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춤"
사사기 4:1-7, 시편 90:1-8,12, 데살로니가전서 5:1-11, 마태복음 25:14-30
일 년 만에 이 자리에서 인사드립니다. 여기에 나와 계신 분들과 영상으로 함께 참여하고 계신 모든 분들 반갑습니다. 제가 여기에 설 때쯤에는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생각보다 긴 시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록 마스크로 우리의 얼굴을 다 보지 못함이 조금 아쉽지만, 어려운 중에도 이렇게 만나 뵐 수 있어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교회 안팎으로 힘든 일들을 겪으시며 어려운 시간을 보내셨을 텐데요, 어려움 속에서도 교우들께서 안식년을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해주시고 힘써 주셨기에 온전히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감사히 보낸 안식년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안식년 근황]
안식년은 신학교 졸업을 하고 전임사역을 하는 동안 한 번도 교회 생활을 쉬어본 적 없는 저에게는 생애 처음으로 맞이한 쉼의 시간었습니다. 안식년을 맞이하며 계획했던 내용은 세계 각 곳의 영성공동체(떼제, 플럼빌리지, 아쉬람, 아미쉬마을, 펜들힐 등)들을 방문하며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고 공동체가 살아가는 방식을 경험하며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제공되는 영성 훈련에 참여하여 다양하고 깊은 경험을 통해, 영성이 기반이 된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구상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안식년을 시작으로 첫 번째 걸음은 2019년 11월 대만 신츄에서 열린 아시아 에큐메니칼 여성대회(Asian Ecumenical Women's Assembly(AEWA))에 참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시아권 기독 여성들이 모여 공통의 문제를 내놓고 고민하며 연대하고 서로를 보듬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기장 감리교와 예장통합, 성공회 등 각 교단에서 참여하게 된 여성 교역자들이 출발 전부터 대회를 위해 함께 준비하여 대회에 힘을 모아 한국의 기독교를 알리고 공통의 문제를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회가 열리는 동안 한국 교역자들 간에는 각 교단마다의 상황을 공유하고 여성교역자로서 활동하는데 애로사항과 목회를 나누는 자리를 갖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만남과 나눔 속에 연대가 주는 힘을 경험하는 소중한 자리였습니다.
안식년 두 번째 걸음은 영성을 중심으로 한 사회변혁 공동체인 오로빌에서의 생활이었습니다. 3개월의 탐방기간은 그간 오로빌을 책과 미디어로 접했던 곳을 몸으로 직접 살아보면서 알게 되는 묘미가 있었습니다. 인도 첸나이에서 약 3시간 떨어진 오로빌(Auroville) 공동체는 1968년 2월 28일 인도의 사상가 스리 오로빈도를 따르던 프랑스인 제자 미라 알파사(현재 ‘마더’라고 불리는)와 그 뜻에 동의하는 124개국의 사람들이 모여 창립했습니다. 오로빌 공동체의 정신적 뿌리인 스리 오로빈도는 자기 성찰을 통한 영적 각성으로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는데요. 그렇기에 오로빌에서는 자본주의에 맞선 경제체제, 종교와 정치, 국적을 넘어섬, 자연과 인간이 공생할 수 있는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오로빌에 있는 동안 종교 활동이나 이념을 갖고 주장하지 않음에도 영성의 흐름과, 마을 구석구석에서 생태적 삶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로빌 근처의 사다나 포레스트를 방문하여 자연과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채식주의 식사, 물을 아껴쓰기 위한 방법연구, 자연분해 되는 화장실, 생태농법 개발, 생명살림을 위한 다큐멘터리 제작 등, 자연과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실천하고 나누는 장이었습니다.
지금도 오로빌은 계속해서 세계와 인간의 조화를 꿈꾸며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을 키우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 사는 곳이라 어디서든 생기는 관계에서 불거지는 문제를 안고 있고, 점차 커지는 자본의 힘을 막을 수는 없으나,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공동체가 추구하는 기본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로빌에 있으면서 저의 하루의 일과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른 아침 자연을 보며 요가와 호흡명상하기, 오로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마티르만디르에 가서 정원을 거닐고 명상홀에 앉아 하늘에서 내려오는 한 줄기 빛을 바라보며 지구의 에너지 느끼기, 영성을 비롯한 내면세계를 확장시키는 세미나, 치유 프로그램 코스, 오로빌의 철학이 담긴 모임들, 각 나라마다 특색 있는 커뮤니티 모임도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든 것이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음미하고 신년을 여는 명상, 오로빌 공동체 창립일(2월28일) 행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아름다운 꽃과 초로 꾸며진 반야트리가 있는 정원에서 모두가 침묵 가운데 조용히 앉기도 하고 걷거나, 눕고, 때로는 나무를 감싸 안으며 명상하는 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각자의 삶을 돌아보고 내면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것을 보면서, 매 년 수많은 사람들이 왜 이곳을 찾아오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창립기념일의 행사는 고요함의 정수를 보여주었는데요. 새벽5시에 시작하는 공동체 탄생 축하를 위해 새벽4시부터 줄을 선 4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둥근 돔에 차례로 앉아 두 시간 가량 명상을 하는 모습은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명상 중반 해가 떠오르기 직전 어둠속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장작불과 함께 세상에 빛을 보내고자 하는 수많은 이들의 간절한 염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티르만디르와 그 옆에 50년이 넘도록 이곳을 지켜온 반야트리를 보면서 오로빌이 여기까지 온 뜻과 힘을 몸으로 전달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이 오직 침묵으로 우주에 몸을 맡기고 평안하게 앉아있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말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전달되는 세계가 있음을, 이러한 통로를 마련해 주는 것만으로도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로빌에서 몸으로 느낀 또 하나의 기억은 마티르만디르에서 명상을 마치고 나와 맞이한 비온 뒤의 촉촉한 땅입니다. 그곳을 맨발로 걸으며 느끼는 숲의 향기와 바람소리에서 자유과 평온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부드러움과 섬세함 그리고 아름다움, 여성의 에너지가 물씬 품어져 나오는 곳에서의 생활은 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인도에서 공동체 생활 외에도, 첸나이와 북쪽 지역에서 어려운 가운데 선교활동을 하는 곳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첸나이 내 기독대학에서 한국어 교육과 인도청년들의 발전을 위해 애쓰는 선교사님들, 그리고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마을공부방을 운영하고, 열악한 학교에 화장실과 놀이터를 지을 수 있도록 협력하고, 현지 인고교회들과 연대하며 힘을 다해 선교하시는 분들의 깊은 사랑과 헌신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경험을 이어서 방문 계획이 있었으나 인도에도 코로나가 불어 닥치면서 이웃나라인 쓰리랑카나 티벳, 부탄으로도 갈수 없는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코로나 소식으로 꽤나 시끄러웠기에, 보다 안전하다고 판단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먼저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 도착한 후 5일 만에 불어 닥친 코로나로 인한 봉쇄령을 맞이하며, 제가 코로나에 살짝 앞서 가고 뒤이어 코로나가 빠르게 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유럽의 냉랭함을 마주하며 포르투갈로 이동했고 수도 리스본까지 갔지만, 이 곳 또한 코로나로 꽁꽁 얼기 시작하여 급기야 게스트하우스 문을 닫는 상황에서 더 이상은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결국 어렵게 한국행 티켓을 구해서 돌아왔습니다. 오자마자 맞이한 자가 격리 기간은 그 동안 미처 돌보지 못한 삶의 구석구석을 가꾸는 기회였습니다. 몇 달간의 삶을 위해 챙겨간 25인치 여행가방을 보면서, 얼마 안되는 물건들 중에도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 있었음을 발견하면서, 소유와 비움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코로나로 한국에서 머물게 되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머리를 부여잡고 그저 멍하니 있어보기도 하고, 더 이상 잠이 안 올 때까지 실컷 자보기도 하고,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몇 일간 정주행 하기도 하고, 집에서 일주일이 넘도록 밖을 나가지 않고 방콕 생활을 해보기도 하고, 핸드폰을 끄고 외부와의 연락을 내려놓고 온전히 저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동네 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매일 루틴으로 생활화했습니다. 일할 땐 피곤하다는 이유로 밀어놓았던 것들을 하나씩 해가며 얻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안식년 계획은 코로나로 해외 공동체 탐방을 못하게 된 대신 영적 성장을 위한 수련모임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지리산 산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도반들과 만나 마음을 나누고, 행복수업협동조합에서 명상과 알아차림의 시간을 갖고, 삶의예술학교에서 어웨이크닝과 디프닝까지 3단계 세미나 과정을 거치면서 영적 각성과 삶을 예술로 가꾸어가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마다 영상통화로 도반들을 만나 깨달음과 감사와 축복을 나누며 삶의 엑기스를 담는 일, 하루 두 번 호흡명상을 하면서 삶에서 만나는 경이로움과 변화를 느끼는 작업을 해가고 있습니다.
비록 코로나로 원래의 계획이 제한된 것 같았지만, 오히려 저에게는 차분하게 내면의 힘에 집중하면서, 보지 못했던 저의 삶의 패턴과 방향성을 관찰하며 성찰과 전환, 재정비하는 훈련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 외적인 변화가 있다면 최근 이사를 한 것인데요. 5층 건물에 맨 꼭대기 층이라 헉헉 거리며 오르내리지만 창문 너머로 하늘을 마음껏 볼 수 있겠다는 생각과 옥상에서 햇빛 아래 빨래 너는 것을 기대하며 이사를 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지금 사는 곳은 빛이 가득한 채광부자 집입니다.
[존재에 대한 안내]
안식년을 통해 제게는 존재에 대한 안내가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지금 보여드리는 비누운동으로 깨달음의 지점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에 젖은 비누를 손에 쥐어봅니다. 젖은 비누 아래는 바깥으로 드러나는 상황, 외적인 것을 상징합니다. 위쪽은 우리의 내면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외부에서 큰 압력을 만날 때 우리의 주위가 아래쪽 즉 바깥상황, 과거, 걱정, 외부의 스토리에 집중할 때 이 비누는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같은 압력을 받으면서 주의를 위로, 즉 우리가 내면을 보고 신과 조율하고 지금 이 순간에 있는 새로움에 눈뜨고자 할 때, 비누는 위로 올라갑니다. 압력이 오더라도 우리의 극성이 위로 향할 때, 이것은 우리의 의식을 고양시켜 하늘의 세계로, 빛을 발산하도록 해줍니다. 안식년을 어떻게 보내고 무엇을 배웠는가?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위를 향한 응답적 사랑의 삶을 배우고 연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극성을 어디로?]
오늘 주어진 본문들을 통해 우리의 극성을 어디로 향할 것인지 묻습니다. 바울서신 가운데 맨 먼저 쓰인 데살로니가전서는 예수님이 떠나시고 난 후 임박한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 지연으로 심각한 고민과 불안에 싸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리신 예수가 장차 닥쳐올 진노에서 그들을 건져 주실 분으로 믿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를 기다리는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 고대했지만, 재림 전에 먼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혼란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바울은 이 서신에서 우리의 근본 존재를 명료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빛의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이들에 대해, 죽는 일에 대해 불안하거나 걱정하지 말자. 예수님의 재림시점은 우리가 알 수가 없고, 밤의 도둑처럼 불시에 닥칠 것이기에, 그 시기가 언제일까 혹시 오지 않을까를 걱정하면서 힘을 빼지 말고, 그저 매 순간 깨어 있는 삶을 살기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어서까지 발산하여 보여준 깊은 사랑을 마음에 담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편 본문 역시 우리가 어떤 극성을 가져야하지 안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존재하게 하신 그 선한 목적을 지속시키는 삶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죽음이라는 한계와 심판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지낸다면 육체적인 죽음과 고난은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주신 삶을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 근원을 부정적인 쪽으로 끌고 갈 때 죽음을 두려워하고 겁에 질려 세상에 종살이 하듯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겁에 질려 세상에 종살이 하는 모습은 복음서 본문에 나온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예수가 이 비유를 이야기하신 원래의 역사적 자리에서 겨냥한 청중은 제자들이었겠으나, 후에 마태는 이것을 공동체가 맞이한 예수 재림과 최후심판 요소가 부각되도록 편집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종과 대비되는 세 번째 종을 향한 주인의 말에서 최후 심판 때 내리는 심판의 비유로 편집했음을 보게 됩니다. 24장과 25장에 걸쳐 7개의 종말에 관한 비유 중 달란트 비유가 6번째에 나오도록 배치함으로 종말에 대한 강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달란트 비유는 나눠받은 일을 내가 능력이 없다는 핑계로, 걱정만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세 번째 종의 태도에 담고자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무책임성입니다. 이는 타고난 재능문제를 이야기함이 아닙니다. 예수제자들은 예수의 삶과 활동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선물 받았고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나라를 확대해나가야 할 과제를 위임받았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종들이 하나님나라 운동의 일꾼과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 일이 크든지 작든지 다 하나님나라 운동과 관련된 일이기에, 맡은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이 하늘로 정열되어 있을 때, 압력을 통해 에너지가 발산되는 기적과도 같은 길이 열림을 봅니다.
사사 에훗이 죽은 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을 하였기에, 주님은 그들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넘겨줍니다. 당시 가나안은 철병거 900대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20년간 억압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울음 토해내고 도움을 요청하니 주님은 드보라를 통해 일을 시작하십니다. 드보라는 예언자이자 사사이며, 에브라임의 언덕 종려나무 아래서 이스라엘 내의 분쟁을 해결하는 일을 했습니다. 후에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 사사로서의 깊은 면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드보라는 아히노암의 아들 바락을 소환하고 그에게 납달리와 스불론 지파에서 큰 군사를 일으켜 와디 기손에서 시스라의 가나안 군대와 싸우라고 지시합니다. 결국 이 싸움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납니다. 철병거 900대로 늘 이스라엘을 압제한 가나안을 이기게 된 승리 속에서 우리의 의식이 하늘로 정열 되어 있을 때,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열릴 가능성을 봅니다.
[향린에서의 7년을 마무리하며]
코로나를 비롯하여 어려운 교회 상황에서도 목회자의 안식과 성장을 위해 아낌없이 보내주신 교우들의 지원은 저에게 귀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안식년을 통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컴퓨터를 바탕화면에 너무 많은 화면 창을 띄어 놓은 것과 같은 저의 삶에 안식년은 복잡한 것들을 새로이 정리하게 하는 리셋의 시간, 성령이 개입할 시간이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사는지, 그동안 해온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무엇에 힘을 쏟고, 무엇에 힘겨웠는지를 세부적으로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향린에서 함께 한 지 7년, 이제 모든 것을 마칩니다. 그동안 부족한 면이 많았음에도 함께 해주시고 기운 나누어 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일도 많았고, 힘든 과정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 함께 해주셨기에 성장하는 시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늘 서로의 자랑이 되어 어느 곳에 있든 무엇을 하든 서로의 빛으로 존재해주길 바라며 축복합니다. 한껏 아름답게 피고 지는 꽃처럼 누구나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장열하게 꽃피우고 지고, 그래서 씨를 뿌리고 죽고 그 덕분에 세상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맞이합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힘들더라도 꽃을 피울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는 근본적인 생명력과 존재의 빛이 있습니다. 이 생명의 불씨는 파괴할 수 없는 씨앗입니다. 이 씨앗은 차가운 눈 밑에서 따뜻함과 참 이해를 만나서 다시 피어날 수 있을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래 신으로부터 주어진 생명의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선함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아픔을 딛고 생명의 춤을 추시기를, 우리가 모두를 위해 선함의 자리에서 생명을 담아 춤추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보냄의 말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낙담하고 기죽지 마라
끊임없이 참 나의 영에 주목하라.
그것은 우주의 힘과 권능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견디는 변하지 않는 사랑이다.
모든 것을 담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현실의 근원이며 정수이기 때문이다.
(마샤 보글린)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 안에 움튼 생명이 당신을 통해 춤추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