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증언인 삶

by phobbi posted May 06, 2025 Views 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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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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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5. 06.

 

후기자유주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기독교 공동체의 실천이 그 자체의 (자증적) 변증이라고 강조했다는 점이다. 조지 린드벡은 신앙생활에서 그것을 앎(knowing that)’어떻게 하는지를 앎(knowing how)’을 구별하며, 이는 기독교 신앙의 인지적 표현과 더 수행적인차원 사이의 유사한 구별로 이어진다. 신앙의 시금석은 그것이 명제적 진리와(홀은 이른바 보편적인 종교적 경험과) 대응하는지가 아니라 제자도의 실천을 촉진하는지 여부다. “간단히 말해서 이해 가능성은 이론이 아니라 역량으로부터 나오며 신뢰성은 독립적으로 공식화된 기준에 대한 고수가 아니라 좋은 수행으로부터 나온다.”(Lindbeck, G., 1984, The Nature of Doctrine: Religion and Theology in a Postliberal Age, Philadelphia: Westminster. 131) 따라서 신학의 변증적 책무라는 관점에서 역량을 갖춘실천가 양성에 대한 린드벡의 강조는 다시 한번 우리를 말이 아니라 행동이 공론장에서 복음의 주된 신뢰성을 구성하는 영역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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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슨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변증과 덕 윤리를 연결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을 펼친다. “변증은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향해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다. 특히 이는 그런 태도로는 각 사람의 특수한 인격성을 충분히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참된 기독교 변증은 을 강조하는 윤리의 전통 안에서 묘사된 참된 기독교 도덕을 닮아야 한다. , 최선의 기독교 변증은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람과 우리가 속한 맥락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동시에 기독교 전통에 철저하게 몰두한 결과로 얻게 되는 산물이다.”(Davison, A. (ed), 2011, Imaginative Apologetics: Theology, Philosophy and the Catholic Tradition, London; SCM Press) 이는 좋은 변증에는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 살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복음으로 형성된 백성인 그 존재를 통해참된 증언을 한다. “[교회는] 우리가 삶으로 하는 주장보다 더 참된 것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Hovey, C., 2011, “Christian Ethics as Good News”, in A. Davison, (ed), Imaginative Apologetics: Theology, Philosophy and the Catholic Tradition, London; SCM Press, pp. 109-110) 따라서 공공신학의 일차적 표현은 참된 신앙이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에 대한 실천적 증명을 통해 이뤄지며, 이는 그저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에 관한 문제다. 이는 기독교 변증으로서 공공신학의 무게중심을 마찬가지로 정통(orthodoxy)보다 올바른 실천(orthopraxy)을 중시하는 해방신학의 방향으로 이동시킨다.

 

일레인 그레이엄 지음/박세혁 옮김, <종교성과 세속주의 사이>(비아토르, 2025. 05. 02.), 399-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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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한국 사회에서 기존 종교가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역시 올바른 삶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올바른 삶은 바른 앎과 바른 믿음에서만 가능하기에

분명 어느 종교이든지 자기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뢰가 요청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대한 충실한 이해,

자기 삶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증언,

세속사회와 끊임없이 대화하여 상호 변화를 촉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한국교회의 운명도 여기에 달렸다.

 

 

 

 

- 향린 목회 184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