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르지 않는 샘물 | 김희헌 | 2020-03-15

by 김희헌 posted Mar 15, 2020 Views 30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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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르지 않는 샘물 (17:1-7, 5:1-11, 4:5-42)

2020.03.15. 사순절 셋째 주일

 

[사회적 위기 속에서 생명과 종교의 자격에 대해 묻다]

코로나19의 여파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모든 삶에 미치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이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팬데믹(pandemic) 단계에 이르렀다고 뒤늦게 발표했습니다. 이미 백이십여 개 국가에서 십오만여 명의 사람들이 병에 감염 되었지만 여전히 확산 일로에 있습니다. 경제활동의 둔화로 인해 성장의 기대는 사라졌고, 국가 간의 교류 협력의 문이 닫히는 상황에서 기존의 국제관계는 헝클어지고 있습니다.

전염사태를 한발 앞서 겪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차분하게 대처하는 것 같습니다. 정부가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통제 가능한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고,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새로운 생활방식을 통해 질병의 확산을 막고 있습니다. ‘뉴노멀’(new normal)이라고 불리는 이 새로운 생활표준은 과거의 집단주의적인 행동양식과는 반대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요구합니다. 직장인들은 재택근무를 하고, 학생들은 원격교육을 받습니다. 함께 하는 활동은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소위 클라우드 라이프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질병에 대처하는 삶의 진화는 단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에 관한 화두를 던진다고 봅니다. 그것은 생명의 자격에 관한 문제입니다. 코로나 사태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동반된 격리조처는 불가피한 측면들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불평등한 사회의 잔인함국가의 무능을 노출시키기도 했습니다.

청도 대남병원 정신병동에 폐쇄되었던 백여 명의 환자들은 모두 집단 감염되었고 다른 곳보다 일곱 배 높은 비율로 환자들이 사망했습니다. 일본 요코하마 항에 정박한 크루즈 선박은 국적(영국)과 운항회사(일본)가 다르다는 이유로 수백 명이 감염되어가는 상황에서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증상으로 죽은 여동생의 시신과 함께 집안에 고립되었던 이탈리아의 한 남자는 자신의 국가가 우리를 버렸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알렸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감내해야만 했던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그것 자체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무능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아무튼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생명에 관한 심각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위기 속에서 불거진 종교의 자격에 관한 문제입니다. 신천지라는 집단을 통해서 우리 사회는 공동체 윤리가 결여된 종교가 얼마나 해악적인지를 실감했습니다. 개신교 안에서 신천지의 문제는 이미 잘 알려졌습니다. 기성교회에 비밀리에 침투해서 교회공동체를 파괴하고, 재산 갈취와 가출 유도 등으로 가족공동체를 해체한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천지 대구교회에서 촉발된 대규모 감염사태 이후에는 교회만이 아니라 온 사회에, 신천지의 비밀스런 조직운영과 그 밀교적인 구조를 지탱하기 위해 수반된 거짓말이 알려졌습니다. 그것은 단지 종교적 부도덕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공공성을 파괴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비열함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것이 신천지라는 일부 종교 집단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현상처럼 보입니다. 신천지 현상에는 광기어린 종교집단의 비이성적 행위가 가득한데, 그 뿌리를 들쳐보면 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의 악에는 온 세계가 들러붙어있다고 하는데,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할까요.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신천지가 급성장한 배경에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모순한국 종교의 실패가 겹쳐있습니다. 그것은 파괴된 삶을 위로받을 길 없는 비극적인 사람들을 각자도생의 삶으로 흩어지게 내모는 처참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종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벌어집니다. 분열을 통해서 생존하는 정치인들, 단기적 이익에 몰두하는 먹튀 자본들, 긴 권력독점으로 인해 주권재민의 감각을 잃은 검찰들, 미래를 망친 핵발전소 마피아와 개발업자들, 진실보다 떡고물에 관심하는 기자와 학자 등, 공동체를 파괴하는 비밀스런 협잡으로 가득한 세계는 종교 너머에도 많습니다. 따라서 신천지가 보여주었던 추악한 현상은 단지 한 종교집단에 대한 분풀이로 해소해서는 안 되는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함석헌은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맡은 과제는 세 가지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첫째는 계급주의를 깨뜨리는 일이요, 둘째는 사대사상을 쓸어버리는 일이요, 셋째는 숙명론의 미신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함석헌 저작집, 30:362)

그러나 한국 교회는 부르주아적 탐닉에 몰두하며 새로운 신분제도인 경제적 계급주의에 항복했고, 분단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자기 몸을 물들여 숭미 사대주의의 거점이 되었고, 민중과 함께 역사를 지어가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서 칼빈의 예정론을 벗어나지 못한 숙명론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사회적 책임성을 잃어가며 자기도취와 기만적 확신의 늪에 빠졌을 때, 신천지라는 독버섯이 자라날 온상은 이미 마련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서민 아파트에 거주하고 콜센터에 근무하는 신천지 교인들, 그들은 경제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목마른 민중들입니다. 그런데 썩은 종교집단은 그들에게 아편이 섞인 물을 마시게 합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해갈은 없고 파괴된 육체에 갈증만 커가는 신천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성경의 가장 높은 이상을 활용하여 사람을 도구화하고, 인간성을 사냥했습니다. 모든 인간 안에 담긴 거룩한 갈망과 어진 마음씨를 일그러뜨리는 일을 서슴없이 저지른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 시스템을 뒤흔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 자체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악독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천지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일 이단이라는 말을 권력을 쥔 강자가 힘없는 약자를 핍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이단이라는 말은 도리어 명예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신천지는 자신들을 이단이라고 모욕하는 기성교회와의 차별성을 자신들의 명예로 간주합니다. 이단은 단지 어설픈 교리로 교주를 숭배하는 종교적 돈키호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신천지와 같은 세력을 이단이라고 하는 이유는, 민중들을 무지와 몽매에 빠뜨리면서, 그들의 무지를 자기세력의 확장을 위한 무기로 삼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을 도구화하는 나쁜 정치에 부역하고. 세워야 가야할 공동체를 거꾸로 해체함으로써 기득권의 지배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신의 뜻을 따른다면서 사회적 악행을 거듭하는 종교가 어디 신천지뿐이라 하겠습니까? 분단시대를 살아오는 동안 이데올로기의 종교로 존립해온 대부분의 종교가 사실 대동소이합니다. 또 신천지가 보여준 현상은 단지 종교만이 아니라, 민중의 염원을 거듭거듭 배신하는 정치와 경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돌봄과 연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폐쇄적인 공동체로 귀속되는 신천지 현상은 커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말해주는 점은 어긋난 관계의 문제라고도 하겠습니다. 종교적 활동이 사회적 요청과 불화하는 어긋남, 종교의 거룩한 꿈과 그 일그러진 실현 사이의 어긋남, 진리에 대한 갈망이 율법과 무지의 노예로 귀결되는 어긋남, 신을 향한 인간의 물음이 교주에 대한 맹종으로 수렴되는 어긋남, 이런 관계의 어긋남을 신천지라는 종교집단이 보여주는 불편한 진실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기적에 관한 므리바 사건의 교훈 / 출애굽기 171-7]

1성서의 본문 출애굽기 17장의 이야기는 목마른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가장 큰 물음은 하나님의 현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고 그들은 묻습니다.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이 이야기는 읽는 사람들을 곤란한 지점으로 끌고 갑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이동했는데, 그곳은 마실 물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므리바로 불렸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사람들의 요구가 어긋나서 다툼이 벌어진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바위에서 생수를 솟아나게 한 모세의 기적 이야기,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말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곱씹어 읽어보면 본문의 의도는 거기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본문 7절에 나오듯이, 이 이야기의 교훈은 광야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대들고 시험하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므리바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불평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아론과 모세 역시 이 므리바 사건에서 했던 행동 때문에 가고 싶어 했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32:51)

우리는 여기서 오늘날 퍼진 종교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난관에 놓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축복의 기적을 믿음의 증거로 삼는 종교가 실상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므리바 사건이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신천지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기독교 종교는 신봉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믿음이 충분하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요, 당신이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은 당신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입니다. 이 익숙한 종교적 현혹은 물론 성경의 논리는 아닙니다.

광야는 고통이 일상이 된 곳이요, 생명의 갈망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곳입니다. 여기서 출애굽 공동체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노예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약속의 사람으로서 바로 서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삶에서 기적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적은 기대될 수는 있어도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광야와 같은 위기일수록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6:33) 거기에 인간의 열쇄가 있습니다.

므리바 사건이 말하는 것은 기적은 결코 인간을 길러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므리바에서 벌어진 기적사건은 원망과 대립과 의심이 버무려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바위에서 솟아난 물을 마신 므리바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한 이들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전승한 사람들은, 무엇이 하나님이 주시는 샘물인지를 분별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양식으로 삼은 것 / 요한복음 45-42]

요한복음 본문에는 또 하나의 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마리아 지역 수가(Sychar)라는 마을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한 여인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여인은 지난주 본문의 주인공이었던 니고데모와는 대비되는 인물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사회의 핵심적인 인사였던 반면에, 이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이 경멸하는 이방인이요, 이름도 없는 아웃사이더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니고데모가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3:11), 이 여인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ego eimi, I am)을 듣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4:26, 3:14)

이 본문을 여인의 에 대한 예수의 용서로 해석하는 것은 핵심을 비켜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속의 여인은 멸시받는 사람으로 측은하게 여겨지기보다는 예수를 만나서 새로운 삶으로 도약한 인물의 전형(paradigm)으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여인이 물을 길으러 야곱의 우물로 갔습니다. 위대한 조상이 남긴 그 우물에서 자녀들과 가축들이 대대로 물을 마셔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만난 낯선 남자로부터 물을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관습대로 그녀는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관대하지 못한 여인의 매정함에 대한 묘사라기보다는 물을 긷고 있는 그 여인이 실상은 물을 달라고 해야 할 처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그녀 안에는 삶의 갈증을 해갈하고픈 갈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님과의 대화는 어긋나고 맙니다.

대화가 어긋난 이유는 그녀가 전통과 관습에 매어있었고, 다섯 명의 남편을 거쳐야 했던 그녀의 거친 삶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도록 얽어맸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은 초대의 말씀을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그리고 지금 당신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도리어 당신은 그에게 물을 청하였을 것입니다.그런데 그녀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안에서 점차 참 된 삶의 갈망이 솟아오르자, 엇갈리던 예수와의 대화는 하나가 되어가며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마침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샘물에 관해 말하자, 그녀는 그 물을 자신도 마실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대화는 이제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에 관한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도 사마리아도 아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말씀해주십니다. 눈이 떠진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 예수를 전합니다. 버려진 물동이처럼, 율법과 관습은 그녀의 삶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제자들과의 대화 역시 엇갈린 채로 진행됩니다. 양식을 가져온 제자들이 예수께 말합니다. ‘선생님, 잡수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내게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대화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하고 서로 묻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나의 양식(Ἐμν βρμά, my food)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이 말씀은 제자들이 먹어야 할 양식과 마셔야 할 물에 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기독교 종교는 예수의 물을 마시고, 예수의 양식을 먹는 종교입니다. 예수가 먹었던 양식을 먹는 것이자, 예수를 양식으로 삼아 먹는 것입니다. 그런 삶에서 그리스도 사건이 벌어집니다. 삶이 곤고한 것은 그리스도 사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사건이 없는 교회, 그리스도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역사는 기적의 물을 마셔도 목마를 뿐입니다.

그리스도 사건은 관념적인 종교놀음이 아닙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삶입니다. 그것은 어긋난 삶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으로 갈려버린 어긋남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 하면서도 자기 율법에 매인 엇갈린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목마르지 않은 샘물을 마신다는 것도 그 의미일 것입니다.

 

[어긋난 관계를 회복시키는 그리스도 사건 / 로마서 51-11]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죄란 하나님과의 어긋난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민중의 꿈이 어긋날 때, 역사는 죄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잘못된 기독교 신학은 의도적으로 하나님 사건과 민중사건을 분리시킵니다. 하나님사건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민중사건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신학이 죄에 물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병무의 사상은 기독교의 정신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사건이 민중사건이요, 인간해방 사건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광야 같은 삶에 기적을 요청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늘 로마서 본문이 말하듯이, ‘환난 속에서 희망을 낳는 사건에 참여하는 믿음입니다. (5:3-4) 예수의 공동체는 위기와 환난이 임할 때 각자도생의 늪으로 빠져드는 삶이 아니라, 생명의 가장 본질적인 것을 가장 진실하게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5장은 이신칭의에 관한 바울 신학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바울의 사상은 관계성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서는, 율법의 길과는 다른 믿음의 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새롭게 나아가는 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4번이나 반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διΧριστοῦ, through Christ)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2),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확신을 얻고 (9),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11) 고백합니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들어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은 어긋난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어긋난 삶이 빚어낸 갈증을 주님께서 씻어주시기를 바라는 시간입니다.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우리 안에 흘러와서 삶이 회복되기를 간구하는 때입니다. 사순절의 과제는 예수로부터 흘러나오는 샘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지난 삶이 모두 뒤척이는 때,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써 예배드리는 믿음의 길이 우리 삶에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도 주님의 은총과 하늘의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목마른 광야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므리바의 기적이 아니라 약속의 공동체로 서는 것이었습니다. 물을 긷는 사마리아 여인이 구했던 것은 영과 진리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이었습니다. 환난 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찾았던 이들처럼, 예수로부터 흘러나온 시원한 샘물을 마시고 삶을 새롭게 하는 사순절의 축복이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