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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어떻게 거듭나는가 | 김희헌 | 2020-03-08

by 김희헌 posted Mar 08, 2020 Views 289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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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3-08

어떻게 거듭나는가? (12:1-4b, 4:1-5, 13-17, 3:1-17)

2020.03.08. 사순절 둘째 주일

 

사순절 둘째 주일을 맞은 오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날마다 확진자 수가 수백 명 씩 증가하면서 칠천 명이 넘는 환자가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질환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 역시 정신적인 압박감과 고립감을 느끼고 있으며, 특히 대구경북 지역에 사는 분들은 일상이 거의 멈춘 채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해외로 가는 길도 막혀서 한국 사람들의 입국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나라가 백여 개에 이르고, 국내적으로도 경제적 어려움이 누적되고 있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분들이나 비정규직과 일용직으로 일하는 분들의 어려움이 매우 큰 상황입니다. 서로 도울 수 있는 사회적 지혜가 발휘되어야 할 때입니다.

위기의 시간에 감동적인 소식들도 있습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발표된 광주공동체 특별담화문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병상이 부족한 대구의 확진자들을 광주에서 치료하겠다.’는 발표였는데, 그것이 19805, 고립된 광주를 향해 베풀어준 연대의 손길에 빚을 갚는 것이라는 광주시민들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 밖에도 시민들이 서로 돕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독거노인이나 자가격리자들에 대한 지역사회의 돌봄이나, 손님이 줄어서 휴업해야 하는 음식점의 식재료를 구매해주는 운동, 임대료를 깎아주거나 안 받는 착한건물주 운동, 마스크를 구할 시간이 없는 택배 기사들에게 마스크를 나눠주는 등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증거를 여러 곳에서 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위기를 맞고 있지만, 삶을 새롭게 하고 우리 사회가 거듭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가야겠습니다. 

 

[출가 / 창세기 121-4b]

오늘 창세기 본문은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크게 보면 두 개로 나뉘는데, 1장부터 11장에는 각종 신화가 이어지고, 12장부터는 족장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신화에서 역사로 전환되는데, 그 분기점이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출가명령을 내리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따름으로써 새로운 역사가 펼쳐집니다.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류의 역사는 점차 폐색(閉塞)이 짙어져왔습니다. 에덴동산의 삶은 파괴되었고, 형제살해를 비롯한 인류의 악행이 누적되면서 결국 홍수를 통한 심판까지 있었지만, 세상은 낙관적인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인류는 결국 세속의 시대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바벨탑 신화입니다.

이런 신화들을 마치고 시작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새롭게 출현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신의 이 출가명령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종교적 삶을 생각하는 모든 마음에 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명령을 따라서 출가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역사적 종교의 출발이라고도 할 수 있고, 종교적 믿음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종교에서 새로운 길을 떠나는 것을 출가라고 하는데, 제도화된 종교 안에서 출가는 그다지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가족 중심적인 생활 문화로 인해 집을 떠나는 것 자체가 오늘날에는 비윤리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극복할 것이 이기적인 욕망이나 자기 집착이라면, 그것을 떨쳐내는 방식으로서의 출가는 여전히 중요한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출가명령과 함께 축복을 약속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2-3절에서 축복’(barak, blessing)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반복되고 있는데, 이것은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아브라함이 더 큰 축복을 얻기 위해서 집을 떠난 것이었다면, 그의 출가 동기는 왜곡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에서 축복의 약속은 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종교의 본질은 아닙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을 축복으로 여기는가에 따라 종교의 성격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나게 된 동기가 단지 큰 축복을 얻고자 하는 욕심이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확연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아브라함의 결정에는 보다 뿌리 깊은 동기와 배경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집을 떠났고, 또 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따라 길을 떠납니다.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갔고 (5), 그 다음에는 세겜으로 (6), 그 다음에는 베델 동쪽 산간지방으로 (8), 그리고 네게브와 (9)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10) 계속해서 길을 떠납니다. 그가 이렇게 길을 떠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제단을 쌓고 예배드렸습니다. (7/8)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이 쌓은 그 제단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만난 장소라고 해도 그것이 현재적 사건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뿐이라면 아브라함은 미련 없이 길을 떠납니다.

그가 새롭게 출발하는 것은 퇴색된 믿음의 자리를 회복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있는 자리가 하나님이 없는 곳이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향해 떠납니다. 그는 주님의 약속을 안고, 살던 땅과 집을 버리고 주님이 보여 주는 곳으로 떠납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행위에서 이기적인 귀속주의는 깨지고 믿음의 약속이 세워집니다. 그의 마음속에 담긴 약속, 그것이 역사를 도약하게 하는 믿음의 약속이라는 점을 명료하게 이해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약속 / 로마서 41-5, 13-17]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삶에 대해서 묻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그리고 물음에 대해서 스스로 대답하기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2-3) 바울은 여기서 아브라함의 삶을 특징을 그의 믿음에서 찾고, 더 나아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안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당시에 활동하던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율법을 지키는 행위보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삶에서 본질적인 것은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봤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3:27-28)

이것은 이신칭의’(以信稱義)로 불리는 바울의 핵심사상입니다. 바울은 이 사상을 통해서 보다 정의롭고 보다 평등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상을 협소하고 관념적으로 이해하면 많은 오해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믿음을 교리적 지식으로 간주하면서, 믿음이란 어떤 교리를 믿는 것이며, 잘 믿기지 않는 것을 믿을수록 더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념적인 태도는 차라리 믿지 못하겠다고 실토하는 무신론적인 입장보다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오해는 믿음을 행위로 환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말하는 어떤 행동들,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는 등의 종교적 행위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행위가 본질적인 것이라면, 신천지가 최고의 믿음을 가진 집단일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에서 행위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더구나 방향을 잃은 종교적 행위들은 인간의 삶을 질곡에 빠뜨립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은 어떤 교리에 대한 지식이나 행위의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공동체를 지어나갈 진정한 토대입니다.

로마서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갈라디아서를 보면,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주석을 집필한 김창락 목사님은 바울의 이신칭의사상에 담긴 사회적 의미에 집중하고, 그것을 바울의 평등선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갈라디아서 328절의 내용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요, 종도 자유인도, 남자와 여자도 차별이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평등의 선언입니다.

이렇게 말한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라고 말합니다. (3:29) 오늘 본문 로마서 413절에서 바울은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믿음의 삶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과 같은 방식으로 보증되지 않고, ‘믿음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16) ‘무슨 약속을 안고 사는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면, 그 믿음 안에 무슨 약속이 담겨있는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듭남 / 요한복음 351-17]

오늘부터 4주 동안 보게 될 복음서 본문은,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네 개의 이야기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종교적 물음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주인공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람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그 삶의 동선을 추적합니다. 오늘 본문 3장에서 그는 진리를 진지하게 묻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7장에서는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예수를 변호하는 사려 깊은 사람으로 나오고, 19장에는 죽은 예수를 위해 후한 장례를 치르려고 몰약과 향료 백 근을 들고 무덤을 찾은 인정과 의리의 사람으로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나눈 세 차례 문답을 소개합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물음을 안고 예수께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이 대화를 보면 그는 유대인이 맞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은 표적’(σημεον, sign)을 구한다고 했는데 (고전1:22), 니고데모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화두를 바꿉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표적이 아니라,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반문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교차하는 듯합니다. 하나는 인간에 대한 절망감이 묻어 있습니.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율법에 매어있을 뿐,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회의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구원의 길을 물었던 그의 간절함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습니까하는 의미의 진지한 물음입니다.

어떻게 거듭나는가?’ 하고 묻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육에 매인 삶이 아니라, 바람과 같이 자유로운 삶이라고 예수는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삶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 곳곳에서 생명의 물’(4:10, 7:37-39)보혜사 성령’(14:16/26, 15:26, 16:7)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삶은 예수사건이 일어나는 삶을 뜻합니다.

마지막 대화에서 니고데모는 묻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곧장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율법에 매인 사람들의 인식의 한계를 먼저 들여다 볼 것을 말합니다.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는데도 받아들이지 않고, 땅의 일을 말해도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의 일이란 믿음의 약속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것을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 성경구절은 본래는 활력 있는 종교정신의 핵심을 담고 있는 구절이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세계관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말씀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구분법을 적용하자면 (고전 1:22-24), 성서를 해석하는 세 가지 관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초자연주의적인 기적의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도, 그것을 믿는다는 것도, 그래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도 초자연주의적인 기적처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진 종교는 역사도피적인 종교로 시작하지만, 규모가 커지면 사회 파괴적인 종교로 변모합니다.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 씨처럼, 이런 기적의 종교는 육체적 죽음을 극복한 불사의 종교 교리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기만합니다. 그러나 신천지만이 아니라, 한국 개신교의 기본적인 신학적 토양이 대동소이하다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의 관점은 자연주의적 지식의 종교입니다. 독생자도 믿음도 영생도 인간이 살아가는 방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역사를 도피하기보다는 역사를 지배하려고 하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초자연주의적 기적 종교에 담겨 있는 역사 초월적 갈망은 손쉽게 경멸하고, 대신 현실에서 힘을 가질 수 있는 지식을 구합니다.

하지만 이것들과는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역사를 도피하지도, 역사를 지배하려 하지도 않는 종교입니다. 이 종교는 역사가 고비를 맞을 때 낮은 자리에 내려가서 위기를 돌파하는 종교로서, 구원의 역사를 그리워하고 참여하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이 종교에서는 믿음이 명사형의 교리가 아니라, 동사형의 활동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 15절과 16절에서 반복된 믿음이라는 단어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πιστεύω)이듯이, 이런 종교적 관점에서 믿음은 삶의 모호성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발휘되는 어떤 동적인 운동입니다. 그런 믿음의 운동 속에서, ‘독생자’(獨生子, the only begotten Son)가 경험되고 태어납니다. 독생자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내시는 분이자 또 구원받은 심령에 태어나는 분으로서 경험됩니다. 그리고 그분을 온 맘으로 믿고 따르는 삶에 영원한 생명(ζων αώνιον, eternal life)이 임합니다. 그것이 니고데모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삶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생겨난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니고데모처럼 묻습니다.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은 생수가 흘러나오는 삶이요 (7:38), 진리의 영이 자신을 인도하도록 내어주는 삶입니다. (14:26) 사회적 위기와 함께 지나는 사순절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을 물과 영으로 씻겨주시고, 우리 사회와 역사를 생명과 진리로써 거듭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사회적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 사회는 니고데모처럼,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과 진리의 영이 우리들의 삶과 우리 사회의 질고를 씻겨주셔서,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사순절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 ?
    지나가다 2020.07.02 16:12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물의 의미는 세례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면 어찌됩니까? 죽습니다. 즉 십자가에 자신의 옛자아가 완전히 죽는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주장, 계획, 생각은 물론 자신의 인생의 주권과 자유 자신의 물질 모두를 주님의 통치와 소유로 넘기고 그분께 의해 철저히 절제되고 조율된 자아를 갖게 되는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남(중생)은 초자연적 역사로 반드시 회심을 낳게 되고 회심은 위에 열거한 객관적인 회심의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한국교회안에 회심한 사람의 퍼센트가 얼마나 될까요? 매우 적을것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자로 예수를 환영하지만 로드(lord) 주님으로써 자신의 모든 주권과 권리 자유를 그분께 넘겨드리는것은 거부하거나 머뭇거립니다. 온전히 회심에 이르지 못한 자들에게서 나타다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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