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하나 ㅣ 김지목 ㅣ 2024-03-17

by 김지목 posted Mar 17, 2024 Views 8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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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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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20240317 사순절5

밀알 하나"

31:31-34 51:1-12 5:5-10 12:20-33

 

사순절, 절기의 시간적 흐름에 따르면 종려주일이 되는 다음주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됩니다만, 오늘 요한복음서 본문의 시간은 예루살렘 입성 직후의 일입니다. 다음주 종려주일과 오늘, 시간이 뒤바뀌었습니다만, 요한복음서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살피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은 위협적이고도 아주 긴박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예수의 가르침은 그 초기부터 신선했습니다. “그의 말씀에는 예언자의 권위가 충만하지 않더냐?” “율법의 해석이 율법학자들과 다르지 않더냐?” 예수를 따르던 오클로스 민중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서로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당시 기성의 종교지도자 그룹은 대표적으로 두 그룹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입니다. 상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종교권력에 야심을 키워온 재야의 세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두개인입니다. 솔로몬 시대 권력을 장악했던 제사장 사독의 계보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쥐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정치적으로 전횡을 일삼았던 그룹입니다. 바리새인은 허례허식으로 자신의 빈약한 종교적 정통성을 채우기에 급급했고, 사두개인은 로마와 타협하더라도 누려왔던 권력의 마지막 몫을 챙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들에게서 나오는 율법의 해석과 신앙의 내용에는 구원의 역동성이 나타날 리 만무했고, 자신들의 종교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계적인 타율만을 강요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에 진력이 났던 오클로스 민중은 예수의 가르침에 눈을 밝게 떴고 새로운 세계를 희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그 일행이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이란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나라가 실현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종교 권력자들의 권력을 위하여 소비되는 신앙이 아니라, 오클로스 민중을 사랑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하는 신앙으로 천국을 누리는 경험이었습니다. 그 기적의 연쇄사건이 예수의 운동이었습니다.

 

천국잔치로 밝은 빛이 민중을 비추고 있을 때 어둠 또한 짙게 드리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서로 당쟁으로 견제하던 사이였으나 예수 제거를 위해서 연정하여 힘을 합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를 시험하고 덜미를 잡아서 잘 해왔던 정치적 방법으로 예수를 역사의 무대에서 지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의 계획은 번번히 실패하고 맙니다. 오클로스와 함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면서 유월절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예수와 무리들을 억누르는 계획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과, 또한 유월절을 지내려고 각기 사방에서 몰려들었던 수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가운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사건을 목격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어둠의 세력은 오늘의 요한복음서 본문 직전에 1219절에서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하면서 패배를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예루살렘의 승리의 입성이 있기까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하루하루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곳곳에서 오클로스 민중들과 천국을 경험하면서도 예수님과 일행은 항상 어둠의 세력의 암살음모에 대처해야 했습니다. 기적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종종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하셔야 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과의 논쟁 끝에 민중의 삶을 옥죄던 율법주의를 보기 좋게 혁파하여 그 통쾌함에 민중이 환호를 지를 때에도 예수님과 일행은 어둠의 저격을 피해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어둠의 세력에 의해 쫓길 대로 쫓겨서, 진퇴양란으로 몰렸을 때 예수님과 일행은 마지막 모험의 수를 놓게 됩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선택이었습니다. 집요한 어둠의 세력의 살기로 궁지에 몰려서 마지막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지였습니다. 그리고 적진이었던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바람대로 군중들의 환호와 보호를 받을 수 있을지 그 또한 미지수였던 모험이었습니다.

 

마침내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호산나"로 환호하는 군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느꼈을 이 때의 감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호산나" 그 환호는 새로운 왕의 등극을 의미하는 대관식이었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패배하고 새로운 질서의 나라가 출범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안도와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 때 그리스 사람의 한 무리가 예수님의 제자 빌립과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유월절이라는 정황 상 그들은 그리스 지방에 사는 유대인으로 봐야 합니다. 유대민족으로서 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온 사람들이었고 그들 역시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는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로마 제국주의와 부패한 종교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나라의 집권자가 될 분을 알현하고 싶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말씀으로 그들을 맞이합니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한 가지는 죽어서 열매를 맺는 밀알 이야기 뿐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사의 고비를 넘어온 제자들에게도 의아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제 명절을 지내러 이곳에 올라온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품고 있는 메시야의 희망으로 다윗의 시대를 환원할 일만 남았는데, 밀알이 죽고 썩을 일이 남았다는 예수님은 말씀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리스 사람들과 제자들의 그러한 정세 판단이 객관적으로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새로운 세상의 희망을 걸고 한번쯤 결연하게 시도할 법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마의 총독으로 예루살렘을 통치하러 내려온 빌라도가 유월절 명절에 일어날 수 있는 유대인의 민란을 대비해서 예루살렘 성 주변에 주둔시켜 둔 로마 군대와의 최후의 격전을 각오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심판하는 예수님의 방법은 밀알이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밀알이 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땅에 떨어져 죽어서 세상을 심판하는 예수님의 의지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스스로 죽음으로써 세상을 심판한다는 이 말씀은 언어도단처럼 느껴집니다. 불의 앞에 무기력한 패배를 치장하는 변명이 아닌가?

 

십자가는 주체의 논리를 초극할 때 이해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전 질서의 종말과 함께 새로운 질서의 시작을 의미하기에, 세상의 심판은 혁명을 뜻합니다. 혁명에 있어서 예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방법은 밀알이고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혁명론이라 하겠습니다. 주체의 논리에 의한 혁명은 타자를 희생시키는 일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대의를 위해 작은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은 또 다른 폭력을 양산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작은 희생에 나를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데 윤리적인 결함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폭력이 악순환하는 세상의 질서에 대해서 성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우리를 안내합니다. 미국의 신학자 월터 윙크가 저술한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예수는 자신의 백성들의 투쟁의 역사를 통해서 얻은 지혜로, 악을 그대로 반사하지 않고도 악에 대항하는 길, 흉내 내지 않고도 억압자를 반대하는 길, 파괴시키지 않고도 적을 물리치는 길을 설명해냈다.”고 말하면서, 폭력에 잠식당하지 않는 예수의 제3의 길"을 분석했습니다. “강대강"의 논리에서 벗어나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이며, 밀알을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혁명론입니다.

 

타자의 윤리로써 주체를 반성하기 시작할 때 주체는 스스로 희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됩니다. 매몰되어 있는 나의 관점을 돌이켜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볼 때 밀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돌이키는 결단 역시 사순절에 묵상할 회개의 내용입니다. 이 사순절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체의 논리를 돌이키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며,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밀알 하나" 되기를 순종하며 배우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8장에 등장합니다. 그는 빵과 포도주로 아브라함을 축복한 전설적인 인물로, 성만찬의 평화로써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를 상징하며, 히브리어로 정의의 왕'을 뜻합니다. 히브리서는 유대인을 향하여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피력하려고 멜기세덱을 소환하여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밀알 하나" 되기를 기꺼이 순종하신 분, 그 순종을 배우신 분이라는 강조점입니다.

 

오늘 사순절 다섯째주일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같이 밀알 하나" 되기를 결단할 것을 촉구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24-25) 이 말씀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나라고 하는 부족한 존재가 어떻게 예수께서 은유적으로 말씀하신 밀알 하나"의 존재로 완전히 변모될 수 있겠습니까? 주체의 논리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흔들리고 용기내지 못해서 두려움으로 문밖을 나서는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유독 무겁게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말씀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밀알 하나"를 결단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구원을 빚진 자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우리의 고백은, 나와 연결된 모든 존재에게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 임을 시인한 것입니다. 우리는 햇빛에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생태정의를 위해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생태계 관계망 안에서 빚진 존재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을 존속시키기 위해 섭취할 수밖에 없는 뭇 생명체에 진 빚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인간은 서로 빚을 지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민족의 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마음을 모아야 하는 이유는 선배열사들의 희생과 숭고한 핏값에 우리가 빚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밀알 하나"의 존재로 완전하게 변모할 수 없는 우리일지라도, 어떤 사건의 어느 때에 한 순간에라도 밀알 하나"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밀알 하나" 되기를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한 카이로스의 때에 밀알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 역시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밀알 하나"로 되어야 할 때를 기다리고 또 카이로스의 그 때에 머뭇거림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사순절기에 귀한 결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향린 공동체, 밀알의 교회가 되기를. 우리 서로를 향하여 그리고 여기 이 지역에 향기나는 밀알이 되고, 우리 사회와 민족 그리고 세계에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밀알로 심기우는 향린 공동체가 되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늘뜻펴기 마무리하며 지난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향린의 밀알로 살아오셨던 고 한익성 장로님이 떠오릅니다. 장로님을 떠나 보내드리는 부활증언예배에서 김창희 장로님이 올리신 추모기도의 일부분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 향린 교우들은 한평생 이 세상의 수고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헌신과 봉사로 일관한 고 한익성 장로의 일생을 기억합니다. 1950년대 후반 남산 시절에 한신대 신학생으로 대학생부에 출석한 이래 남창동과 명동 시절을 거치며 주일학교 전담교사, 기획위원, 선교부장, 교육부장, 관리부장, 재정부장 등 거의 모든 부서의 실무를 돌아가며 맡아 수고했던 향린 선교의 일꾼이요 살림살이의 책임자였습니다. 1989년 장로로 임직한 뒤에는 홍근수 목사의 국가보안법 구속 등으로 향린이 세파에 흔들리던 시절 이 공동체를 굳건히 세우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향린교회는 한 장로의 피땀 위에 서 있으며, 그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믿습니다.”

 

한익성 장로님은 우리에게 밀알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공동체를 위하여 밀알 하나로 헌신하셨던 한 장로님의 희생 위에 우리가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 한 장로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밀알 하나되기를 가슴에 품고 결단하시는 여러분 위에 성령께서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밀알 하나가 되기를 마음에 품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에 이르자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하고 순종하셨습니다.

밀알 하나로 순종할 카이로스의 때,

새 언약을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주실 그때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크신 은총을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