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밥이 없어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ㅣ 김희헌 ㅣ 2022-07-17

by 김지목 posted Jul 17, 2022 Views 21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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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밥이 없어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8:1~12, 1:15~28, 10:38~42)

2022.07.17 성령강림절 여섯째 주일

 

[신앙의 길, 낮은 곳으로!]

어제는 서울 시청에서 <퀴어퍼레이드>가 열렸지요. 벌써 스물세 번째라고 하는데,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퀴어 문화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런 축제를 통해서, 감추어졌던 성 소수자의 존재가 드러나고, 그들의 자긍심에 기반을 둔 문화를 함께 누리면서, 인류의 보편적 인권을 자연스럽게 배워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낯선 문화는 익숙했던 자기 세계를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세계를 자기 확장의 기회로 삼고 여행하면, 그것은 삶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은 성 소수자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것을 마치 성서의 명령처럼 주장하는데, 그것은 편협한 시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 문제를 올바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관념적인 논쟁에 빠지기보다는 목회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동성애가 옳냐 그르냐하는 관념 논쟁보다, ‘함께 신앙을 고백하는 성 소수자와 안전한 신앙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일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성서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성서는 존재를 부정당하는 사회적 약자들, 자신을 숨기고 감추어야만 했던 소수자들을 옹호합니다. 그들이 제1성서에 나오는 암 하아레츠’(עם הארץ, Am ha’aretz), 땅의 사람들이요, 복음서에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 오클로스’(οχλος)입니다. 이들은 가난하고 소박한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미개하고 무지한사람들로 취급되며 사회의 밑바닥에서 짓밟혔습니다.

하지만, 성서 속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눈으로 성서를 읽어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으로 세계를 지어가야 한다는 것이 스승들의 가르침입니다.

함석헌 선생이 419혁명을 경험한 때가 회갑이었는데, 그때 사신 말씀은, ‘역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타락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직접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무지한 민중이 나라를 이끌어간다. 깃발을 메는 것은 민중이요, 지도자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민중은 깃발을 메고 나아갈 뿐이요, 바라고 가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지 않은가? 그 시대에는 늘 타락이라 하고, 시대가 지나가면 역사가는 진보라 하고. / 민중은 사회의 바닥이다. 바닥이므로 타락이요 고상이요 따로 있을 여지가 없다. 타락인 줄 알지도 못하는 것이 민중이다. 또 타락이라 해도 좋다. 역사는 발전하기 위해 타락한다. 가지 끝의 아름다운 열매가 새 숲이 되려면 떨어져야지, 타락해야지.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탄생한다.” (“새 나라 꿈틀거림” 1961, 3:66-8)

안병무 선생이 22년생이시니 회갑을 맞은 82년에 낸 책이 진실 때문에라는 수상록입니다. 그 책 서문에서 자신이 20대에 만난 스승 한 분을 소개합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미루어보건대 함석헌의 스승이었던 유영모 선생입니다. 안병무는 그를 가리켜, ‘뽕나무를 먹는 누에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기 주변에서 되어가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하나 의미를 깊이 생각하여 우리말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스승을 마음에 모시고 있었으니, 안병무도 삶을 진지하게 대했고, 그 여정 중에 민중을 만났습니다. 그의 삶 초반에는 하나님 앞에 선 젊은 영혼의 <실존>적인 몸부림을, 그다음에는 역사 속에 <현존>하는 예수를 찾아 나선 탐색을, 그다음에는 민중사건 속에 예수 <사건>이 있다는 증언을, 마지막에는 그 <생명> 운동이 드넓게 퍼져가야 한다는 영원한 메아리를 남겼습니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 신앙에 진지한 분들이었는데, 그들의 믿음은 낮은 곳을 향해 있습니다. 그들이 낮은 곳을 향해 간 것은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길은 낮을 곳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예언 정신의 요체 / 아모스서 81~12]

농부 출신이었던 아모스가 예언자로서 활동한 점이나, 성서가 그의 활동을 가장 명료한 예언의 목소리로 여기며 첫 번째 문서 예언자로 삼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아모스가 활동하던 기원전 8세기 중엽은, 나라가 분열된 이후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마지막 전성기를 보내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아모스 눈에 비친 북 왕국의 안정과 풍요는 실상 정의롭지 못한 질서 위에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서 8장은 네 번째 환상입니다. 농부 예언자 아모스가 본 환상은 여름 과일 한 광주리였습니다. 그 탐스러운 모습은, 하지만 이스라엘의 파국을 알리는 징조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여름 과일을 카이츠’(qayits)라고 하고, 파국은 케츠’(qets)라고 하는데, 아모스의 눈에 보이는 카이츠가 실제로는 케츠라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현실의 풍요 뒤에 감추어진 파국을 알리는 예언입니다.

농부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풍요 뒤에 있는 욕망과 구조악을 늘 경험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비친 이스라엘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약탈 문화에 젖어 있었습니다. 본문 4절과 6절을 보면,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사람을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헐값에 가난한 사람들을 사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사람들을 사자고 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만일 야훼의 날이 온다면 그날은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날이 오면, 궁궐에서 부르는 노래가 통곡으로 바뀔 것이다. 수많은 시체가 온 땅에 널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3)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이렇게 사회가 파국을 맞고, 그 약탈 체제가 붕괴하는 날이 구원의 날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합니다.

이런 아모스의 예언은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를 맞은 우리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 세계는 위기 경험을 하면서도 여전히 더 큰 욕망과 더 높은 성장을 추구하고 있는데, 우리가 사는 지구별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여 더욱 큰 재앙으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소비 문명의 파국이 오히려 지구별 생명체의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은 오래전 아모스가 외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배고파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이 예언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본정신입니다. 그 옛날 광야를 지나던 출애굽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던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훗날 신명기서는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만나를 먹이셨는데, 그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3)

우리는 배고파하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요, 우리가 목말라하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아모스의 이 예언은 묵직한 화두가 되어 남습니다.

 

[마리아의 선택 / 누가복음 1038~42]

누가복음서 본문은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언니 마르다는 다른 사람들을 잘 돌보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모시고 대접(diakonia)하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동생 마리아는 일하지 않고 예수의 곁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분주한 언니 눈에 일하지 않는 동생이 괘씸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불평합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동생 마리아의 편을 들면서, 마르다를 타이릅니다.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들떠 있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많지 않다(ὀλίγος, little). 마리아는 좋은 것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마르다의 성실한 행동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삶에서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입니다. 마리아는 좋은 것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아모스의 말처럼, 밥과 물이 없어서 생긴 허기와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의 문제에 주목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무엇을 잡으려고 하는가, 무엇 때문에 번민하는가? 하고 묻습니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늘 불안한 일입니다. 그것이 보화를 쌓기 위해 더 큰 창고를 지어가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성서는 그런 삶을 어리석은 삶이라 하지만, 인류는 대체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오래된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욕망이 이끄는 삶을 살 것인가, 믿음이 이끄는 삶을 살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안병무 선생님보다 한 살이 많으셨던 문동환 선생님은 안병무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신학을 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안병무와 서남동인데, 그들의 민중신학을 기반으로 교육이론을 세우려 했을 때에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다는 것입니다. 안병무는 민중사건을 주시하면서 거기에서 신학적 의미를 찾아내는 데 전념했지만, 그와 같은 사건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생성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그것이 교육학자였던 문동환의 고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민중들이 역사의 사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성숙해가는 과정을 밝히는 것이 자신의 과제였다는 것입니다. (갈릴래아의 예수와 안병무, 33-34)

그것은 단순히 의식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억압받는 현실을 자각한다 하여, 단숨에 진보 정신으로 도약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배체제를 비난한다 하여 한 번에 진보로 등극하는 것도 아닙니다. 삶에는 더 깊은 차원의 성찰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의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파편적인 열정에 휩쓸리게 됩니다. 자신에 갇히지 않기 위해 생각의 폭을 넓혀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미 / 골로새서 115~28]

골로새서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먼저 그리스도 찬가로 알려진 신학적 진술이 나오고, 이 진술에 기초하여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과 고백이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찬가로 알려진 15~20절은 어떤 사실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사색 끝에 도달한 신학적인 진술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갈릴리에 살았던 한 사나이에게 붙여진 칭호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우주론적 상징입니다. 16~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이렇게 우주적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우리가 사는 세계는 생로병사의 고통만이 교차하는 불안과 허무의 공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넓은 품 안에서 충만한 평화를 누리는 터전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주론으로 확장된 믿음에 기초하여 교회와 신앙인의 삶이 새롭게 모색됩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사는 삶이 아니라, 그분과 화해를 이루고 새로운 존재가 되어 사는 삶입니다. 그렇게 새롭게 지어진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란 하나님의 뜻을 향해 배고프고 목말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맘에 모시고, 그분 안에서 새롭게 지어지는 삶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질곡에 빠진 모든 생명의 고통과 희망에 연결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생명의 고통에 민감하시고, 그 고통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을 하나님과 화해하고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분을 향한 삶을 살아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현재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진통이라면 기쁘게 여깁니다. 기약 없는 삶을 셈하면서 좌절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위해서 자기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 삶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하나 얻기 위해 얍복강의 씨름을 한 야곱과 같습니다. 따라서 브니엘의 아침 햇살이 비치기 전까지 외로운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믿음을 위로해 줄 것은 하늘의 진실밖에 없지만, 하늘의 진실이란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 길들지 않으니, 이 역사의 불행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하늘의 진실이 현실에 이를 것으로 믿는 순진한 사람들은 자기 믿음보다 더 큰 슬픔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길을 낮은 곳으로 잡고 걸어가는 사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목말라 사모하는 사람, 그들을 위로할 시인은 우리 역사에 늘 나타납니다. 그 시 한 편을 읽으며 말씀을 마칩니다.

눈을 결코 지평선 아래로 떨어뜨리지 마라.

내다봐라. 내다봐라.

까만 수평선 너머를 한없이 내다봐라.

눈이 시릴 때까지,

시다 못해 눈물이 괼 때까지,

눈물이 괴다 못해 눈이 감길 때까지

내다봐!

그럼 별이 뵐 거다.

장차 시대를 말해주는 별이 보일 거다.

그럼 앞만이 아니고 위다.

하늘이다.

네 길이 하늘에 있다.

 

잠시 침묵합시다.

 

[파송사]

 

풍요의 시대 이면에서 파국의 그림자를 본 예언자 아모스는 외칩니다. 너희들의 배고픔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너희들의 목마름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맞은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의 시대는 새로운 삶을 요청합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그분의 남은 고난을 삶의 기쁨으로 채우며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