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 김희헌 | 2020-02-23

by 김희헌 posted Feb 23, 2020 Views 23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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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24:12-18, 벧후 1:16-21, 마태 17:1-9)

2020.02.23. 주현절 일곱째 주일 (예수변모주일)

 

[위기의 시대와 생명의 길]

며칠 전 신천지 대구교회에서 시작된 코로나19 감염사태가 대규모로 증폭되면서 전국을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신천지는 폐쇄적인 방식으로 활동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감염자의 동선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교회 폐쇄를 결정한 곳이 늘고 있는데, 저희 교회는 여러 의견을 종합하여 이번 주일에는 온라인 예배와 오프라인 예배를 병행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지역사회 감염이 심각해지는 상황이 오면, 교회 활동을 더 제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위기를 맞은 때일수록 서로 이해와 협력을 높여서 공동으로 대처하고 극복하는 길을 찾아야겠습니다.

오늘은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이 날을 예수 변모주일로 지켜왔습니다. 변모주일에는 산 위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한 예수의 이야기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곧 이어서 오는 수요일은 (ash)의 수요일로서 사순절의 시작입니다. 사순절의 주제는 예수의 수난입니다. 그렇다면, 변모주일의 영광에서 사순절의 수난으로 이어지는 연결이 묘한 의미를 던져주는 듯합니다. 일반적으로 영광에서 수난으로 바뀌는 것은 몰락과 실패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깊이 있는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세상의 고통에 비추어 볼 때 이해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변모(transfiguration) 사건은 깨달음의 사건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고난의 현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변모사건에 대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초역사적인 신화의 영역으로 퇴각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실에 기초한 믿음이지, 현실을 벗어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좀 엉뚱하게 느껴지는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실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현실이 실제로는 꿈같은 가상현실이라면 어떨까요? 아마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낄 것입니다. 힘든 삶에 지친 사람들은 고통스런 현실이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것이고, 반대로 갑자기 찾아온 행운을 맛볼 때 우리는 그것이 꿈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꿈과 현실을 혼동하지 않을 만한 분별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실제 현실인지 아니면 가상현실인지 어떻게 분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볼을 꼬집어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오늘날엔 위조된 이미지들이 실재를 대체하기 때문에,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사라졌고,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Jean Baudrillard,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더 나아가 현실이 얼마든지 위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기도 합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이미지 작업이나 가짜뉴스의 범람이 그 사례입니다. 요즘은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사람들의 감정이나 그럴듯한 신념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가리켜 탈진리(post-truth)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진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만족시키는 것이 진리가 되는 세태를 일컫습니다.

이런 탈진리 시대는 명암(明暗)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만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여기는 독선적 태도에 대해서 비판을 정당하게 행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과 적대감을 쉽게 표출합니다. 겉을 보면 갈등의 시대이지만, 속을 보면 회의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이 위기의 사태가 실제 현실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해서 현실이 아니 될 수 없듯이, 우리 모두는 탈진리의 시대로 불리는 이 갈등과 회의의 현실을 이겨내고 살아가야 할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을 벗어나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깨우침을 얻는 것이요, 현실을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각자의 욕망이 신이 되어버린 시대를 극복하려면, 이웃의 부름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생명 속에서 신의 부름을 듣는 감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묻곤 합니다. 변화는 어디에서부터 가능할까? 아니, 그보다 더 먼저, 우리가 정말로 변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합니다. 일상의 삶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새로운 시작은 늘 어렵습니다. 그러나 익숙한 그 삶의 틈바구니에 거룩하고 영광스런 순간들이 스며들어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이상에 이끌려 고달픈 삶을 살아간 청년 예수의 삶에, 예언의 꿈을 대변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동행하며 광채가 일어나듯이. 사십 년의 광야생활을 앞둔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서 타오르는 불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듯이. 모든 삶에는 생명의 길을 걷도록 이끄는 거룩한 카이로스의 시간이 교차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이 증언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와 모세의 변모 사건을 통해서 성서가 말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감추어진 생명의 길에 관한 것입니다.

 

[산을 오르는 모세 / 출애굽기 2412-18]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너는 내가 있는 산으로 올라와서, 기다려라. 그러면 내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몸소 돌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너에게 주겠다.” 율법과 계명을 주시겠다는 이 약속은 난데없이 들려오는 소리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인도할 계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겠다고 생각한 마음만이 들을 수 있는 하늘의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산에 올라서 엿새 동안 머뭅니다. 일곱째 날이 되자 하나님이 다시 부르십니다. 그 광경에 대해서 출애굽기 기자는 주님의 영광이 마치 산꼭대기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이 부르심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가 40일 간을 머물면서, 마침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삶 속에 스며든 하나님의 사건을 말합니다. 여기에 나타난 영광은 모세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영광에 대한 모세의 응답이 소중합니다. 모세 자신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점점 생생하게 만들어가는 모세의 순종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네 번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르다’(alah, climb)는 동사입니다. 먼저 12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산을 오르라고 부르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 말씀대로 일어나서 산에 오릅니다 (13). 하나님을 향해 올랐기 때문에, 모세가 오른 그 산의 이름을 하나님의 산’(har hā’ĕlōhîm)이라고 부릅니다. 모세는 그 산을 오르고 또 오릅니다 (15/18).

고대 중동지역에서 산은 하늘과 땅을 잇는 곳이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곳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모세가 처음 소명을 받았던 곳도 산이었고 (3:1), 다시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오른 곳도 바로 그 산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산에서 사십 일을 머무릅니다. 사십 일이란 충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기력을 잃은 엘리야가 천사의 음식을 먹고 모세가 오른 산 호렙을 향해 걸어간 기간이 사십 일이요, 마귀의 유혹을 이겨낸 예수의 광야시험이 사십 일입니다. 그 시간은 광야생활 사십 년을 압축한 시간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모세는 그 시간을 하나님의 산에 올라, 머물렀습니다.

말하자면, 오늘 출애굽기의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 모세의 삶에 대한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산을 오르고 그 산에 머물렀습니다. 변모주일에 들려오는 성서의 첫 번째 말씀은 두 단어입니다. 올라와라, 머물러라! 하나님을 향해 오르고, 하나님의 품에 머무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언어입니다.

 

[산을 내려가는 예수 / 마태복음 171-9]

마태복음 17장 본문은 예수의 변모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의 삶을 모세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모세의 탄생이 히브리 남자 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을 뚫고 가능했듯이, 마태복음의 예수의 탄생 역시 헤롯의 유아학살 명령 속에서 진행됩니다. 또한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가르쳤듯이, 예수도 산에서 자신의 가르침 산상수훈을 펼칩니다.

예수의 변모를 다룬 이야기 역시 출애굽기 24장의 내용과 연결됩니다. 1) 모세가 산에 오른 후 엿새가 지나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듯이, 마태복음 본문도 엿새 뒤라는 시간설정으로 시작됩니다. 2) 모세가 세 명과 함께 처음 산에 올랐듯이 (24:1,9), 예수도 세 명의 제자와 함께 산에 오릅니다. 3) 산에 덮인 구름의 풍경이나, 4) 예수가 변화된 모습으로 만난 사람 가운데 모세가 있는 것도 두 본문이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사건을 원형적인 해방사건의 지도자 모세와 결부지어 이야기하려는 마태의 의도라고 봅니다.

이렇게 예수의 사건을 모세의 사건과 연결하며 이야기하던 마태가 점점 다른 포물선을 그리며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것은 올라가서 머무르라는 출애굽기의 메시지와는 달리, 마태는 두려워하지 말고, 산에서 내려가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여기서 출애굽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신앙의 좌표를 그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제안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거룩하게 변한 스승과 민족의 대표적인 두 영웅들을 위해서 초막 셋을 지어 모시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룬 마가복음은 이 장면을 묘사할 때, 겁에 질린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얼떨결에 초막 셋을 짓겠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9:6), 마태는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태는 베드로 안의 다른 심정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영광스럽게 물들인 그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하면 사라지지 않도록 남길 수 있을지에 관한 거룩한 관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베드로를 정작 두렵게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고 봤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들려온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는 말씀과 함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울렸던 말씀이었습니다. (3:17) 마태는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자기들도 져야 할 십자가와 관련된 것이었다고 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하늘의 소리를 들은 다음, 곧장 광야시험을 거쳐 하나님나라 운동을 시작했듯이, 제자들의 운명도 그러해야할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육 일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16:24). 하늘에서 울린 소리까지 들은 마당에, 이제는 그 길을 피할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가와 격려합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의 눈 앞이 일시에 환해졌습니다. 환상과 환청은 사라지고 생생한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산을 내려갈 때가 된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산 위에서 본 일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이라고 알려진 이 당부는 예수와 제자들의 사적인 담합이 아닙니다. 역사비평 신학자들(W. Wrede, R. Bultmann)은 이것을 가리켜 메시아 신앙이 정착되지 않은 초대교회에서 혼돈을 피하기 위한 복음서 기자의 문학적 장치라고 봅니다만, 저는 보다 더 직관적인 해석이 좋다고 봅니다. 그것은 하늘이 열리고 이 세상의 틈바구니에 거룩한 사건이 벌어졌다면, 그 사건은 말로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와 함께 산을 내려가서 십자가를 지는 삶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신앙의 비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본문은 신앙의 삶이 그려내는 두 개의 동선을 보여줍니다. 모세는 산을 올랐고, 예수와 제자들은 산을 내려갑니다. ‘올라가서 머무르는것과 두려워하지 않고 내려가는것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의 힘을 가진 신앙의 역동적인 두 모습일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에 대한 주목 / 베드로후서 116-21]

베드로후서는 당시 신앙공동체가 맞고 있는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는 편지입니다. 3장에서 밝히고 있는 이 편지의 기록목적은, 순수한 마음을 일깨워서, 예언자들의 말씀과 사도들을 통해 주신 계명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벧후 3:1-2)

예언과 계명이 다시 기억되어야 하는 까닭은 널리 퍼진 허무주의적인 삶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33~4절을 보면,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디 갔느냐고 조롱하면서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그런 시대를 견디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신앙공동체는 이런 시대를 어떻게 헤쳐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고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예언의 말씀은 마태복음 17장 본문에서 베드로가 들었던 그 하늘의 소리였습니다. 세례를 받는 예수와 변화산 위의 예수를 향해 하늘에서 쏟아진 이는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아들이라는 소리였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신앙공동체에게는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처럼 하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마음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이 시적인 표현은 앞에서 더 구체적인 실천지침으로 전달된 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권면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15-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성도의 우애를 더하고, 성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시대의 허무를 이겨낼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되, 마음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펼쳐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디 갔느냐는 조롱역사에 해방의 꿈은 사라졌다고 하는 허무주의는 베드로후서가 기록된 1세기 후반에도 있었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도 있습니다. 인류는 여전히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로 찢겨진 이 세상에 나부끼고 있는 조롱과 허무를 이겨내는 시험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만을 절대적으로 내세우는 강박감의 늪에 빠지고, 때로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며 배척하는 거부감의 수렁을 지나며 힘겨워하면서도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왜 멈추지 않고 우리는 여전히 걷고 있는 것일까요? 그 마음속에 하늘의 예언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하늘의 칭찬을 얻고자 하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예언과 꿈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현절을 넘어 사순절로 가는 길목에서, 마음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예언에 귀 기울이라는 말씀이 우리 모두의 삶을 인도해주시기를 빕니다. 침묵합시다.

 

[파송사]

살아있는 믿음은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산을 오르며 그 분 안에 머무는 삶이 있다면, 또한 두려워하지 않고 산을 내려가서 예수의 십자가를 지는 삶도 있습니다. 우리는 위로와 희망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마음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를 이끌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