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동창회 25] 성서적 도덕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자!

by 최성철 posted Jul 20, 2019 Views 1572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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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유신론적 하느님이 만들었다는 성서적 도덕률문자적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가정과 사회가 분단과 혼란에 빠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죽어가는 하느님과 자신들의 유신론적 믿음을 고수하면서 현대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성경구절을 답과 증거로 제시하는 무지한 행위를 서슴치 않고 있다. 그러나 우주진화 과학시대에 고대 성서는 백과사전이나 과학책이 아니라는 보편적인 인식으로 성서인용은 더 이상 설득력과 효력이 없다. 다시 말해서 성서의 전체적 사상을 무시한체 겨우 몇 개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의 정답으로 제공하는 소위 복음주의적이고 성서적인 도덕률은 몰상식하다.   

 

예를 들자면, 미국 남부의 흑백 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은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를 인용한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그들의 근거는 이렇다: 구약성서에 노아의 아들인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았다는 죄 때문에, 그 자신은 물론 자손들까지도 저주를 받아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창세기 9:25-27). 이런 성서구절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하느님을 신봉하고 있는가? 그런 하느님은 21세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없다. 문제는 인종차별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탄압하고 희생시키는 이기적이고 옹졸하고 부족적인 하느님에 대해 솔직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인류역사에서 집단적으로 저주받은 수없이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잘못 때문에 노예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성서의 핵심적인 사상이 아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인용하는 기독교인들은 단지 자신의 편견과 우월감을 고수하고 자신의 폭력적인 태도를 변경하지 않으려고 억지주장을 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이란 망상에 빠져서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 즉 비기독교인은 이방인과 죄인들이며 이들과 자신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여 분리되어야 할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구절들을 인용한다. 그러나 그들이 취사선택하여 인용하는 구절들은 성서의 다른 구절들과 상충되는 모순을 드러내며 더욱이 성서전체의 사상에 크게 위배된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종교적 안전을 문자적 성서에 뿌리내리고 자신들의 안전이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성서 문자주의자들은 성서의 왜곡과 모순에 직면하거나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견해에 대해 분노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으며,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을 이단, 사탄 또는 마귀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변명한다.  

 

근본주의자들이 사탄과 마귀를 핑계 대는 행태는 일종의 유행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방법이 항상 성공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만일 마귀가 원수가 아닐 경우에는 그 대신 경쟁하고 있는 다른 교단과 교회가 공격의 대상이 된다. 또한 경쟁상대 교회가 없을 때에는 종교적 자유주의자들, 세속적 현대주의자들,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들, 다른 종교인들, 무종교인들을 사탄과 마귀와 원수와 빨갱이로 삼는다. 이렇게 비합리적인 종교적 분노는 항상 분풀이할 표적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성서의 무오설과 절대적인 권위를 맹신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도전을 받거나 자신들의 안전이 위협을 받으면 적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원수들은 어서 속히 멸망하게 해달라고 하느님에게 기도하거나 또는 저주한다. 이런 종교적 분노와 언행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는 하느님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다 나오라는 예수의 복음에는 전혀 닿지 않는 비상식적인 행위이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138억 년의 우주 역사를 부인하는 무지함을 부끄러움 없이 뻔뻔스럽게 드러낸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 인간 생물종은 남자와 여자의 차별없이 30만 년 전에 출현했다는 우주 진화론을 부인하고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기 위하여 인간은 6천 년 전에 하느님이 완성품으로 창조했다는 창조론을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까지도 성서에 근거하여 정당화한다. 그들은 3천 년 전 부족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기록된 성서를 21세기에 문자적으로 믿는 망상과 무지함에 빠져있다. 많은 보수적인 교회들의 여성에 대한 편견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근거하며 하느님이 계획대로 남성을 먼저 창조하고 여성은 나중에 남성의 부분으로 창조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여성의 정체는 남성에 의해 정해졌으며, 여성은 교회의 제단에서 하느님을 대행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즉 여자들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지 않았으며, 오직 남자들만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문자적인 주장이다. 즉 고대 성서를 우주진화 세계의 과학책, 역사책, 백과사전으로 착각하는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이런 닳고닳은 진부한 사고방식은 주류 사회에서 설득력과 효력이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 내부에서는 여전히 오직 남성만이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부장적이며 성차별적인 편견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지난날의 틀에 박힌 성차별의 시대가 끝이 나면서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교회는 심기가 대단히 불편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하느님의 뜻을 어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신중하게 읽지 않기 때문에 급속도로 변천하는 미래의 물결에서 여성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주류 신학계에서 보편화된 바울 서신에 대한 성서비평에 따르면, 신약성서에 기록된 13개의 바울서신들의 저자는 적어도 3명의 다른 바울이다. 즉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급진적인 진짜 바울과 바울이 죽은 다음에 그의 이름을 이용해서 바울의 사상에 반대적이며 반동적인 가짜 바울과 저자가 바울이기에는 불확실한 논쟁적인 서신들의 보수적인 바울이 있다. 또한 이 세 명의 바울은 바울 서신 전체에 뒤섞여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신중하게 읽고 재해석하지 않으면 문자적인 맹신에 빠지기 쉽다. 오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바울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물론 예수에 대해서도 가짜 바울과 보수적인 바울의 잘못된 가르침을 맹종하고 있다.   

 

소위 가짜 바울은 여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니고 있으니 머리를 가리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여자에게서 남자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여자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1:7-9). 또한 가짜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 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고전 14:34-35).

 

만일 이런 성서구절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성서는 틀림이 하나도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면, 여자는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거나, 예배의 성례전에 참여하거나, 교회학교에서 선생으로 가르치거나, 목사나 신부로 안수 받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여자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이런 분야에 참여하고 있는 교회들은 이미 성서구절들을 무시하거나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성(sexuality)에 대한 새로운 인식, 특히 성서에 대한 여성신학적 인식은 교회나 성서가 정의해온 소위 거룩한 전통에 분명히 정면으로 위배되고 있다. 오늘날 거룩한 전통은 새로운 깨달음과 인식을 수용하기 위하여 여러 면에서 적당히 변형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가 여성을 차별하고 탄압하고 통제하던 시대는 끝이 났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사람들은 더 이상 성서적 도덕률의 노예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

 

또한 동성애(homosexuality) 문제도 소위 거룩한 성서에 압박을 가하는 성 의식과 실천의 또다른 현실적인 과제이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도 과거에 주류 교단들에서 게이와 레스비언을 억압하고 배척하기 위해 단순히 성서 66권 중에서 몇 개의 성서 구절을 인용했다. 따라서 동성애를 탄압하기 위한 하느님의 저주를 합리화하려고 성서를 들먹일 때마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약방의 감초처럼 무비판적으로 인용되었다. 그러나 성서를 신중하게 읽으면, 고대 유목민 사회에서 실천되었던 손님 대접에 대한 친절 예법은 오늘날 이해할 수 없는 이상스러운 이야기이며 현대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그것은 집단 강간이었고 분명히 죄악의 행동이었으며, 아무도 심지어는 성서근본주의자들조차도 묵인할 수 없는 여성학대 및 포악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라는 소돔성의 주민이었는데 심부름꾼 천사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들이 소돔성 사내들에 의하여 성적으로 겁탈당하지 않도록 자기 집을 보호처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룻이 이들 손님들을 보호하려고 폭력배들에게 자기의 두 딸을 성적 노리개로 내어 주면서, 룻은 말하기를 그 아이들을 당신들에게 내어줄터이니 마음대로 하시오”(창세기 19:8)라고 했다. 계속해서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진전된다. 룻은 자기 자신의 딸을 그토록 잔인하게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의로운 행동을 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 악명 높은 도시가 파괴될 때, 몇 안되는 의로운 사람들로 여겨진 룻과 그 가족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았다. 또한 룻은 나중에 잔뜩 술에 취하여 자신의 딸들이 벌인 유혹에 빠져 근친상간을 저질렀다(창세기 19:30-36). 주목해야 할 것은, 성경 문자주의가 주장하는 목표는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사는 정의로운 가치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새로운 깨달음에 의하여 도전 받지 못하도록 자기들이 안일하게 살아온 삶의 방식에 가두어 두는 것이다. 성서의 광범위한 세계와 전체적인 사상을 무시하고, 단지 선택적으로 몇 개 안되는 성서 구절을 인용하여 성서 전체에 먹칠하는 것은 근본주의자들이 항상 하는 일이다.

 

동성애를 저주하는 이야기가 신구약 성서에 기록될 당시 기원전 6세기나 바울의 시대에는 오늘날 현대 과학이 밝히는 동성애의 생물학적 원인에 대한 연구발표를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과학적 자료들에 의하면 동성애 경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 즉 개인의 인간됨의 문제이지 행동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미국 의학협회는 공식적으로 선언하기를 동성애는 치료해야 할 질병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의 정체이다. 동성애 현상은 인류 역사의 초기에서부터 인간의 삶 가운데 있어 왔다. 동성애는 인간은 물론 척추동물들과  비단 식물에도 드러난다. 현대 과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은 모태 속에 있을 때 이미 두뇌 구조가 성적으로 동성에게만 욕망을 일으키도록 반응하게 만들어진 사람들이 있다. 동성애는 우주의 법칙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고대에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뇌과학진화심리학이 밝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상상도 못했다. 따라서 성서에 기록된 인간의 (sexuality)에 대한 관념은 편파적이며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진부한 골동품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성서적인 성의 관념 즉 성서적인 도덕률은 현대의 지식에 와닿지 않는다. 매일매일 새롭게 소개되는 성에 대한 새로운 의식과  과거의 고정관념과 패러다임이 쇠퇴해 감으로써 성서의 무오설과 절대적인 권위는 심각한 도전을 맞이했으며 많은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위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새로운 위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와 과학의 충돌은 이미 지난 수백 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갈릴레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가 교회로부터 파문을 받았다. 뉴톤의 세계관은 우주가 마치 시계처럼 법칙대로 움직이며 부품이 고장나면 새로운 것으로 교체한다는 기계적인 세계관이었으나, 21세기에 다윈의 진화론의 발전과 함께 아인슈타인의 양자물리학에 근거한 세계관은 우주는 부품들로 짜맟추어진 기계가 아나라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은 고장이 나더라도 교체하거나 버릴 수 없이 모두가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고 있는 유기체와 같다는 불확실성의 우주진화 세계관이다. 우주진화 세계관을 반대하기 위해 창조론자가 등장했으며, 문자주의에 빠진 보수주의자들은 점차 기독교에 대한 반지성적이고 비상식적인 주장을 늘어 놓는다. 결과적으로 과거의 패러다임에 식상하고 지친 사람들은 제도화된 교회의 믿음체계를 떠나 세속 사회로 나가 교회동창회를 이루며 점차 확대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은 성서를 위기에 빠트렸다. 날이 갈수록 성서는 신뢰를 잃고 설득력마져 잃었다. 사실상 성서는 근본주의자들에 의해서 멋대로 변질되고 왜곡되고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주류 교단 교회들의 교인들 대부분이 성서 문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들은 성서 근본주의를 대치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남은 선택은 계속해서 성서 문맹 속에서 교리적 공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면서 무의미하게 살아가거나 아니면 이분법적 믿음체계와 이별하고 교회를 떠나는 길밖에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지난 200년 동안 성서신학이 이루어낸 발전은 교회의 평신도들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목사들은 진리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그대신 비상식적이고 문자적인 성서 구절들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두려움을 심어주면서 돈이나 긁어 모으려는 속셈으로 사람들을 우롱했다.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오히려 교회의 양적 성장에 걸림돌이 되었으며 교인들의 이성적인 정신 수준은 영양실족의 상태에 빠졌다.

 

성서는 문자 그대로 진리이며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은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목사들의 거짓과 은폐의 전략이다. 성서 문자주의자들은 성서에 담겨져 있는 깨달음과 심층적인 통찰과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에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다. 21세기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문자적 기록 속에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는 우주적인 진리 즉 살아있는 하느님의 뜻을 자율적으로 창조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신성 보다 더 소중한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은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성서 근본주의자가 되도록 교육을 받고 성서적 도덕률의 노예가 되었지만 이제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 때가 되었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종교에서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주의, 인종차별, 종교차별, 빈부차별을 추방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평한 대접과 존중을 받아야 한다. 필자의 글을 읽고 혼랍스럽거나 심지어 분노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이용해서 내가 안전하고 편안해지는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한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통찰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