의 질서에 편승하여 목숨을 연명하는 것을 예수의 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코로나 사태라고도 하겠습니다. 예전 것은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어떻게 하든지 평화의 영성과 상상력을 길러내면서 이 위기의 시대를 이겨내야만 합니다. 함석헌이 말한 과제, ‘하나님이 낸 시험문제를 풀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반도에 예수의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가리켜, 한국교회의 선교 3.0시대라고 이름 붙여보았습니다.

이렇게 시기를 구분하게 한 것이 코로나 사태라고 봅니다. 코로나 시대에는 이전의 규칙과 질서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삶의 방식을 전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단지 행위규범으로서의 뉴노멀이 아니라, ‘체제구상으로서의 뉴노멀입니다. 신자유주의적 약탈 경제에서 벗어난 세계를 구상하고,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화해통일의 길을 걷는 뉴노멀 선교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커다란 비전을 세우면서 선교 3.0시대를 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선교는 외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내적 고백에서 비롯되는 운동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그리스도의 정신을 추구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공동체가 활력을 잃어가는 동안 교회의 얼굴은 배타와 혐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보수적인 교회만이 아니라,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진보의 목소리는 연대의 동력을 잃었습니다. 온 세계를 네트워크로 엮는 SNS의 시대에 지독한 불통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의 동력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우리 모두 고민이 깊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처럼 모리아의 산을 오르는 침묵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이끄는 곳이 어디인지를 분별하는 시간이요,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서라도 하늘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갈망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나요? 성령의 자비와 은총이 우리를 인도해주시기를 기원할 뿐입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절망의 과제 앞에서 아브라함은 믿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낸 시험문제를 안고 길을 걷고 모리아의 산을 오르며, 마침내 풀어냅니다. 그는 하나님이 마음에 담아주신 믿음이, 자신을 이끌고 갈 것을 믿었습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때, 믿음이 이끄는 곳을 보십시오.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