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청소년 주일
“껴안아 주세요!”
(사 11:1-9, 엡 6:1-4, 막 9:33-37)
한문덕 목사
[희망이 있는가?]
오늘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의 주체로 설 수 있게 하고, 신앙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게 잘 전달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 교단이 정한 어린이∙청소년 주일이자 교회교육주일입니다.
어느 사회든지 희망을 얘기하려면, 기존 세대가 일궈온 역사적 성취를 이어갈 다음 세대들이 든든히 서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건물이 있고, 넉넉한 재정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찬란한 역사를 지닌 교회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어갈 다음 세대가 없다면 절망적이지만, 교육 부서가 든든히 서 있다면 언제나 희망을 지닐 수 있습니다.
올해 2월 26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도 출생 사망 통계’에 따르면 작년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0.75%입니다. 2015년 이래 계속 감소하다가 2024년 들어 조금 증가한 것이지만, OECD 평균 합계출산율인 1.51명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미칩니다. 낮은 출산율과 더불어서 한국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 하락은 교회 교육 부서의 몰락을 불러왔습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서울노회에는 개척교회를 포함하여 46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 중에 어린이부와 청소년부를 합쳐서 10명이 넘는 교회는 13개 교회밖에 되지 않고, 20개의 교회는 교육 부서가 아예 없습니다.
지금의 대형 교회들은 우리나라가 한창 발전하고 성장할 때 함께 생겨났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교회는 성장을 멈추고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는 과거와 같은 대형 교회가 생기기 어렵고, 더 이상 번영신학이나 교회 성장 일변도의 목회 방식은 우리 사회에서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탈바꿈하던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와 한국 전쟁이라는 매우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서구의 문명을 등에 업고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는 극심한 가난과 혼란 속에 있던 한국 민중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었고, 그래서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안정을 어느 정도 이룬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는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누릴 수 없습니다. 특히 사회의 발전에 따라가지도 못하고, 오히려 뒤처지는 교회는 급격하게 소멸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가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셨던 참 신앙을 제대로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신앙교육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참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주체적 신앙을]
그럼 어떻게 우리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질 높은 신앙교육을 하고, 이들이 교회와 사회의 든든한 기둥이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어린이 청소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이 청소년 교육과 관련된 강의를 할 때마다 교사들에게 들려주는 말이 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한 말이라고 알려진 것입니다.
“나에게 말해보세요. 그러면 잊어버릴 것입니다. 나에게 가르쳐주세요. 그러면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나를 참여시켜 주세요. 그러면 배울 것입니다.”(Benjamin Franklin once said "Tell me and I forget. Teach me and I remember. Involve me and I learn.")
맹자 시대 함께 활약했던 순자(荀子, 기원전 313년~기원전 238년) 또한 “듣는 것이 못 듣는 것보다는 낫고,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나으며, 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고, 아는 것보다는 행하는 것이 나으니, 배움은 결국 직접 실천하는 데에 이르러서야 그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不聞不若聞之, 聞之不若見之, 見之不若知之, 知之不若行之, 學至於行之而止矣. 『荀子』「儒效」)
어린이 청소년들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배우려면 직접 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교육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스스로 기도를 해 보고, 말씀도 읽어보고, 말씀을 읽다가 생기는 의문에 대해서 목사나 교사에게 묻고, 교회에서 하는 다양한 활동에 몸소 참여할 때 조금씩 신앙이 싹트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베소서는 자녀와 부모 관계에 대한 말씀인데, 6장 1절은 자녀들을 2인칭으로 부르며 시작합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자녀 된 여러분’이고, 개역개정판은 ‘자녀들아!’입니다. 부모 공경과 순종은 고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매우 일반적인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훈을 말하면서 “자녀 된 여러분”이라고 2인칭으로 직접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에베소서는 자녀들을 먼저 불러줌으로써 미성년자인 자녀들을 윤리적 행위의 주체로 인정하고, 어린이 청소년들도 어른들처럼 초대 교회의 확실한 구성원으로 대우합니다.
또 부모님께 무조건 순종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말함으로써 올바른 부모 공경이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따져보고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이어서 부모에게도 주는 충고가 나오는데,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과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라는 긍정 명령입니다. 우선 우리가 주목할 것은 자녀가 해야 할 일과 부모가 해야 할 일을 동등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으려면, 자녀의 의견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충분한 대화를 해야 합니다. 보통 자녀들은 자기 의사를 무시하고 부모 마음대로 할 때 화가 납니다.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할 때 훈련은 몸의 훈련이고, 훈계는 이론적 가르침인데, 이론이든 실천이든 주님의 가르침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이 말씀에 비추어 과연 우리가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주님의 뜻을 살피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스승으로 여긴다 하면서도 아이를 기를 때에는 내 생각대로 한 것은 아닌지, 또는 세상의 방식으로 아이를 대한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유토피아의 지도자]
그런데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니 자녀 양육의 태도를 넘어서서 한 단계 더 높은 이상이 펼쳐집니다. 제가 말씀의 후반부를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사람이 다스리는 세상이 어떠한지 잘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서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는 공존과 상생의 세상을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할 때만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서 진정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등장하는 모든 짐승을 이끌고 다니는 이들은 어른이 아니라 어린 아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에 어린이와 여성은 어떤 권력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사야서의 이 구절은 참으로 놀랍고 혁명적입니다. 어린이가 단순히 한 가정의 구성원 정도가 아니라 한 사회의 리더로 등장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어린이날의 유래]
내일은 어린이날입니다. 오늘날 어린이날은 너무나 상업화되어 있어서, 어린이날이 되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선물 생각을 하거나 어딘가로 놀러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러나 어린이날은 원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하나의 소년 해방 운동이었습니다. 기존의 어른들이 잘못해서 나라를 잃었으니, 이제 새로운 나라의 주역인 어린이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이지요.
어린이날 제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종교는 천도교입니다. 이 땅에서 본격적인 어린이 운동이 일어나기 30년도 전인 1889년 11월, 동학의 2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은 ‘어린아이를 때리지 말자, 이는 한울님을 치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남깁니다.
이러한 해월 선생의 뜻을 이어 삼일운동이 일어난 직후 1921년 5월 1일 천도교는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이듬해인 1922년 5월 1일에 자신들끼리 ‘어린이의 날’이라고 하여서 모임을 열고 장안을 다니며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라!”라는 전단지를 뿌립니다. 그리고 이 전단지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요청 사항이 적혀 있었습니다.
1.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 주십시오.
2.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 하시고 자주 이야기해 주십시오.
3. 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해 주십시오.
4. 어린 사람에게 수면과 운동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십시오.
5. 이발이나 목욕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6. 나쁜 구경을 시키지 마시고 동물원에 자주 보내 주십시오.
7. 장가와 시집보낼 생각 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4월 17일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 등 소년운동 단체와 조선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고 이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습니다.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에서 소파 방정환 선생과 함께 천도교소년회 지도위원이었고, 소년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세운 김기전 선생은 소년 운동의 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첫째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 대한 완전한 인격적 대우를 허하게 하라
둘째,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 대한 무상,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셋째,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이 선언문은 국제적으로 어린이 인권에 관한 제네바 선언이 나오기 한 해 전에 나온 어린이 인권 선언서였으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둘째 조항으로 만 14세 이하 아이들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5월 1일은 여러분 모두가 아시는 대로 노동절(May day)인데, 당시 어린이날은 ‘소년 메이데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소년 운동가들과 소학교 학생들까지 약 천여명이 모여서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을 하였고, 이 소년운동의 선언이 기념식장에 울려 퍼졌으며, 기념식이 끝난 후 200명의 어린이가 서울 곳곳을 돌며 집집마다 선전문 12만 장을 배포하였습니다. 즉 어린이날은 그저 노는 날이 아니라 ‘사회 변혁 운동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돌린 선전문에는 매우 다양한 글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쓴 글입니다.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내 아들놈 내 딸년하고 자기의 물건 같이 알지 말고 자기보다 한 겹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굴리려 하지 말고 반드시 어린 사람의 뜻을 존중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어린이를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하십시오. 어른을 뿌리라 하면 어린이는 싹입니다. 뿌리가 근본이라고 위에 올라앉아서 싹을 내리누르면 그 나무는 죽어 버립니다. 원칙상 뿌리가 그 싹을 위해야 그 나무(그 집 운수)는 뻗어 나갈 것입니다.
어린이를 결코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조선의 부모는 대개가 가정교육은 엄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그 자녀의 일생을 망쳐 놓습니다. 윽박지를 때마다 뻗어 나가는 어린이의 기운은 바짝바짝 줄어듭니다. 그렇게 길린 사람은 공부를 암만 하여도 크게 자라서 뛰어난 인물이 못 되고 남에게 꿀리고 뒤지는 샌님이 되고 맙니다.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 주십시오. 심심하고 기쁨 없이 자라는 것처럼 어린 사람 자라가는 사람에게 해로운 일이 또 없습니다. 항상 즐겁게 기쁘게 해주어야 그 마음과 몸이 활짝 커 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 가며 기르십시오. 칭찬을 하면 주제 넘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잘한 일에는 반드시 칭찬과 독려를 해주어야 그 어린이의 용기와 자신하는 힘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몸을 자주 주의해 보십시오. 집안의 어린이가 무엇을 즐기나, 몸과 마음이 어떻게 변해 가나, 이것을 항상 주의해 보아 주십시오. 평상시에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잘못된 뒤에 야단을 하거나 후회하는 것은 부모들의 큰 잘못입니다.
어린이에게 잡지를 자주 읽히십시오. 어린이에게는 되도록 다달이 나오는 잡지를 읽히십시오, 그래야 생각이 넓고 커짐은 물론이요 또한 부드럽고도 고상한 인격을 가지게 됩니다. 돈이나 과자를 사 주지 말고 반드시 잡지를 사 주도록 하십시오.”
어린이를 주체로 내세우는 소년운동이 매년 더욱 활성화되고, 1927년 조선소년연합회가 창립된 후 학생들의 참여를 더 많이 시키기 위해 어린이날을 5월 1일에서 5월 첫째 일요일로 변경합니다. 이렇게 날이 갈수록 소년운동이 활발해지자, 일본 제국주의는 이것이 민족저항운동으로 더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고궁을 개방하고, 놀이동산 등으로 아이들을 불러내고, 거기에 온 아이들에게 보물찾기라든가, 우량아 대회라든가 하는 것을 열어서 저항정신을 없애고, 어린이날의 의미를 왜곡시키다가 결국 1938년에는 어린이날을 아예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해방 후 1946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다시 어린이날이 부활하는데, 바로 이날이 5월 5일이었기 때문에 지금 어린이날이 5월 5일이 된 것입니다.
1975년 이후 어린이날은 법정공휴일이 되었습니다. 이날은 어린이들이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과연 오늘 우리는 어린이날을 어떻게 뜻있게 보낼 수 있을까요? “소년운동의 첫 선언”을 발표한 김기전 선생은 후에 그 선언에 대한 의미를 밝히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그 중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먼저 윤리적으로 해방하고 다시 경제적으로 해방하라. 어린이 그들은 사람의 부스러기도 파편도 아니요, 풀로 비기면 싹이요, 나무로 비기면 순인 것을 알자. 또 우리 사람은 과거의 연장물이 아니요 명일(明日)의 광명을 향하여 줄달음치는 자임을 알자. 그리고 우리가 싸여 있는 이 우주는 태고적 어느 때에 제조된 기성품도 완성품도 아니요, 이날 이 시간에도 부단히 성장하고 있는 하나의 크나큰 미성품인 것을 알자. 그런데 해마다 날마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저 새싹이 새순이 그중에서도 우리 어린이들이 이 대 우주의 나날의 성장을 표현하고 구가하고 있음을 알며 그들을 떠나서는 다시 우리에게 아무런 희망도 광명도 없음을 깨닫자, 저 풀을 보라. 나무를 보라. 그 줄기와 뿌리의 전체는 오로지 그 작고 작은 햇순 하나를 떠받치고 있지 아니한가!”
죽은 고목같이 보이는 나무에 새순 하나가 피어오르면 우리는 그 나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김기전 선생은 어린이야말로 이 우주가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자 어른의 스승]
소년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제정된 어린이날의 주요 취지는, 당시 너무나 무시되었고, 어떤 면에서 아예 생각조차 못했던 어린이 인권을 세워가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익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권력 서열을 다투고 있는 제자들 한 가운데 세우시고 그를 껴안아 주시면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그리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마가복음서 10장 14절b)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는 어른들 세계에 끼어들 수 없는 존재, 힘 없는 존재의 대표적 상징이었습니다. 어른들 사이에 아이가 끼어서 한 마디라도 하면 혼쭐이 나지요. 그나마 귀엽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어른은 꽤 괜찮은 어른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어린이를 껴안고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바로 어린이가 예수님 버금 가는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가 어린이, 청소년들의 것이고, 어린이를 예수님처럼 생각한다면,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즉 어린이의 인권을 세워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가 곧 어른의 스승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을 살피기 전에 먼저 어린이는 우선 어른들의 거울이라는 사실부터 생각해 봅시다. 말을 하기 시작하는 세 살 아이부터 성인이 되기 전의 청소년까지 모든 어린이 청소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그의 가정이 어떠한지, 우리 사회가 어떠한지, 기성세대들이 다음 세대들에게 보여준 것은 무엇이며, 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작년 4월 3일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이 발표한 ‘2023년 서울 학생 가치관 조사’를 보겠습니다. 이 조사는 2023년 10월 서울 초∙중∙고등학생 1만 2739명을 대상으로 처음 실시한 것인데, 학생들에게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몸이 건강한 것’(26.7%)이 1순위였고, 그 다음은 ‘화목한 가족’(26.6%), 셋째는 ‘돈을 많이 버는 것’(15.8%)이었습니다. 4위는 ‘꿈이나 삶의 목표를 이루는 것’(14.8%)이고, 5위는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8.2%) 순입니다.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고 불리는 10대가 건강관리가 행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코로나를 겪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들은 기존의 세대들을 보고 배우기 때문에 어린이 청소년의 삶은 곧 우리 어른들이 만든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어린이 청소년의 삶이 행복하지 못하거나, 문제가 있다면 고스란히 어른들의 잘못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쥐고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성인입니다. 어린이 청소년의 인권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이들에게 투표권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청소년들이 현실을 바꾸는 실제적인 힘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힘을 갖게 되는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가 만든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되게 하려면, 우리를 비추는 어린이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반성하며 어린이 청소년의 행복과 안전과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린이가 어른의 스승이라면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특징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무엇보다 어린아이들은 솔직합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선입견이 없고, 꿍꿍이속이 없습니다.
또 어린아이들은 무엇에 큰 집착을 보이다가도 새로운 관심이 생기면 이전 것을 과감하게 내려놓습니다. 포기가 빠른 것입니다. 미련과 아쉬움을 남기지 않습니다. 또 어린이는 과거에 묶이지 않고 다가올 미래의 약속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내일 소풍을 가는데, 오늘이 기쁘고 신나 하는 존재가 바로 어린이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갔듯이 어린이들은 다가올 미래를 꿈꾸며 오늘을 힘 있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미래의 약속을 오늘 선취하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에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과감하게 돌진합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의 이런 특성들, 솔직함, 맑고 투명한 눈, 비집착성, 미래를 선취하는 능력, 새로움을 향한 열정! 이 모두를 우리 어른은 어린 사람에게 배워야 합니다.
[향린교회 어린이 청소년]
저는 우리 교회에 유아유치부, 어린이부, 청소년부 교우들이 있는 것이 너무나 좋고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청소년의 존재는 우리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우리 어린이 청소년들의 모습이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행복하고 즐겁다면 우리는 목회를 잘하고 있고, 하나님 나라 사역이 열매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어린이 청소년들이 이 자본주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정말로 생명이 충만하고 사랑이 넘치는 자유롭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바로 어른들인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어른들이 어린이 청소년들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때로 어린이 청소년에게 배우며 그들에게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마당을 열어줄 때만이, 우리 교회는 지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날을 맞이하며 오늘 주님께서 우리 어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어린이 청소년을 힘껏 껴안아 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빕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더욱 힘을 내십시오!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이 바로 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