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시간 | 김희헌 | 2021-01-24

by 김희헌 posted Jan 24, 2021 Views 21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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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시간 (3:1-5,10, 고후 7:29-31, 1:14-20)

2021.01.24. 주현절 셋째 주일

 

[수레를 움직이는 두 개의 바퀴]

지난 수요일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습니다. 이번 마흔여섯 번째 대통령이 취임하기까지 미국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 일련의 사태는 세계 시민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동안, 미국식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정치의 표준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것의 한계와 위험을 고스란히 보게 되었습니다.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몽니 부리는 전임자의 모습이나, 불평등한 사회 현실에서 극우주의 선동정치에 의해 쉽게 촉발되는 갈등들,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 수만 명의 군중이 연방의회에 난입하여 최루가스와 총격이 가해지고 몇 명이 죽고 나서야 진정된 폭동, 축제가 되어야 했을 대통령 취임식이 마치 계엄령처럼 25천 명의 군인이 모든 거리를 통제한 상황에서 치러진 일 등, 이게 정말 미국에서 벌어진 일인가 하고 놀라게 됩니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 미국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미국이 이제 매우 위험하고 불안정한 구조를 가진 취약한 나라가 되었다는 반성입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은 깡패국가요 민폐 국가였지요. 자국의 위험을 약소국에 떠넘기기 위해 상습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많은 나라를 모함하고 공작하고 파괴해온 그간의 죄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4년 전에 트럼프의 당선이 도리어 세계에 희망이 될 것이라고 본 한 신학자의 판단은 선구적인 안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세계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경찰국가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짓이요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리는데 트럼프가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이미 내다본 것입니다. (B. , “트럼프의 당선이 세계에 희망적인 이유,” (2017226일 강연), [지구를 구하는 열 가지 생각])

지난 몇 달 동안 미국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지, 또 얼마나 쉽게 퇴행적 폭력으로 반전될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의 것을 빼앗아서 유지된 풍요 안에는 거대한 갈등이 잠복하고 있음을 보았고, 아울러 사회적 갈등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지도 보았습니다. 아무튼, 미국식 민주주의의 허상이 깨진 일은 과거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도, 미래를 향한 평화의 구상에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변화 못지않게, 우리 교회도 큰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창립 70주년을 바라보고 예배당 이전을 준비하면서, 단지 장소의 이동만이 아니라 선교 방향을 재정립하기 위해서 고심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안팎으로 쉽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큰 갈등을 거치면서 취약해진 여건을 안고 있고, 밖으로는 코로나 사태라는 거대한 고통의 시간에 마치 우리 사회의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듯한 개신교의 운명을 안고 우리는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가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우리 교회에서 이 일을 담당하고 있는 기구는 지난 8월 당회의 결의로 발족한 미래선교연구위원회입니다. 먼저, 이 기구가 당회의 결의에 따라발족했다는 점을 말씀드린 이유는, 이 위원회가 특정 그룹의 요구 때문에 마지못해 구성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장기적 과제에 대한 고심 끝에 당회가 제안한 기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 안에는 두 가지 방식의 미래구상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현실을 돌보는 일에 먼저 집중하고, 그 치유된 힘으로 미래로 나아가자는 생각이요,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현실의 질곡을 넘어가는 동력을 구성하자는 생각입니다. 둘 다 옳고, 둘 다 교회를 향한 충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둘이 서로 분리되거나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우리 신앙공동체를 수레로 비유하면, 그것은 마치 같은 수레를 굴리는 두 개의 바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는 돌봄의 바퀴, 다른 하나는 비전의 바퀴입니다. 이 두 바퀴는 함께 굴러가야지 자기 역할을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가 먼저 굴러가 버리면, 수레는 움직이지 못하고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점은 굳이 애써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슬픈 현실은, 최근 우리 교회 안에서 사회선교라는 말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고, 한 번쯤 걸러서 듣는 심리적 딸꾹질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를 신앙의 거처로 삼고 출석하는 교우들 가운데, ‘사회선교의 본질적 중요성을 모르는 분들은 없다고 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듯이, ‘하나님 나라 운동은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복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갈등의 시기를 지나오면서, ‘사회선교라는 이름의 담론이 우리 공동체를 통합하는 언어가 되지 못한 불행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말을 들으면 그만 딸꾹질을 하는 분위기가 생긴 것입니다. 비극입니다. 이 질곡을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묘기를 부리기 위해서는 한 개의 바퀴로도 가능하지만, 수레를 끌기 위해서는 두 개의 바퀴가 모두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수레를 잘 끌고 가기 위해서는 그 방향방식을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광화문 시대를 대비한 선교과제를 정립하고자 하는 그 방향이 옳다면, 서로 협력하고 지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그 진행 방식에서, 소통의 부족은 없는지 세심히 살피고, 선교과제의 정립 과정이 옥상옥(屋上屋)’의 활동이 되지 않고, 교회의 각 기관을 더욱 튼튼히 세우는 계기가 되도록 진행하는 방식이 모색돼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교회의 활동에 여러 제약이 있습니다. 특히, 비대면 상황에서 소통의 어려움이 큽니다. 이럴 때일수록, UN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논의과정에서 사용하는 방식을 도입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해 11<한국생태문명회의>에서, 미국 측 참가자 한 분이 세 개의 빈 의자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자신이 속한 UN의 정책 수립과정에서는 세 개의 빈 의자를 놓는데, 그것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가상의 의자입니다. (카렌나 고어, “지구윤리를 위한 세 개의 의자,” 다른백년2021114일 기사)

첫 번째 빈 의자는 사회적 약자들의 것입니다. 이 의자는 우리 교회의 논의과정에는 대체로 놓여있습니다. 두 번째 빈 의자는 지구에 사는 인간 이외의 생명체를 위한 것입니다. 이 의자는 앞으로 생태적 전환을 위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빈 의자는 미래세대를 위한 지정석입니다. 우리 교회의 논의과정에 이 의자가 늘 놓여있기를 바랍니다. 다행히, 그 가능성을 <미래선교연구위원회>의 활동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지금 미래를 지어가는 시간을 맞고 있습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향한 모든 집단이 그러할 것입니다.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것이 큰 과제입니다.

성서는 시간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연대기처럼 이어지는 일상의 시간인 크로노스(χρόνος), 다른 하나는 메시아적 구원의 시간인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어떤 시간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신의 시간을 크로노스로 살면 현실에 지배된 숙명론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카이로스의 시간만을 탐하면 관념적인 삶으로 흐릅니다. 성서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라고 말합니다. 일상을 살되 구원을 심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오늘 성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카이로스의 때를 사는 믿음의 삶 / 고린도전서 729-31]

고린도전서 7장은 혼인과 관련된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철학자는 바로 여기서 바울의 핵심사상을 발견합니다. 조르조 아감벤이라는 이탈리아 철학자는 본문 29절에 착안해서 카이로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냅니다.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인 남겨진 시간도 그의 책 제목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앞으로의 시간은 남겨진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시간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2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사십시오).” 오해하기 쉬운 표현입니다. 마치 위선적인 삶을 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중요한 점은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헬라어(음역)‘ho kairos synestalmenos.’ 직역하면, ‘카이로스가 가까웠다.’(the time is short, NIV)는 말입니다. 그다음에 이제부터는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앞으로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기 위해서는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 삶을 다섯 가지로 열거하면서, ‘마치 무엇무엇이 없는 것처럼’ (as if not~) 살라고 말합니다.

마치 없는 것처럼 사는 삶, 그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위선의 윤리도 위악(僞惡)의 윤리도 아닙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기 위해서는 크로노스의 삶과는 다른 관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크로노스의 시간에 가졌던 정체성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에 우는 사람은 슬픔이 그를 지배했고, 무엇을 가진 사람은 그 소유가 그의 정체성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에는 그것이 자기 정체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31절에서,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형체’(σχμα, scheme)라는 말은 세상이 짜놓은 구도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구도는 인종을 차별하고, 신분을 차별하고, 성차별을 제도화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세상의 구도는 사라진다고 봤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해방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삶을 꿈꾼 것입니다. (3:28)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이 아닌 것처럼 살며 이방인과 격의 없는 공동체를 이루고, 자유인이지만 자유인이 아닌 것처럼 살며 종의 자리에서 형제자매가 되는 삶, 이렇게 마치 아닌 것처럼사는 삶에서 율법의 지배는 사라지고 그리스도가 이끄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20)

 

[두 이야기 / 요나서 31-5,10; 마가복음 114-20]

요나서는 내부적인 배타성을 꾸짖는 교훈서입니다. 예언자 자신이 편견에 사로잡힌 반면교사로 등장하면서 그릇된 선민의식에 대한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이야기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당시의 대제국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그 도시의 죄를 꾸짖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일을 하기 싫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면 육로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그는 배를 타고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하나님을 요나를 풍랑이 이는 바다에 빠뜨렸다가, 물고기에 태워서 제자리로 돌려놓으셨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니느웨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둘러보는 데만 사흘이 걸리는 그 큰 도시에서, 요나는 고작 하룻길을 걸으며 외칩니다. 생색만 낸 것입니다. 그가 마지 못해 외친 단어는 겨우 네 단어입니다. (아르바임 요옴 워니느웨 네흐파켓)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방인의 선포를 듣고, 놀랍게도 그 도시의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여 모두가 금식을 선포하고 삶을 회개합니다. 예상치 못한 반전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옹졸한 예언자의 속이 뒤집힌 이야기입니다. 요나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요나서는 그렇게 빗나간 예언자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환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어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자신에게 갇히지 않고, 다가오는 시간을 구원의 때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서 본문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예수의 복음선포로 시작합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본문과 유사한 구도를 하고 있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본다면, 여전히 로마의 압제 아래 고통으로 이어지는 날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가득 찼다고 외칩니다. 이제부터 살아가야 할 남겨진 시간은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 삶은 회개로 열립니다. 회개한 삶이란 율법이 지배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로마의 율법을 마치 없는 것처럼살며, 복음이 이기도록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초대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하는 예수의 초대에 네 명의 제자들은 즉시 응합니다. 예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순종은 복음의 원초적인 힘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원적인 갈망을 보여줍니다.

요나의 이야기가 반전의 지혜를 주는 것이라면, 예수의 초대에 응한 제자들의 이야기는 카이로스의 삶으로 뛰어든 이들의 즉자적인 모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두 이야기의 모습은 다르지만 가르침은 같습니다. 남겨진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이 있다는 것은 기회입니다. 그 시간을 구원의 때로 살아가는 것은 축복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얽어맸던 지나간 시대의 낡은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해의 은총을 새롭게 맞으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바울이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구원의 시간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이 세상의 율법이 지배하지 않도록 살아가십시오.’ 지나간 시간의 고통은 흔적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남겨진 시간은 늘 구원의 시간입니다. 남겨진 시간을 그리스도의 부름이 이끄는 삶으로 살아갑시다. 율법의 무게를 벗고, 은총이 이끄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