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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동창회 17] 인간의 욕구가 유신론적 하느님을 만들었다!

by 최성철 posted May 24, 2019 Views 1651 Replies 0

 

오늘날 무신론이 사회에 보편화된 가장 큰 원인은 유신론의 하느님이 더 이상 실제로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과학과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우주진화 세계관이 일반인들의 가치관과 윤리관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믿었던 초자연적이고 인격적이고 유신론적 하느님의 일들이 거짓이고 속임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이 하느님에 대한 불신감이 증폭했다. 예를 들자면, 이 하느님은 더 이상 전쟁에서 적들을 섬멸시키지 않는다. 하느님은 지진과 쓰나미와 폭풍과 홍수와 산불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느님은 불치병자들을 고치지 않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지 않으며, 더욱이 죄인들을 심판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선에 대해 보상을 내리는 한편 악에 대해 징벌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니체의 말대로 그런 하느님은 죽었다. 결국 하느님은 설득력과 효력과 능력을 잃고 무용지물이 되었다. 21세기 현대인들은 삼층 세계관의 유신론적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다. 제도적인 기독교 교회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모르고 단지 신자들에게 무작정 믿으라고 억지를 부린다. 따라서 교회는 유신론적 과거의 패러다임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신도들을 잃고 죽어가고 있다.

   

교회는 상업적이고 정치적으로 만든 이분법적 교리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는다. 물론 모든 부족적인 교리들은 성서 문자주의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성서 비평학의 등장으로 문자주의와 직역주의는 설득력과 신뢰를 잃고 생존의 공포에 빠졌다. 교회에서 두 손 높이 들고 열광적으로 부르는 찬송과 하늘을 향해 외치는 기도에서 사용하는 문자적인 이미지들과 생각들은 더 이상 신자들의 가슴을 울리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하느님이란 말 조차 허공을 치는 소리로 들린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경건한 표현들이 공허하게 되었다. 교회 안밖의 사람들은 그런 표현들을 아무 의미도 없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관심도 없다. 한 때 전통적인 신자들은 믿음체계에 순종하여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절대적인 존재라는 생각에 매달려 있었지만 이제는 눈과 귀가 열리고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러 그런 하느님을 떠나 보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때 예배했던 하느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자신들의 새로운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 의미있고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실업자가 된 과거의 하느님은 초자연적 인격체로서 때때로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세계 속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하느님이었다. 이 하느님은 웅장하며, 요란하며, 거창하며, 지극히 인간적인 일을 행사하는 대단히 인간적인 존재이다. 이 하느님은 유신론이라는 말로 정의된 하느님이다. 다시 말해, 유신론이란 이 세계 밖에 존재하는 인격적, 초자연적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다. 유신론자는 이 창조자 하느님의 객체적인 존재와 피조물인 인간 세계는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한편 하느님은 실제로 존재하는 독립적 개체 존재라고 믿는 유신론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규정한다. 마치 유신론자의 반대는 무신론자인 것처럼 표현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태초에 인간은 유신론과 하느님 보다 먼저 있었다. 또한 유신론과 하느님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유신론이란 유신론적 하느님을 믿는 것을 말한다. 유신론과 하느님은 인간의 욕구에서 나온 인간의 작품이다. 유신론은 유신론적 하느님에 대해 사람들이 만든 하나의 정의에 불과하다. 인간이 하느님을 상상 속에서 만들 때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며, 자신의 존재 너머의 것을 절대화하거나 개념화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제한적인 언어는 경험하는 것 이상을 상상하고 표현할 때에 직역적 또는 문자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은유와 시와 상징을 활용한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하느님에 관해 말할 때에 자신의 경험에서 자신과 비슷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상상했다. 예를 들자면, 고대의 종교적 경전들이 말하는 신의 계시(啓示)는 인간의 경험의 한계 안에서 이해되고 만들어진 지극히 개인적이고 부족적인 것이다. 오늘날 합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개인적인 신의 계시는 그것이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보편적으로 설득력이 없으며, 인류 전체에게 강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몰상식한 일이다. 다시 말해, 21세기 우주적인 과학시대에 부족적이고 개인적이고 사적인 초자연적인 신의 계시가 전체 인류를 통제하는 믿음과 신앙과 가치관과 세계관의 기초가 될 수 없다. 현대인들은  사적인 계시(Personal revelation)와 과학이 발견한 인류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공개적인 계시(Public revelation)를 분별하고, 다른 점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들이 숭배했던 신들은 단순히 인간처럼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분노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이분법적으로 행동했다. 예를 들자면, 기독교 구약성서에서 유대인의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증오했던 모든 사람들을 증오했다. 이처럼 고대의 신은 오늘도 부족적으로 편애하는 옹졸하고 변덕스러운 신이기 때문에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필요없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유럽 전체가 믿었던 기독교의 하느님은 17-19세기 동안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확장을 축복했을 뿐만아니라, 세계의 후진국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식민정책을 정당화했다. 이처럼 기독교 성서 아래 제3세계라 불리는 지역들의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와 정체성을 박탈당하고 강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되었을 뿐만아니라, 원주민들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기독교인들의 노예로 팔려가고, 피정복 국가들의 천연자원과 인력은 착취되어 유럽 기독교인들의 부를 증식시켰다.

 

역사적으로 적어도 지난 수세기 동안 기독교의 인격적인 하느님은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이고 잔인한 인간처럼 보이며 인간처럼 행동했다. 따라서 오늘날 하느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정의하는 것은 인류의 밝은 미래에 대단히 위험하다. 이 인격적인 하느님이 인류 사회를 탄압과 착취와 차별로 암흑과 같은 절망과 고통 속에 빠트렸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과거의 유신론적 하느님 개념을 아낌없이 떠나 보내야 한다. 물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과거의 패러다임을 포기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통찰력의 가능성을 신뢰해야 한다.

 

21세기에 유신론이 급격히 쇠퇴하고 죽어가는 현상은 태초에 인간이 자의식을 인식한 순간부터 하느님을 창조한 동기와  과정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인류 역사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구에서 하느님을 창조하고, 특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구에서 창조한 하느님에게 초월적인 속성들을 부여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죽는다는 한계를 넘어 서려고 하느님은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하느님은 무한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능력에 한계가 있지만, 하느님은 전능하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전지하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고 자연의 법칙에 구속되지만 하느님은 어디에나 편재하며 초자연적이라고 표현한다. 하느님은 땅의 세계와 분리되어 하늘 위에 사는 인간의 한계가 없는 인간이다. 이렇게 유신론적 하느님은 인간의 창작품이다.

 

유신론의 기원에 대해 원초적으로 하느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게 된 인간의 욕구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 생물종의 진화과정에서 자의식이 등장하면서 인류 역사 초기에 종교가 유신론적 관점에서 태어났다. 또한 하느님 개념도 유신론의 관점에서 발전되었다. 따라서 오늘 유신론의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이다. 유신론과 하느님은 분리된 때가 없었다. 인류 역사의 시작에서 하느님과 유신론이 긴밀하게 결합된 이유가 있다.

 

심리학의 대부 프로이드는 자신의 저서 <환상의 미래>(The Future of an Illusion)에서 유신론적 종교는 인간의 자의식의 충격 자의식적인 생존의 히스테리에 대응하기 위해서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프로이드는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등장한 이래 수십 억 년 동안 생물체들은 자신들의 생명의 의미와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질문할 충분한 지적 능력이 없었다. 생명체들은 단순히 살다가 죽는 끊임없는 패턴을 따르면서도 이것이 그들의 현실이나 운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내 자신을 인식하고 자의식을 갖고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에 충분한 두뇌를 지닌 인간 생물종이 등장했다. 프로이드자의식을 지닌 호모싸피엔스 인간의 출현은 역사 속에 죽음과 생존과 무의미에 대한 충격이 들어온 순간이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지구상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할 수 있고, 재난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으며, 자신의 운명이 결국은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 등장한 것이다. 죽음과 생존과 무의미를 인식하는 것은 두렵고 충격적인 깨달음이었으며, 이렇게 생사와 사물을 판단하는 이성은 인간 생물종의 정체성이다.

 

인간이 만든 유신론적 종교들의 첫 번째 교리는 인간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믿는다. 즉 태양, 더위, 추위, 바람, , 폭풍 등을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나타난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비인격적인 힘들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과 관계를 맺고 통제될 수 있기를 바랬다. 인간이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달랠 수도 있고, 타협할 수도 있고, 아부할 수 있기 위해 인격적인 특성을 부여했다. 즉 자연적 재해들은 이 세계 밖의 초자연적인 존재의 분노가 드러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 자연적 힘들은 모두 하느님이 존재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믿었다. 즉 그런 현상들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리는 당연한 상벌이나 경고로 생각했다. 따라서 하느님의 율법은 사회가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라고 믿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그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건한 예배도 인간이 재난과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첫 번째 방어선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원칙들을 위반한 사람들은 잘못을 고백하고, 다시는 잘못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또한 보상을 받기위해 희생 제물을 바쳐야만 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으로는 물론 공동체적으로 화를 면치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유신론적 종교 내부에는 인간이 자의식에서 인식한 두려움과 공포를 통제하기 위한 방어체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만든 종교 속에 그런 방어체제가 존속하는 것은 진리의 징후가 아니라 생존의 두려움과 공포의 징후이다. 따라서 종교 자체는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이 아니라, 인간 생존의 안전체계를 보장하는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수단이 되었으며, 유신론적 종교 내부에 강렬한 분노와 폭력이 존재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비합리적인 적대감과 증오는 공포와 히스테리의 한 증상이다. 분노와 폭력은 항상 유신론적 종교의 특징이며, 세속적인 세상에서 선포되는 사회정의와 자연환경보호와 여성평등과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금지시키고, 교리를 어기고 권위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이단자들을 추방하고 처형한다.

 

하느님에 대한 유신론적 정의 즉 하느님은 인격적이며, 초자연적이며, 인간적이며, 가부장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정의는 원초적으로 신적인 계시를 통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오늘날 이 유신론이 쇠퇴하고 죽어가고 있다. 유신론적 하느님은 할 일을 잃어버리고 실직상태이다. 이성적인 자의식의 인간은 과거에 자신의 욕구에 따라 하느님을 창조했지만, 이제 이 하느님을 폐기처분해야만 하는 단계까지 진화되었다. 유신론은 더 이상 설득력과 효력이 없는 고물이 되었다. 이 하느님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가 죽었기 때문에 니체의 말대로 확실히 신은 죽었다.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과학이 발견한 공개적 계시(Public Revelation)에 기초한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가 필요하다. 유신론 없이도 하느님의 의미는 가능하다. 유신론자가 되지 않아도 기독교인은 가능하다. 유신론적 하느님 없이도 종교는 가능하다. 더 이상 하느님이 누군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이제는 하느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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