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이성환|2020-05-31

by 이성환 posted May 31, 2020 Views 17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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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민 11:24-30, 행 2:1-21, 요 7:37-39)

2020.05.31. 성령강림주일

 

성령강림절입니다. 붉은색으로 절기 색이 바뀐 것처럼 성령강림절은 아주 강렬한 절기를 뜻합니다. 어제는 기온이 30도 가까이 치솟았다고 하는데 어느덧 계절은 여름의 문턱에 와있습니다. 강렬한 태양이 비추면 온 생명이 일어나게 되듯이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는 이 절기에 교우 여러분들의 신앙에 역동적인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김경재 교수는 삼위일체를 태양에 빗대어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태양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나타내고, 태양에서 내리쬐는 빛을 예수, 그리고 태양에서 발산되는 열과 에너지를 성령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 덧대어 설명하자면 예수는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 사람인 것이고 성령은 하나님이 이 땅에 역사하는 에너지, 우리의 삶을 바꾸고 하나님 나라에 복무하게끔 만드는 원동력인 것이죠. 그러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는 시간으로 이시간을 준비했습니다. 

 

 

[시나이반도에서 만난 하나님의 영, 그리고 메추라기 / 민수기 11:24-30]

 

오늘 제1성서 본문인 민수기 11장은 두 가지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먼저 오늘 읽은 70인의 장로에게 내린 하나님의 영에 대한 이야기와 출애굽기에도 등장하는 만나와 메추라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필자는 이 두 이야기를 교묘하게 결부시켜놓았는데 당시 시나이반도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역경 속에서 벌어지는 고난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읽어보면 필자의 해학이 담겨 있기도 해서 독자로 하여금 피식 웃음이 나오게 하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먼저 출애굽에는 등장하지 않는 만나의 실체와 구체적인 만나 레시피가 그렇습니다. 민수기 본문을 보면 만나의 모양은 고수풀 씨와 같고 그 빛깔은 브돌라와 같다고 하는데 브돌라는 브델리움이라는 진주와 비슷한 광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생긴 만나를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어 기름에 반죽하여 과자처럼 먹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나만 먹던 사람들의 불만이 모세의 귀에 닿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백성들의 원망을 듣게 된 모세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을 이렇게도 괴롭게 하십니까? 이 모든 백성을 제가 배기라도 했습니까? 어찌하여 저더러,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마치 유모가 젖먹이를 품듯이, 그들을 품에 품고 가라고 하십니까?”면서 이 많은 사람이 먹을 고기를 어디서 구하냐고 하소연을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추라기를 배터지게 먹을 수 있게 됩니다만 민수기 11장 33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주님께서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셨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극심한 재앙으로 치셨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메추라기를 씹기도 전에 하나님의 분노가 그들에게 폭발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이 저에게는 두 번째 웃음 포인트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모세의 하소연에 대한 대안으로 70명의 장로에게 하나님의 영을 내려주십니다. 모세가 60만이 넘는 대군의 지청구를 어찌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모세의 짐을 덜어주려고 한 것이지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는 계약, 돌판에 새겨진 법궤를 모시는 장막, 지성소라고 하지요. 그곳으로 장로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장로들에게 임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러한 사건은 단 한 번에 그칩니다.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메추라기와 함께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는 이야기와 70명의 장로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 이 두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잠시 혼란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려 혼란스러운 이스라엘의 편재를 새롭게 하고 고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풍족하게 먹게 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실제로 그렇게 해주었는데 왜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씹기도 전에 극심한 재앙을 내리신 것일까? 물론 40년 광야생활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곳에 ‘기브롯 핫다아와’ 즉, ‘탐욕의 무덤’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면,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장막에 가지 않고 자신이 머물던 곳에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엘닷과 메닷을 보아 하나님의 영이 머무르는 곳이 비단 모세가 있던 장막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을 만한 사람은 그가 어디에 있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욕망 앞에서는 진노의 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기에 대한 집착은 결국 탐욕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가 됩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대목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 사도행전 2:1-21]

 

40년 광야시절 이스라엘에게 내린 하나님의 영은 예수 십자가 사건 이후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를 위해 다시금 찾아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승천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이 어떻게 예수의 복음을 이어가는지 사도행전은 그 결정적 계기를 성령강림 사건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종종 예수가 머물던 곳이 회당일 때와 누구누구의 집일 경우가 있는데 대개 회당에서는 악령이 든 사람을 고친달지 예수가 그곳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독설을 퍼붓는 등 부정적인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반면 베드로 장모의 집이나 삭개오의 집이나, 누가의 다락방과 같은 ‘집’(οίκος)에서는 유대종교에서 벗어나 새로운 그리스도교로 나아가는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예수의 행적에는 회당종교의 대안으로 새로운 교회공동체가 세워지는 과정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사건도 어느 집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회당종교가 아닌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바로 성령강림 사건인 것이죠. 교회의 시작,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과거에는 없었던 아주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세찬 바람, 불길, 혓바닥 같은 것들이 거기 모인 사람들을 휘감습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이 중동과 아시아 전역에 퍼져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묘사된 점에서 이제 복음은 회당에서 교회로, 예루살렘에서 땅끝으로 퍼져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유명한 구절이 있지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을 편집한 누가복음 기자는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성령강림 사건을 서술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베드로의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의 전파경로는 자연스럽게 안에서 밖으로 이동합니다. 베드로의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전도 여행을 통한 이방 선교로 그 영역을 넓힙니다. 

 

오늘 성령강림사건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통해 예수 복음이 이동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복선을 깔아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지만 예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을 향하게 된 것은 로마의 예루살렘에 대한 탄압 때문이었습니다. 풍선효과처럼 탄압을 피해 예루살렘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게 된 것이죠. 그러한 사실과 함께 오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도 복음의 전파라는 측면에서 고백 되는 것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맞는 해석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사람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방금 언급을 했습니다만 오늘 사도행전 본문을 보면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세계 각국에 퍼져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입니다. 바대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등에서 온 사람들이 각각 자기가 지내던 나라의 언어로 방언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볼 때 중요한 것은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듣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들이 자기 지역의 언어로 방언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언어를 통해 예수의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고 그 말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서로 소통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베드로는 그런 것이 아니고 요엘의 예언대로 이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항변합니다. “요엘 예언자가 말한 그 날에는 남녀노소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영이 내립니다. 그러한 예언이 지금 이곳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이렇게 말이죠. 그러한 베드로의 설교로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았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나누고 기도에 힘썼다고 되어있습니다. 초기교회공동체의 시작인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 요한복음 7:37-39]

 

민수기를 통해 본 성령임재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만날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그리고 그 영은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한 곳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고 준비된 자는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은 사람의 욕망을 마주하게 되면 심판의 영으로 변할 수 있다. 

 

사도행전을 통해 본 성령임재 사건의 특징은 태초에 천지를 만든 하나님의 영과 같은 바람이 사람들 가운에 임했고 그 바람이 혀처럼 갈라져 사람들로 하여금 방언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바벨탑으로 갈라졌던 언어의 장벽들이 허물어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20대 초반 벼락처럼 내리치는 성령의 사건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그는 신학의 자유와 생활신앙의 길에서 일평생을 살다 갔습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해보신 적 있습니까? 단 한 번의 체험으로 삶의 노선이 바뀌고 죽을 때까지 그 길만을 가게 된 그런 사건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슴 뛰는 뜨거운 체험과 그것을 이어갈 힘이 필요합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아직 그런 경험은 못 해봤습니다만 소위 ‘민주화 세례’라고 하지요. 대학시절 거리를 내달리며 그런 해방감을 맛보기는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경험이 성령 임재의 경험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성령을 생명이 흐르는 강물로 표현합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 우물가의 일화에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진리와 영생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을 통해 예수의 진리가,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가치가 생명의 강물처럼 흘러나온다는 증언입니다. 

 

성령을 체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뜨겁고 강렬한 만남을 통해 내 삶이 변하고 나를 통해 이 세상을 바꿔 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에너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에게 전달되고 절대로 고갈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힘은 언제나 이 세상과 이웃을 향해 역사합니다. 그리고 이곳을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곳으로 일궈 갑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의 삶이 변하고 우리 안에 놓인 소통의 장애물도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르지 않는 생명의 강물이 우리 안에 넘쳐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또한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파송사]

성령과의 뜨거운 만남을 갈망하십시오.

우리를 새롭게 하고 

우리를 유무상통하게 하며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일궈 갈 

지치지 않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