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드러낸 신비 | 김희헌 | 2020-12-20

by 김희헌 posted Dec 20, 2020 Views 17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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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드러낸 신비 (삼하 7:1-11/16, 16:25-27, 1:26-38)

2020.12.20. 대림절 넷째 주일

 

[삶의 신비, 성탄의 신비]

대림절 넷째 주일, 성탄을 앞둔 우리 사회는 어려운 고비를 지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며칠째 천 명을 넘고, 병상은 포화상태가 되어 치료받지 못한 환자가 생기고 있습니다. 이번 3차 대유행은 매우 힘든 상황이 될 것이라는 전망에 맘이 무겁습니다. 모두가 협력하여 위기상황을 이겨내길 빌 뿐입니다.

지난 한 해는 코로나 사태가 모든 삶을 잠식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면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삶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맞은 이 고통과 슬픔에서 우리는 다행히 배움을 얻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는 신비로운 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는 성탄도 신비롭습니다. 과학적인 설명을 할 수 없어서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대를 깨뜨리며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낮은 곳으로 오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낮은 곳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진리를 맛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면서, 자신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계시된 신비’(아포칼립스 미스테리움)라고 말합니다. 진실로 신비로운 것은 감춰진 비밀이어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것이 대림절의 믿음을 풀어갈 실마리입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성탄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이 묵상은 우주를 여행하여 지구에 아기로 태어난 전지전능한 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와 오늘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낼 독생자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외아들’(monogenēs, only-begotten)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을 향한 삶에 관한 묵상이기도 합니다.

삶에는 신비로운 순간이 교차합니다. 그런데, 삶의 신비는 말끔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문학은 주로 두 가지 표현방식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이러니(irony)와 역설(paradox)입니다. 아이러니는 논리적인 설명과는 다른 현실의 모순을 보여주며 가치의 반전을 꾀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역설은 모순되는 진술을 활용하여 피상적인 논리에 담기지 않는 깊은 진실을 표현합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축복과 위기사이에서 살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무엘기하 7장에 나오는 다윗의 모습은 삶의 절정에서 맛본 축복이 도리어 위기로 변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면, 누가복음 1장의 마리아는 위기 속에서 자라나는 믿음의 축복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아이러니, 왕조 신학에 깃든 비극 / 사무엘하서 71~11, 16]

먼저 다윗에 관한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다윗의 모습은 이중적입니다. 그는 신실한 신앙의 모범이면서, 동시에 승리주의 신학의 우상입니다. 이런 그의 이중성은 분열된 인격이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이룬 삶의 성취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실한 삶으로 이룬 업적이 도리어 성서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게 되는 아이러니, 인생의 성취가 도리어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만드는 운명의 아이러니가 다윗의 삶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왕국을 통일하고 그 정신적 기초를 놓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그의 삶은 불안정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울 왕을 피해 달아난 도망자로서, 적국인 블레셋에 망명하여 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자기 동족인 유대를 발판으로 삼아, 마침내 이스라엘 모든 부족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위업을 달성한 그에게 빠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룩한 통일 왕국을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왕조의 영원무궁한 기틀을 닦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 일을 실행하는 다윗에 대해서 성서는 겉으로ᅟᅳᆫ 칭찬합니다. 다윗이 안전한 왕궁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실한 사람이었다고 묘사합니다. 2절을 보면 다윗이 나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백향목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있습니다.이 말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만한 다윗의 마음 씀씀이가 표현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마침내 다윗에게 합당한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합니다.

내가 너를 너의 모든 원수로부터 보호하여서, 평안히 살게 하겠다. 네 집과 네 나라가 영원히 이어갈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 (삼하 7:11/16)

이렇게 왕조 신학이 선포되자 왕국의 정신적 기틀은 완성됩니다. 그런데, 이런 성취 안에서 비극은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삶이 보여주는 아이러니입니다.

성서는 이미 나단과의 대화에 담겨있는 다윗의 욕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보낸 두 차례의 경고로 표현됩니다.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 종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한마디로 말해서,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조신학을 비판하는 성서의 목소리라고 하겠습니다.

그 목소리 한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주권선언이 있습니다. 8절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다윗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은 것은, 바로 나다.” 이것은 왕조 신학을 위해 하나님을 활용하려는 다윗에 대한 성서의 경고입니다.

이런 성서의 경고를 오늘 본문에 남긴 사람은 훗날 역사를 기록한 신명기 사가(史家)입니다. 그들은 다윗의 왕조 신학이 보증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역사가들은 영원무궁할 것이라던 다윗 왕조가 강대국에 의해서 파괴되었고, 그의 자손들은 포로로 끌려간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아닐 것입니다. 다윗이 이룬 그 모든 성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읽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이룬 것으로 보이는 다윗은 지금 축복을 얻은 것인가, 위기에 놓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전에 이룬 모든 것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는 삶이란 이전에 이룬 모든 성취를 초월하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다윗이 보여준 삶의 아이러니, 과거의 성취가 현재의 위기로 변하는 아이러니, 이것이 코로나 시대 성탄절을 앞둔 우리의 첫 번째 묵상입니다.

 

[역설, 성육신의 자리에 선 마리아 / 누가복음 126~38]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성탄의 의미를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의 대화를 통해서 풀어가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닥쳐온 불합리한 상황 속에 담긴 거대한 진실을 깨달아갑니다.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에 담긴 역설적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천사의 말이 마리아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하신다.’

주님(Kyrios)의 은혜를 입는다는 말은 마리아에게 이해 못 할 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전한 그 말이 마리아에게 기쁨이 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녀는 자신이 도대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이어서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천사의 이 말은 정혼한 사람이 있는 처녀를 위기에 빠뜨리기에는 충분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마리아의 이 반문에는 양면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에 대한 표현이자, 앞으로 벌어질지 모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마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천사가 전달한 마지막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리아는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이 말은 단순한 순종의 표현이지만, 여기에는 누구도 흔들지 못할 결심이 담겨있습니다.

상황이란 가변적인 것이어서, 중요한 것은 대처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닥친 일의 의미가 결정됩니다. 만일 마리아가 가부장적 체제에 단지 피동적으로 순응한 여성이었다면, 그녀에게 닥친 천사의 소식은 재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 46~56>를 보더라도, 마리아는 자기 시대가 겪은 고통과 위기를 넘어서고자 꿈꾸는 여인으로 거듭납니다.

마리아는 믿고 순종함으로써, 위태로운 상황에서 자기를 잃어버리거나 자기 자신을 빼앗겨버린 것이 아니라, 고달픈 역사를 뚫고 신이 화육하는 현장에 선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발견이요. 그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신비입니다.

마리아가 경험한 이 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성서 기록의 역설적인 증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낮은 곳에 임한다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관한 가장 깊은 진실이라고 증언합니다. 마리아는 이 성육신(incarnation)의 사건 현장에 참여합니다.

 

[성탄, 신비의 계시 / 로마서 1625-27]

바울은 로마인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 마지막을 하나님에 관한 찬양으로 마칩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625~27절은 본래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긴 송영(doxology)입니다. 바울은 이 찬양에서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두 가지 일을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강하게 하신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드러냄으로써 믿음의 순종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대림절 마지막 주일에 묵상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바울의 해석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켜, 오랫동안 비밀스럽게 감추어둔 신비가 드러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성탄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사건은 아포칼립스 미스테리움,’ ‘드러난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합리적인 설명으로 포착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비합리적인(irrational) 것만은 아닙니다. 신비는 다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경험되며 그 신비를 체험한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또한, 이 신비는 이 세상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 세상 안에서 사건으로 발생합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생겨나는 변화를 가리켜 믿음의 순종’(obedience of faith)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순종은 신앙인을 우매에 빠뜨리는 종교의 기술이 아닙니다. 순종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종교의 하찮은 상술은 자기를 잃게 만듭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서 봤듯이, 진정한 믿음의 순종은 자기 발견이요, 자기 재구성입니다.

최근 인도에서 이십 년 가까이 선교사로 살았던 우리 교단 목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에도 포함되지 못한 천민들(달릿, 아디바시)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들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자처럼 경험되고, 사회에서 짓밟힙니다. 이 선교사님은 자신이 깨달은 성탄의 의미, 주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옥희, [아무것도 아닌 자의 죽음], 70)

그는 아무것도 아닌 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모셨고, 그분에게 순종합니다. 그것은 성탄의 꿈이 이끄는 순종입니다. 고통의 세상에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성탄의 신비가 빚어내는 꿈에 이끌린 순종입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꿈을 좋아한다. 사건과 상황이 이해되지 않을 때, 사람들의 약속이 행동과 다를 때, 뜻밖에 어려운 일이 발생할 때, 기가 막히고 억울한 일이 닥쳐왔을 때, 방향감각을 잃고 목적이 희미해질 때, 존재의 의미가 실종되었을 때, 폭력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세상사에 절망할 때, 자기의 신념을 위해 사람들을 분파적이고 극단적 사고로 몰아가며 이용하는 일을 보게 될 때, 나는 일단정지하고 전후좌우를 살펴보고 골똘히 성찰한다. 그 후에는 성찰의 결과를 내던지고, 머리를 비우고 기도하며 꿈을 기다린다. 꿈은 지금까지 나의 성찰을 통찰로 이끌어주었으며, 늘 나에게 새로운 출구를 열어주었다. 꿈은 끊임없이 나를 낙하시키며, 하강과 소통의 세계, 아무것도 아닌 자의 세계로 인도하여 주었다.”

 

우리에게도 이 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의 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다립니다. 이 위기에는 고통만이 아니라 생명의 신비도 있습니다. 신비 중의 신비는 낮은 곳에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낮은 곳을 향한 삶에 거룩한 하나님의 독생자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이 드러내는 신비입니다. 예수의 공동체로 모인 우리가, 비록 연약하고 부족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위기의 시대에 탄생하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모든 믿음의 행진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온 세계가 긴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다립니다. 역사의 위기가 깊을 때, 그리스도는 낮은 곳으로 오십니다. 이 성탄의 진실은 우리가 삶으로 드러내야 하는 신비입니다. 마리아처럼, 믿음의 순종으로 삶의 신비를 펼쳐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