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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동창회 29] 믿음이 정직성을 훼손할 수 없고, 부정직을 합리화할 수 없다!

by 최성철 posted Aug 16, 2019 Views 55 Replies 0

 

종교와 신학과 신앙과 믿음의 최우선적인 책임과 의무는 정직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의 믿음체계는 하느님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의 정직성 양심 이성을 무참하게 파괴하고, 부정직부도덕을 합리화했다. 따라서 인간의 정직성이 훼손되면서 개인과 가정과 사회가 부도덕해지고, 전쟁과 테러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이 폄하되고, 인종차별,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낙태금지, 동성애 혐오가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지식이 확장되면서, 인간의 정직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고대의 세계관과 과거의 패러다임에 정지된 교회를 떠나고, 세계적으로 유신론이 죽었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와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양심정직성을 팔아 먹고, 상업적인 거짓말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장사하는 교회들이 남아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무지함으로 인간의 정직성과 존엄성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채 믿음체계에 수동적으로 맹종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과 함께 부정직한 교회는 절벽 끝에 선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오늘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이 솔직하게 인식해야 할 인간의 정직성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역사에서 인간의 정직성이 어떻게 무시되고 박탈되었나? 왜 인간의 정직성이 믿음 보다 더 소중한가?

 

인간의 정직성이성적인 분별력양심이다. 정직성은 인류의 밝은 미래와 생존의 핵심이다. 교회 기독교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강요했던 믿음이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단지 믿음체계가 만든 신조 교리를 입술로 인정하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다. 교회는 교리적인 믿음이 인간의 정직성을 통제하고 조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고대 성서신조들이 기록될 때의 세계관21세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고대의 삼층 세계관은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는 대단히 부적절하다. 실례를 들자면, 믿음체계의 핵심적인 신조는 사도신경이다.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이 신조를 문자적으로 믿고, 철저하게 암송하고 예배에서 중언부언 고백한다. 사도신경 서두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말은 유신론적 하느님의 세계관에 맞도록 표현된 것이다. 그런 신조들(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이 만들어진 3-4세기 당시에 사람들이 세계를 파악했던 패러다임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문명과학이 발달하고 지식이 확장됨으로써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의 현대인들은 고대의 신조들이 표현하는 하느님의 문자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더 이상 전통적인 종교적 이해로는 살아가는 힘과 희망과 기쁨이 되지 못한다. 또한 교회 안밖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기독교인이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원한다.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해 정직성과 양심과 상식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한다. 양심과 정직성을 팔아먹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직하게 부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수동적으로 다른 사람이 말하는대로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는 중고품 신앙을 거부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믿음체계의 교회는 교인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인 존엄성을 잃지 않은 참된 인간이 되도록 격려하지 않는다.    

 

삼층 세계관의 제도적인 기독교질문을 겁내고, 자유를 겁내고, 과학적인 지식을 겁내고, 자율적인 깨달음을 겁내고 있다. 교회 기독교 현대인들이 더 이상 살지 않는 고대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신조들을 자신의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인 교리를 보호하는 선전문구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성적이고 창의적인 사상가들을 비판하고 변두리로 몰아내고 심지어 교회에서 추방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의미인간의 제한적이고 문자적인 언어로 왜곡했다. 더욱이 기독교인들은 고대의 문자적인 성서가 하느님의 법전이라는 부정직한 가르침에 세뇌되었다. 그들은 오늘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떠나 보내지 못하고 있다. 하느님의 의미를 시대에 뒤떨어진 문화적 정의에 감금하고 있다. 여기에서 아버지라는 말은 특별히 인간의 언어이며, 남성 우월적이며, 가부장적인 낡은 단어이다. 하느님이 남성이라는 생각, 즉 수천 년 동안 종교제도들이 여성들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한 개념을 여전히 외치고 있다. 교회는 오늘 남녀평등의 시대에 크게 모순된 믿음에 빠져있으며, 정직성 양심 이성이 결여된 부정직한 집단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의 본성을 전지전능한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부정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하느님이 지금까지 한 일이 없으며 아마도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작정했음에 틀림없다. 만일에 하느님이 전지전능하다면 온 인류가 한 사람도 예외없이 공평하게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76억 인구가 사는 지구촌에서 빈곤과 질병과 전쟁과 테러로 인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부유층들은 값비싼 의약품과 보조영양제들로 건강하게 잘 먹고 호화롭게 살고 있다. 이 하느님은 제한적이고 부족적인 존재이며, 인류를 공평하게 돌보지 않고 있으며, 사람들의 불행을 기뻐하는 존재이며, 아니면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죽었다. 하느님이 전지전능하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오히려 하느님은 이분법적이고, 편협하고, 진노하고 심판하고 징벌하는 옹졸한 하느님이라는 말이 정직하다. 영국의 신학자 존 로빈슨은 자신의 저서 <하느님에게 솔직히>(Honest to God)에서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하느님 이미지를 버려야 한다고 도전했다.

 

성서는 고대에 하느님의 행동방식을 기록한 것이며 이것은 21세기 현대인들의 지식과 감각 모두에 어긋난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성서의 많은 전제들은 오늘날 대단히 잘못된 생각들로 치부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질병은 죄에 대한 처벌의 결과로 발병한 것이 아니다. 또한 질병이 완쾌되는 것 역시 하느님의 간섭을 요청한 우리의 기도 때문도 아니며, 우리가 충분히 벌을 받았기 때문에 질병이라는 처벌이 그만 끝나도 되는 이유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의학에서 바이러스, 박테리아, 백혈병, 종양 등을 다룬다. 교회의 신조들에서 전능하사라고 불리는 하느님은 우리 시대에는 우리의 질병이나 치료와 거의 무관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능한 하느님에게 호소하여 바이러스, 세균, 백혈병, 종양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의약, 화학요법, 수술로 싸운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하느님의 전능한 힘에만 호소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위선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조들이 기록된 세계의 현실 인식과 21세기의 세계의 현실 인식 사이의 커다란 변화 가운데 단지 하나일 뿐이다.

 

신약성서에서 간질병정신병에 대해 예수는 그것들이 귀신에 사로잡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오늘날 주류 사회에서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 정직성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고대 성서의 제한된 이해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만든다. 오늘날 어느 의사도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여 치료하지 않는다.

 

믿음체계의 교회는 새로운 의학 기술들이 발달하면서 과학하느님의 능력을 축소시키고, 질병을 통해 인간의 죄를 처벌함으로써 인생을 통제하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난 수세기 동안 진화론과 지질학과 생물학과 유전자공학과 뇌과학과 양자물리학과 천체학과 컴퓨터과학 등의 현대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현대인들은 우주와 지구와 인간과 생명과 자연에 대해 새로운 가치관세계관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고대의 세계관 가치관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과거에는 인간의 질병에 대해 하느님의 행위라고 믿었지만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태풍, 홍수, 가뭄, 지진, 쓰나미 등의 천연 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현대 과학은 이런 자연 현상들을 효율적으로 예측하며 전혀 하느님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도 설명해낸다. 과거에 하느님에게 속한 것으로 믿었던 전능한 힘은 더 이상 이런 재난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영국의 성서학자 마이클 굴더(Michael Goulder)가 신학자 존 힉(John Hick)과 공저한 책 <왜 하느님을 믿나?>(Why Believe in God)에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은 더 이상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교회에서 하느님을 천지를 만든 창조주라고 부르지만, 방사성 동위원소를 통해 측정한 지구의 나이는 거의 정확하게 45- 50억 년이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이 세상이 6천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이런 성서적 계산은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지질학적 기간의 1천만 분의 1%에 불과하다. 오늘날 인간이 창조과정의 목적 또는 목표라는 것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와 확신은 없다. 기독교인들은 단지 교회가 만든 신조를 부정직하게 믿을뿐이다. 138억 년 전 우주의 출현은 우연적이고 자연적이었다. 우주에 속한 은하계와 지구와 인간과 생명체들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인들이 창조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성서를 기록한 고대인들의 사상과는 매우 다르다. 따라서 우주의 기원에 대해 생각할 때 성서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부정직한 행위이다.

 

또한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났다는 성서구절을 문자적으로 믿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이런 성서구절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이것은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생물학적 지식에 위배되며 거짓으로 믿는 체하는 정직하지 못한 행위가 된다. 성서의 처녀 출생 이야기는 1724난세포의 발견으로 인해 생물학적 사실로는 완전히 부정직한 것이 되었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의 정자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 믿음이 인간의 정직성을 훼손시킬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사실인 것처럼 가르쳐왔다. 오늘날 문명과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지식이 확장되면서 그런 성서구절들이 객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당치 않을 뿐만아니라 정직하지 않은 거짓과 은페에 불과하다. 믿음은 이성적이고, 양심적으로 정직해야 한다.

 

예수의 처녀 출생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문자적으로 하늘 위로 승천했다는 성서 기록 역시 현대인의 발전된 지식으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다시 하늘로 돌아갔다는 성서 이야기는 창공이 하느님의 거처이며 그것이 저 높은 하늘 위에있다는 삼층 세계관에 근거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우주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문자적인 승천이란 가당치 않다. 따라서 위로 올라가고 아래로 내려온다는 성서 기록은 오늘날과 같은 우주시대에는 정직하지 못한 거짓말이다. 기독교인들은 정말 정직한 사람이 되기 원하는가?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기 위해 부정직하게 무작정 믿는 맹신자가  되기 원하는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세계에 문자적인 천국과 지옥과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은 없다. 교회가 만든 신조들과 교리들의 언어다른 시대의 산물이다. 그 표현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상상이다. 우리는 현대 세계에서 물러날 수 없다. 고대의 삼층 세계관의 세계로 돌아가서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현대 세계의 통찰력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닫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1세기에 사는 척 할 수 없다. 교회 안에서는 1세기에 살고, 교회 밖에서는 21세기에 사는 부정직한 위선을 하루도 살 수 없다. 우리는 과거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을 해석하는데 사용된 언어들 즉 더 이상 우리의 이해를 밝혀주지 못하는 그 언어들을 진짜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짓과 가식의 부정직한 행위를 계속할 수 없다. 우리의 언어는 교회의 안과 밖의 경계 넘어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는 종교적인 언어와 세속적인 세상의 언어로 분리될 수 없다.

참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때는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때뿐이다. 예수가 성전 지도자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경고한 말을 잊어서는 안된다. 불행하게도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정신적 무뇌() 상태에 빠져 있다. 정직한 기독교인은 진리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갈등하고 질문하고 탐구하는 사람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고대의 시민이 될 수 없으며, 다만 21세기의 시민이다. 기독교 성서와 신조들은 고대에 하늘에서 완성품으로 이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를 위해 우리의 언어 우리의 세계에 적합한 개념으로 인간과 생명의 의미 그리고 하느님의 의미와 경험을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미래는 고대의 표현들을 계속해서 문자적으로 주장하는 데 있지 않다. 시대가 바뀌면서 신앙도 매 시대마다 새롭게 재구성하여 그 시대의 지식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 신앙과 신조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될 수 없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고대 성서를 오늘의 언어로 전환함으로써 궁극적인 진리를 훼손시키지 않고,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민으로서의 정직성도 상실하지 않을 수 있다. 기독교의 미래와 그 형태는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기독교 형태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기독교인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잃어버린 정직성을 되찾아야 한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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