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동창회 44] 건강한 사회는 신자(信者) 보다, 자기 자신이 되어 자신의 삶을 강력하게 긍정하는 참된 인간이 필요하다!

by 최성철 posted Nov 30, 2019 Views 1798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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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간의 존엄성 자율성창조성가능성을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수동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교회 종교는 더 이상 설득력과 신뢰를 잃고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다. 한편 교회 안밖으로 인간성에 대한 깨달음과 새로운 인식이 생겨나면서 역사적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았던 하느님 나라 종교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다시 말해, 21세기의 현대인들은 죽은 후에 갈 저 밖의 세계에 대한 망상을 떠나 보내고, 오직 지금 여기 이 세계에서 자신의 세계을 창조적으로 세워나가려고 한다. 교회의 시대는 끝이 났다.

 

교회 기독교는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교조적, 제도적, 강압적 성격을 포기해야 한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게 적합한 세계와 자기됨의 방식과 자율적인 삶의 모습을 이루어가기를 원할 때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언어와 상징의 체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도적인 기독교는 권력과 사회적 통제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했고, 너무나 규율적이었고, 구원은 죽음 후에나 오는 것으로 연기시키는 뻔뻔스러운 거짓과 은폐를 서슴치 않았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고 있다는 우주진화 세계관을 일상생활화하고 있는 주류 사회의 현대인들은 죽음 이후의 삶이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구원은 지금 여기에서 오늘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인식한다. 예수의 기독교는 사람들의 삶과 세계를 참으로 해방적이며 자유롭게 만드는 종교이다. 사람들은 기독교 안에서 저마다 자신의 길을 가면서, 마침내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나아가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언어와 자기 표현 방식들을 발견해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는 그 자체가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라 참된 기독교가 되어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교회 기독교는 지금 여기에서 온전한 인간, 참된 인간의 삶을 거부하고 무시한체 죽음 후에 갈 다른 세계를 준비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마치 장례식을 거창하게 준비하듯이 시간과 정력과 물자를 낭비했다. 그러나 이런 장례 준비 기독교는 죽었으며, 이제 이 땅에서 예수의 기독교를 실현할 마지막 기회다.

                                                                                             

기독교의 개혁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교회가 탄생할 수 있는데에 무엇이 필요한가? 새로운 종교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비상식적인 특수한 언어 또는 성스러운 특별한 장소 또는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들 보다, 평범한 일상 언어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솔직하고 이성적인 평범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새로운 종교는 지극히 현세적인 종교이며, 21세기의 우주진화 세계관과학에 근거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무엇보다 과거의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이고 강압적인 종교 체계를 되풀이 해서는 안되며, 태양같은 삶자율적이고 열정적이고 표현적 삶의 방식인도주의적 윤리를 택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기독교예수의 정신에 따른 하느님 나라 종교이며, 진리에 대해 추악한 소유권배타적인 태도와 이에 따르는 거창한 이름명분이 필요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초자연적인 전지전능한 하느님, (저 밖의) 다른 세계, 천국과 지옥, 징벌과 구원, 재림과 최후심판, (교리적인) 그리스도, 선택받은 기독교인 등의 말들이 더 이상 필요없다. 이런 제도적인 종교의 단어들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장애물이 될뿐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매우 민주적이고, 자신을 잘 표현하며, 인도주의적인 레저문화를 만끽하고 있다. 예수의 정신에 따른 기독교의 개혁은 사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부족주의를 넘어서 세계를 큰 그림으로 그리는 우주적이고 통합적혁명이 될 수밖에 없다. 교회 기독교교회 밖의 주류 문화를 세속적이고 사악하다고 정죄하고, 비겁하게 또한 옹졸하게 교회 안으로 도피했기 때문에 세상을 더 살기 좋은 세계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설득력과 신뢰를 잃고 무용지물이 되어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다. 주류 문화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허무주의, 인도주의를 인식하고 있다. 주류 문화에서 자신의 구원자기표현에 의한 자기실현 추구에 달려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 기독교는 교회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해 무관하거나 무지해서는 안되며, 새롭고 긍정적인 관점을 지녀야 한다. 다시 말해, 자아()안을 바깥으로 뒤집어 자아의 전통적인 흐름을 역전시켜야 한다. 교회자아(自我 인간의 본성으로서 생각, 감정 등을 통해 외부와 접촉하는 행동의 주체로서의 나 자신)를 폄하하고, 사람들에게 자아가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며 잠잠한 것이 좋은 신앙이라는 무지함과 무식함을 강압적으로 주입시켰다. 따라서 신자(信者)들은 하느님이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인간은 뒤로 물러서서 죽음 후의 천국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내세() 신학에 병적으로 세뇌되었으며, 한 개인의 삶은 오직 내면적인 영적 삶뿐이었다.

 

지난 1700년은 교회 기독교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 교회의 시대는 끝났다. 오늘 포스트모던 시대 그리고 하느님 나라 시대에서는 자아(自我)의 성취를 위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역전되었다. 다시 말해  자아()는 자율적으로 표현되기 위해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한다. 밖으로 나온 자아에 의해서만 자아는 참된 자아가 된다. 자아는 열정적으로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고, 선포되고, 공개되기를 열망한다. 교회가 사람들의 자아가 드러나지 못하도록 강요했던 폐쇄된 벽장의 영성은 거짓이며 은폐일뿐만 아니라 살인행위와 다를바가 없다. 자아가 없는 거룩한 신자의 모습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 참된 종교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에 대한 것이다.

 

교회의 시대에는 인간 존재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도록 설계된 일종의 양서류(兩棲)였다. 육체와 분리된 자아()의 핵심인 영혼은 유한한 영적 실체였고, 자연스럽게 불멸하는 존재였으며, 하느님과 영원한 다른 세계를 위해 지어진 존재였다. 또한 영혼은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원리로서 육체의 형상이었으며, 따라서 육체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외부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도달하는 많은 유혹들과 밀접하게 접촉하게 되었다. 이 세계에서의 삶은 영혼의 복락을 위협할 수 있으며, 안전하게 이 세계를 통과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를 짓게될 가능성을 피해가야 할 필요가 있고, 육체와 열정을 억제해야 하며, 자주 마음을 가라앉히고 영혼 깊은 곳에서 신선한 바람을 쏘이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착각했다. 고대 세계의 삼층 세계관에서 상상했던 이원론은 오늘날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가 공개적 계시(啓示)로 인식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교회 기독교는 그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 역사적 예수의 하느님 나라 신학을 전적으로 거부했다. 다시 말해, 이 세계를 온 인류가 평등하고 자유하게 살 수 있는 더 좋은 세상으로 재건설하자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무시하고, 정반대로 생존과 죽음의 두려움때문에 이 세계를 멸망할 세상으로 정죄하고, 죽음 후 저 밖의 세계로 이주해갈 내세지향적인 망상에 빠졌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세속적인 하느님을 버리고 사회적 세계로부터 후퇴하고 소위 성스러운 교회 울타인 안으로 자신들을 숨겼다. 사회적이고 육체적인 삶은 기껏해야 두려움에 빠진 수동적이고 조심스럽고 비겁한 삶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성숙해져서 계몽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훨씬 더 이 세상적인 사고들이 자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점점 우세하게 되었다. 가장 영향력있는 사상가들은 쇼펜하우어, 다윈, 니체 그리고 프로이드 등등이였으며, 오늘날 주류 문화 속의 지배적인 자아개념은 그들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의하면, 인간언어를 구사하는 동물이며, 자연적으로 문화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존재이다. 자아의 생명생물학적 충동의 집합에 의해 동력을 얻는 것으로서, 이 충동들은 때때로 서로간에 갈등을 일으키지만, 밖으로 표현되려고 몸부림친다. 그 충동들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표현되지 못하고 억압을 받거나 통제되면, 아프다고 느끼거나 병이 든다. 문화는 이런 생물학적 충동들이 표현되는 공인된 형태들, 적절한 채널들, 상징적 표현들의 일정 범위를 제공한다. 각 사람은 자신이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자신의 생물학적 충동 및 개인적 열망을 실현하면서, 동시에 저마다의 비슷한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그들의 문화적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표현형태를 획득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근대후기 및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물자의 증가와 더 좋은 사회 행정구조 덕분에 사회가 개인에게 과거보다 한층 더 폭 넓고 매력적인 자아 형태 삶의 방식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수동적이고 강압적인 규율적 문화로부터 자율적레저 문화, 교회 종교로부터 하느님 나라 종교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인간의 본성인 자아()는 자연적이고 자율적으로 외부로 표현하는 자연의 법칙의 운동에 의해 움직인다. 자아는 외부로 언어와 상징적 표현으로 표출되고자 한다. 또한 문화는 언어와 행동양식을 통해 일정 폭의 용인되는 표출 형태를 제공해준다. 우리는 언어와 행동으로 우리의 감정들을 최선을 다해 만족스럽게 가장 논리 정연하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표출한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적으로 우리 자신들을 표현하며, 그런 즉각적 표현을 통해 우리 자신이 되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그런 즉각적 표현을 통해 항상 타인과 소통하며 공동의 세계를 건설한다. 생물학적 감정이 하나의 상징적 형식으로 채워지는 그 순간이 만물이 존재하게 되고, 실현되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언어와 상징적 표현이 세계를 창조했고, 끊임없이 창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항상 일어나며, 우리 눈앞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들과 속삭임과 신음에 주의깊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색깔은 우리의 감정들이 표출되어 경험의 스크린 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사물의 맛, 소리, 직선과 곡선의 유희 등, 이 모든 것들 안에서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나는 감정들이 일반적인 의미들 속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며, 마침내 세계는 생명에로 솟아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138억 년의 우주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작은 전체들 즉 은하계와 태양계와 지구의 틀이 담고 있는 자아와 그 세계에 관한 진실이다. 우리의 흘러 넘치는 삶의 감정은 밖으로 표현되어질 때 일반적 의미를 덧입게 되고, 우리의 세계는 형태를 갖추어 살아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우리들 자신이 우리의 세계의 일부로서의 자아가 된다. 이렇게 감정의 흐름 과정, 즉 그 흐름에 의해 우리의 세계가 살아나고 색깔을 지니게 되는 감정의 흐름 과정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 매순간 자아가 되고 다시 사라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기에 종교의 참된 의미와 그 중요성이 있다.

 

우리는 강력하게 지금 여기에서, 이 세계나 자신다른 사람들다른 생명들의 삶을 긍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각자가 추구해야 하고, 종교가 제공히야만 하는 것은, 삶을 강력하게 긍정함으로써 이 세계가 풍부하게 아름다워지고, 우리 자신이 가장 만족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언어와 상징들이다. 우리의 삶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고, 감정의 흐름을 계속적으로 행복하게 표현하는 자율적이고 창조적태양과 같은 삶을 살아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으로서, 완전한 헌신과 이 세계에서의 삶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구원이다. 이것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종교의 핵심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