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교회 (겔34:11-16, 엡1:15-23, 마25:31-46)
2020.11.22. 창조절 열두 번째 주일
오늘은 창조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상처를 보듬어주시고 새 살을 돋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발견되고, 오늘도 새 희망으로 약동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마음모아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에 히브리성서의 예언자들은 자국의 멸망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정의를 헌신짝처럼 하찮게 여긴 결과였다는 성찰로 받아들였습니다. 원망이나 절망이 아닌 뼈아픈 성찰이었기에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안내 받았습니다. 돌이킴, 바로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회개한 공동체에게 회복과 평화가 다시 약속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제1성서 에스겔서의 말씀은 이러한 맥락 가운데 있습니다. 에스겔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 창조절에, 역사를 새롭게 창조해가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살피며 창조신앙을 되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제2성서 에베소서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우리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큰 은총 가운데 있는지, 벅찬 가슴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란,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분출되는 곳으로, 교회를 설명합니다.
성서 주석가들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바울의 후대 문하생 집단이 바울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풍성한 신학적 통찰로 저술된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그리스도인과 헬라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서신으로 에베소서는 저술되었습니다. 저자는 유대문화에 정통하면서도 사도 바울의 정신을 따라 헬라 이방선교를 긍정하면서, 그리스도 교회의 의미를 풍성한 신학적 통찰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soma)’이며 하나님의 ‘충만함(pleroma)’이라고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늘 하늘뜻펴기의 요절로 삼았습니다.
봉독한 마태복음서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과 염소의 최후의 심판’이라는 은유 이야기입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감옥에 갇힌 자들, 그리고 나그네에게 선을 베푼 것이 곧 나에게 선을 베푼 것이다.”하는 임금의 판단이 기준이 되는 심판이었습니다. 임금으로 은유된 예수는 가난한 자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진정한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지 청중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신앙이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지 극명하게 규정해주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를 믿으면 가난한 자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인과적 윤리의식을 설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에게 선을 베푸는 윤리가 그 자체로 예수를 믿는 신앙”이라는, 매우 급진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가르침의 그 핵심적인 내용보다, 임금의 판결에 당황했던 의인과 악인에게 주목하려고 합니다. 이야기에는 임금이 판결의 주체였지만, 묵시적 은유로 임금은 예수를 지시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편의상 임금과 예수는 같은 주체로 여기며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는 오른쪽 양에 대비되는 의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라는 판결을, 왼쪽 염소에 대비되는 악인들에게는 저주와 영원한 형벌을 판결합니다. 이때 의인은 의인대로, 악인은 악인대로 의아해합니다. 예수의 판결에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의인은 “우리가 언제 예수님께 선을 베풀었습니까?” 그리고 악인은 “우리가 언제 예수님께 선을 베풀지 않았습니까?”하고 되묻습니다. 이렇듯 의인과 악인이 당혹스러워했던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판결을 내리는 임금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의인과 악인을 그렇게 당황하게 만든 이유는, “너희가 진정 예수를, (조금 더 확장해서) 하나님을 아느냐?”고 묻기 위한 설정이 아니었을까요?
“너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느냐?” 하는 물음은 오늘의 세 본문을 관통하고 있는 물음입니다. 오늘 에스겔서 본문에는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에스겔서 전반에 자주 나오는 말씀이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겔6:7)라는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그 때에는 나 주가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하는 구문도 간접적으로나마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심판받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쓰이는 문구인데, 예언서 대부분에서 자주 언급되는 레토릭입니다.
에베소서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문제”는 전제되어 있습니다. 17-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소망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하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앎으로써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이루어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제1성서 성문서 잠언 9장 10절에서도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라고 표현된 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제1, 제2성서에서 공히 중요한 소재이며,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소재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알다”를 뜻하는 히브리 낱말 “야다”가 지닌 특별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 언어문화권에서 “아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또는 누군가를 알고 있는, 어떤 지적인 통찰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야다: 아는 것”이란 삶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으로 확대됩니다. 삶을 공유하고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우리 삶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양과 염소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 임금 곧 예수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문제’가 내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앎으로써, 교회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도록 에베소서는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아는(야다)” 참된 교회의 표상을,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잘 ‘아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참된 교회의 표상이 되는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님의 “충만함”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늘 새롭게 갱신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을 ‘아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과 “충만함”에 담긴 교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참된 교회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공동체에게 “몸”과 “충만함”!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성찰을 안겨줄 수 있을까요?
교회를 ‘몸(soma)’으로 표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세상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교회로 규정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란 머리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세상 가운데 생동하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의지를 선포한 사건이었습니다.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백성들에게 최종승리를 확약시켜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0-22절 말씀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높은 것은 깎고(정의) 낮은 이들을 높여(생명) 길을 평탄케 하시는(평화) 나의 진리는 결코 좌절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 투영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하나님의 의지가 이어졌듯이,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심으로써 자연히 하나님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가 하나의 유기체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의 의지를 수행하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이것은, 교회란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악의 세력에 의해 결코 좌절될 수 없는 부활사건의 공동체라는 선언이며, 하나님과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세상에서 끊임없이 불의에 저항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은유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 교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어주면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 위치를 규명하는 메타포라면, “충만함(pleroma)”이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힘(energia) 곧 성령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땅을 충만케 하신다는 사상은 제1성서에서 종종 발견됩니다.(시89:11) 성서주석가는 언어적 용례를 추적하면서 이 “충만함”의 뜻을 ① 채우는 것 ② 가득 차 있는 것 ③ 온전케 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를 참고한다면 “충만함”의 의미를 영의 힘, 힘의 작용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즉, 하나님은 “만물 안에” 영(pneuma)의 힘을 가득히 채우시고 생명을 온전케 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영을 가득 채워서 만물의 자기 생명이 온전케 되도록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은 생명력을 채우는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함이다” 하는 이 정언은, 교회란 사랑의 힘으로 채워지고 또 온전해지는 공동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세상의 모든 지체(soma)들에게 사랑으로 영의 힘을 공급하여, 잃어버린 또는 빼앗긴 생명력을 다시 온전케 하는 사명이 교회에게 주어졌음을 알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고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교회의 위치를 자리매김 해줍니다. 교회의 존재론적인 서술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충만함”으로서 교회는, 교회가 공급받아야 할 신비한 힘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 생명력의 근원에 관한 묘사입니다. 교회를 설명하는 ‘몸’과 ‘충만함’은 이렇게 다른 각도에서 묘사되면서도 서로 조합되기도 하면서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몸’과 ‘충만함’에 공히 내포된 교회의 정체에 대해서 저는 “근원을 향한 끝없는 갈망과 세상을 향한 꾸준한 집념”이라고 정리해보겠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몸의 근원이 되고, 그보다 더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의지에까지 이르러야 교회는 한 몸의 건강한 유기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근원은 우리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 실존은 언제나 그 근원을 갈망합니다. 몸으로서 교회와 충만함으로서 교회는 이처럼 신앙의 근원을 끝없이 갈망하고 있다는 공통점에 닿아 있습니다.
다른 한편, 교회는 세상으로 나아가 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손과 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의 충만함은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공동체를 사랑과 생명으로 채우고 세상 가운데에서 생동하도록 추동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꾸준한 집념이 교회를 통하여 표출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몸’으로서 교회와 ‘충만함’으로서 교회는 세상을 향해 분출하는 성질이 공히 다분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교회는 하나님과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역사 속에서 교회의 몸으로 표현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즐거움을 그대로 춤추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포옹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세상에 전할 수 있다면? 교회의 선교로 하나님의 얼굴이 그려질 수 있다면? 이와 같은 목표는 언제나 유효한 우리의 꿈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함’으로서의 교회의 표상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선명해지기를 바랍니다. 힘차게 약동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원을 끝없이 갈망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파생된 생명 정의 평화를 세상에 전하는 선교를 멈추지 않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 부활사건을 선포하기 위해 세상으로 보냄 받은 공동체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충만함을 채워나갑시다.
우리에게 맡겨진 공동책임을 함께 지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채우는 선교 공동체로 살아갑시다.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언제나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