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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부활절 아침의 세 질문 | 김희헌 | 2020--4-12

by 김희헌 posted Apr 12, 2020 Views 24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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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4-12

부활절 아침의 세 질문 (31:1-6, 3:1-4, 20:1-18)

2020.04.12. 부활주일, 세월호 기억주일

 

[역병과 인류문명의 전환]

부활주일 아침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올해 부활절은 마음이 무겁습니다. 지난 사순절 동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온 세계가 고통의 시간을 보냈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탄식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올해 부활절 메시지로 용기와 희망을 선택하여, 예수의 부활에 관한 증언이 모든 의심과 불확실성에 맞설 용기를 준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질병이 세계 곳곳으로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검역을 거치고, 또 자신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격리했습니다. 사순절에 진행된 이 괴로운 상황은 오래전에 있었던 슬픈 사건과도 관련됩니다. 영어로 검역과 격리를 의미하는 ‘quarantine’이라는 말은 사순(四旬)’ , 사십을 뜻하는 이탈리아어(quarantena)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 창궐할 때, 베네치아 항구로 들어오는 여행객을 사십 일 동안 입국 금지한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올해 사순절에는 온 세계가 역병으로 고통당했지만, 이 파괴적인 시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감염된 사람이 이백만 명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으며, 세계 경제가 크게 둔화하고 있습니다. 수백만 개의 직업이 사라지고, 수억 명이 직장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이런 규모의 재앙은 대제국마저도 무너뜨렸으니, 어느 임계점에 닿으면 국가가 파산하고 체제가 붕괴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교훈을 깨닫고 삶의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사순절 동안 우리 교회는 지구 이웃과 함께 하는 40일의 묵상을 나누고, ‘탄소 금식을 실천하며 생태적 삶을 연습했습니다. 참여하면서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행동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번 코로나 사태도 생태계를 파괴한 인류의 소비 문명에 대한 자연의 역습이라고 할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거의 1세기 만에 대규모 인명피해를 낳고 있는 이번 역병은 인류의 생활양식에 대한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 올 것이라 예상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역병과 문명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류문명의 변곡점에는 대부분 역병이 있습니다. 로마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후 기독교 문명의 정점에 올랐던 6세기 중엽에 큰 역병(bubonic plague)이 돌았습니다. 교회로부터 성자 칭호를 받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시작된 역병은 그 이후에도 이백 년 동안(541~750) 수십 년 간격으로 반복하면서, 당시 유럽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3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 문명의 중심지는 점차 이슬람 종교로 대체되었고, 유럽의 정신 축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중세의 암흑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수백 년이 흐른 후에 역병(bubonic plague)이 다시 불어닥쳤습니다. 이로 인해 유럽 인구는 불과 5(1347-51) 만에 절반으로 줄었고, 세계적으로는 일억 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흑사병(Black Death)으로 알려진 이 질병으로 인구가 급감하자, 봉건제도는 더 유지되기 어려웠습니다. 농노제도가 붕괴하고, 자유를 가진 시민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역병이 만들어낸 공포와 편견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해서, 유럽 사회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마녀사냥을 벌였습니다.

15세기가 끝나갈 무렵, 유럽은 에너지를 외부로 돌려서 다른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남미 대륙을 정복하기 쉬웠던 이유 중의 하나는 유럽인들이 옮긴 천연두 바이러스로 인해 90%에 이르는 주민들이 멸절했기 때문입니다. 식민세력은 땅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양의 귀금속을 뺏어갔습니다. 자본의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으로 알려진 이 피 흘린 약탈 위에 세워진 제도가 어찌 흘러갈지는, 이미 정해졌다고 하겠습니다.

자본주의 시대의 역병은 대체로 그 발생부터가 불평등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콜레라입니다. 지역의 풍토병으로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곳에서 나타났지만, 대륙을 넘는 대유행이 생긴 것은 19세기 초(1817-23)입니다. 인도의 콜카타에서 시작된 유행성 콜레라는 아시아 전역과 아프리카로 퍼져나갔고, 그 이후 백 년 동안 7차례 대유행이 발생했습니다. 오염된 물이나 음식에서 비롯된 이 질병은 사회적 발전이 낙후된 곳이나, 극심한 부의 불평등이 있는 지역에서 생겨납니다. 자본주의 시대의 역병은 부자 나라를 피해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불어닥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특이합니다. 계층과 지역을 가리지 않습니다. 수백 년간 자본주의 세계를 주도해 온 유럽 국가부터 쓰러뜨리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만이 아니라, 귀족주의 잔재 위에 군림한 특권 계층도 가리지 않고 파괴합니다. 산업과 소비 문명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석유 생산국의 고귀한 가문도 가리지 않습니다.

특히 교훈을 주는 것은 한 세기 동안 패권 국가를 자처한 미국의 암울한 현실입니다. 불합리한 의료제도로 인해 서민들이 감당할 수 없는 치료비로 고통당하는 소식, 시민적 연대 없이 깨어진 공동체를 보여주는 총기구입 장면들, 국가적 책임을 회피하는 지도자들의 위선적 정치와 임시방편의 거짓말들, 손쉬운 해고와 급격한 실업으로 인해 음식을 얻으려 도로 위를 길게 늘어선 차량의 행렬, 자국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수조 달러를 찍어대면서 다른 나라에 실질적인 책임을 전가하는 거대국가의 비윤리적인 정책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더 보게 될까요? 미국에 주어진 세계 주도권은 어쩌면 이제 막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세기적 역병은 고통의 크기만큼 새로운 질서를 위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지금 끝을 알 수 없는 역병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전도서의 지혜입니다. ‘허물 것과 세울 것을 분별하면서 이 위기를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실책을 풀어내고 부활의 언덕을 오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총 베풀어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부활에 대한 요한복음의 묘사, 세 가지 질문]

올해 부활주일 복음서 본문은 요한복음 20장입니다.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그날이 바로 부활절 아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와 함께 한 날이 많았고 그의 가르침도 가까이 들었지만, 죽음을 뒤엎는 그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마리아가 본 것은 입구가 열린 빈 무덤이었습니다. 부활을 상상할 만도 한데, 마리아는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두 제자를 찾아가 자신의 절망을 말할 뿐입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태 너머를 보지 못하고 푸념하는 이 절망은 마리아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사는 모두의 것이고, 아니 우리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제자들이 움직인 동선을 따라가며, 어떻게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동산에서 있었던 세 장면에 주목하면서, 각각의 장면이 던지는 질문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물음은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요한복음이 말하고 있는 신앙공동체의 꿈과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뛰어갔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도착한 무덤 안에 예수는 없었고, 그를 싸맨 수건과 천만 개켜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이 보고 믿었다’(saw and believed)고 본문 8절은 말하는데, 그들이 믿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보는 것만 믿는 시대의 한계에 관한 것 같습니다. (20:29)

제자들의 이런 모습을 두고 요한복음은 9절에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요한의 공동체가 생각한 성경의 정신은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묻는 성서의 첫 번째 질문입니다. 아무리 죽음이 현재를 물들이고 있다 할지라도, 부활을 정말 믿느냐? 이 질문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성서로부터 배움을 얻는 모든 공동체에 주어집니다.

성서에서 가장 어두운 시대는 포로기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과 절망의 시대에 새로운 정신이 빚어집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서의 공동체는 힘의 신이 약속하는 기적의 신화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의 공동체는 포로기를 거치면서 이전과는 다른 믿음을 지어냅니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믿음입니다.

오늘 제2성서의 본문은 포로기의 첫 번째 예언자 예레미야의 증언입니다. 그는 망국의 운명으로 빠져드는 비극 속에서 탄식한 눈물의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11~6절에는 하나님이 주신 회복의 약속이 나옵니다.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겠다라는 하늘의 약속입니다. 그것이 성서의 믿음입니다.

그 옛날 히브리 노예들의 40년 광야 생활에서부터 먼 훗날 예수의 40일 광야시험에 이르기까지, 격리된 고통의 시기에 새로운 믿음이 태어납니다. ‘너를 다시 짓겠다’(ō·wḏ eḇ·nêḵ, I will build you again)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이 성서의 정신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왜 그랬을까요여기서 요한복음의 문제의식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묻는 두 번째 물음은 시대적 무감각에 관한 것입니다. 부활절 아침에 먼저 무덤을 찾은 이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홀로 무덤을 찾은 그녀는 신실한 제자를 대변함과 동시에, 부활을 믿지 못하는 시대의 불신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돌아간 후에 혼자 무덤에 남은 마리아는 천사들과 대화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절망을 반복합니다. 근심에 잠긴 그녀는 자기를 둘러싼 사태의 황홀한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에 대해 14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곁에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어떻게 눈앞에 서 있는 예수를 몰라볼 수 있을까요? 보고도 알지 못하는 마리아의 이 모습은 마치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온 한국교회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물질문명이 주는 현혹과 공포에 시달려온 교회는 부활의 꿈에서 멀어지면서 악독한 열매를 많이 낳았습니다.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했던 한기총에서부터, 촛불 시민혁명의 정신을 모욕하고 짓밟은 태극기 부대, 그리고 역병의 시대에 반면교사가 된 신천지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모습에는 예수가 있지 않습니다. 고난을 겪는 이웃으로 찾아온 예수를 곁에 두고도, 그가 예수인 줄 모르고 자기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그 결과 코로나 시대 이후의 기독교는 이전보다 더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비잔틴 제국의 정점에서 역병을 맞아 쓰러져간 기독교와도 같습니다. 6세기 중엽의 동로마는 칼케돈 회의(481) 이후에 일치된 교리를 바탕으로 번성한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역병이 휩쓸고 간 후 수백 년간 암흑기를 맞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떤가요? 한기총이나 신천지와는 다르다고 안심하는 교회가 있다면 차분하게 자성해볼 일입니다. 몰지각한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신앙인들은 자신에게 과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존재의 힘이 있는지 곰곰이 들여다볼 일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뿔뿔이 찢긴 채 21대 총선을 치르는 정치세력처럼, 작은 차이를 조율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안긴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볼 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아침을 맞을 수 있을까요?

 

부활절 아침을 다룬 오늘 본문이 던진 세 번째 질문함께 사는 세상을 향한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여전히 몰라보며, 다시 한번 자신의 절망을 반복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이름을 불러서 그녀의 눈을 뜨게 하시고, 부활의 증언을 할 수 있는 지혜의 말씀을 일러줍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이 발언의 신학적 의미는 매우 풍요롭다고 하겠습니다. 핵심 가르침은 연결, 관계, 공동체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그리고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연결된 너와 나, 그 관계에서 예수도 예외는 아니라는 사실, 아니 부활한 예수의 꿈이 바로 신과 인간의 간격마저도 해소한 공동체의 존재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의 서신서 본문인 골로새서 3장에서 반복되는 말은 그리스도와 함께’(σν τΧριστῷ, 1, 3, 4)라는 관계의 언어입니다. 이 본문은 더 큰 문단(2:20~3:17)의 일부입니다. 그 내용은 새로운 공동체를 짓는 삶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 삶은 용서와 사랑, 평화와 감사로 채워진 삶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부활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늘 성서는 부활의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 물음을 던집니다. 죽음의 현실에 굴하지 않고 생명을 꿈꾸는가? 부활의 사태에 주목하는가? 용서와 사랑, 평화와 감사로써 함께 사는 세상을 지어가는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이번 주에는 21대 총선과 세월호 참사 6주기가 있습니다. 혼탁한 정치 공학을 뚫고 촛불 혁명을 이끈 시민들의 지혜가 다시 한번 드러나는 선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새로운 정치로 가는 다리가 잘 놓여서, 세월호 참사의 진실도 밝혀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사회의 모순이 집약된 그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때, 우리 사회는 지난 시대의 짐을 털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는 역사의 축복이 우리 사회와 신앙공동체에 있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우리는 지금 질병과 죽음, 고통과 탄식이 가득한 암울한 현실을 지나고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죽음으로부터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믿느냐고. 예수와 함께 용서와 사랑, 평화와 감사로 삶을 지어가며, 부활의 언덕을 올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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