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동창회 50] 왜 교회가 예수를 솔직하게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가 그토록 힘이 드는가?

by 최성철 posted Jan 24, 2020 Views 1667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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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으로 예수교회를 원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 땅 위에 긴급하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자고 외쳤으며, 그 정신을 가르치고 몸소 살아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가 그렇게도 반대했던 이분법적 신학제도적인 교회를 만들었으며, 심지어 참 사람 예수를 성상의 자리에 앉히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으로 숭배했다. 따라서 예수의 기독교가 아니라 교회의 기독교가 탄생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를 솔직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일이 왜 그토록 힘이 드는가? 거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첫째는, 교회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중보종교 체계로 발전해왔으며, 상업적이고 정치적으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려왔기 때문에 이것을 버리기가 너무 힘들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종류의 상업적인 종교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반대했다. 따라서 교회는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받아들이기 보다 교리적인 가짜 예수를 만들어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통제하고 착취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했다. (2) 둘째는, 예수가 가르치고 살았던 비전은 지금 여기에 긴급하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신앙은 지극히 현세적이고 세속적이었다. 예수는 성전종교가 강요했던 내세적인 하느님 나라를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시녀가 된 교회 기독교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죽음 후의 다른 세계로 연기시켰다. 따라서 교회는 현세적인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내세의 형이상학적천국망상에 빠졌다.    

 

역사적 예수는 제도적이고 조직화된 중보종교의 성전과 회당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가 그렇게도 반대했던 중보종교의 믿음체계를 신봉했다. 즉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라는 중개인을 세우고, 구속론을 창작했다. 오늘날 중보종교에 정신병적으로 심하게 세뇌된 신자들(believers)은 그 종교로부터 결별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을 알 수도 없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계가 멸망하기를 기다리면서 예수의 재림과 죽음 후의 천국에 대한 헛된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여기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세계종말과 최후심판과 하늘 위의 천국을 기다리는 내세적인 믿음종교의식을 하느님 나라로 착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이분법적인 성전신학종말을 선포했으며, 우주적이고 통합적신학으로 성전과 싸웠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매우 강렬하고,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꼭두각시처럼 수동적이기 보다 자율적으로 살아갈 것과 성전과 성직자의 중개없이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하느님 나라를 죽음 후까지 장기적으로 기다리기 보다 당장 지금 여기에 도래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자신이 몸소 살아냈다.

 

예수의 세계관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들은 평등하고 소중하며, 가치는 바로 지금(Now) 이 순간에 인식되고, 포착되고, 실천되고, 확인되어야 한다. 예수의 지금(Now)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것이다. 예수는 극단적으로 단기적이었으며, 장기적인 세상종말과 죽음 후의 내세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했다. 기독교인들이 진심으로 예수를 따른다면 그 지금(Now)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지금(Now)을 위해 결단하고, 온 마음으로 자신을 지금(Now)에 헌신함으로써 지금(Now)을 포착하면 죽음의 두려움 없이 더욱 행복하게 의미있게 살 수 있다. 영원함지금(Now) 속에 있다. 영원함은 오늘의 삶 속에 있다. 영원함은 죽음 후 내세에 있다는 교회의 주장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상업적인 얄팍한 술책에 불과하다.   

 

예수의 기독교역사적이다. 즉 예수는 종교문화를 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의 기독교는 사람들을 역사 밖으로 끌어내어 역사로부터 분리시킨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들을 예배의식이라는 백일몽 속으로 빠트린다. 예수의 종교의식은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지금 순간, 곧 그 안에서 자아가 그 자신을 헌신함으로써 그 자신이 되는 지금 순간에 강력하게 헌신하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어떻게 종교적 행위가 완전히 이 세상적이며 역사적인 행동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세상과 역사로부터 분리된 교회의 행동개념과 의식개념은 사람들을 어디에로도 인도하지 못하며 그 무엇도 달성하지 못하기에 결코 인간적인 행동이 아니다. 더욱이 예수의 하느님의 뜻도 아니다.

 

, 어떻게 교회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에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으며, 역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형이상학적인 세계 속으로 실종되었는가? 그 대답은 교회 기독교가 발전시키고 거기에 노예가 된 유혹-타락--회개-구원이라는 구속론의 공식 속에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는 역사에 대해 잘못 생각하기를, 역사라는 것이 인간의 수고와 노력에 의한 이야기가 아니라, 단순히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의한 이야기로 착각한다. 하느님이 유일한 역사적 주체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결정적인 중심에 있는 유일한 인간의 행위아담의 불순종이며, 그 정반대에 십자가를 스스로 졌다는 예수의 순종이다. 교회 기독교가 상업적으로 만든 망상의 하느님138억 년 전 우주가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미리 계획한대로 우주세계를 창조했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을 완성품으로 만들었고, 모든 사건들을 미리 예정했다. 따라서 교회는 21세기 현대 과학이 밝히는 공개적인 계시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식하여 우주의 역사진화과정불확실성을 부인한다. 그리고 교회는 인간의 공동 산물로서의 역사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며, 인간은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어떤 변화도 이루어내지 못한다고 인간의 존엄성인 창조성과 자율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하찮은 것으로 폄하한다. 교회는 역사로부터 물러나서, 단순히 예수의 재림최후심판으로 이 세계를 버리고 다른 세계로 이주해 갈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연중 교회력의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등을 성대하게 지키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이유는 역사의 주체인간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교회 내부에서는 아무도 이 모든 것을 도대체 무엇을 위해 하는지 이성적으로 감히 묻지 않는다. 교회는 우주세계의 진화역사를 문자적인 성서와 초자연적인 유신론적 하느님 신학의 맞춤형으로 변형시키는 몰상식한 믿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마치 마약에 중독된 혼미한 상태에 빠졌다.

 

어떻게 교회 기독교예수의 정신에 정반대가 되었는가? 예수 믿음구원에 대한 교리적 신학을 전혀 만들지 않았다. 예수는 평범한 교사였으며 거창하고 복잡한 구원사의 전통보다는 유대인들의 지혜 전통에 더 친숙했다. 예수는 장황한 이야기꾼이 아니었다. 예수는 기독교인들이 역사로부터 사라지고 교회 안으로 숨어들어가서 매년 그들의 삶을 거대하고 복잡한 구원론의 신화라는 쳇바퀴를 따라 도는 데 소모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에 예수는 기독교인들이 순간을 위해 깨어 있고, 만물이 변화하는 순간들을 적극적으로 포착하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인간적인 도덕적 결단구체적인 실천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다시 말해 예수믿음에 대해 전혀 가르치지 않았으며, 오직 실천적인 에 대해 가르치고 자신이 몸소 살았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당신 스스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 예배자가 되라고 위협하고 강요한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기도는 항상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대로 달라는 주문과 자신들은 연약하고,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라는 위선적인 거짓말로 가득하다. 예수는 이런 무당집의 기도를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는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율적인 삶의 방식, 하느님 없이도 변화시킬 수 있는 창조적인 삶, 초자연적인 힘의 도움 없이 참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덕적인 삶,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에 대해 가르쳤다.   

 

교회는 자신을 넘어서서 예수가 선포한 지금 여기의 하느님 나라를 추구해야 한다. 예수의 개혁은 지극히 도덕적이며 매우 적극적이고 정치적으로 혁명적이었다. 예수의 교회는 세계의 역사와 분리되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교회는 종교개혁사회개혁의 선구자가 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참된 신앙과 삶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