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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삶을 삶답게 | 김희헌 | 2020-07-05

by 김희헌 posted Jul 05, 2020 Views 8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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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7-05

삶을 삶답게 (24:34-67, 7:15-25a, 11:16-19, 25-30)

2020.07.05. 성령강림절 여섯째 주일

 

[차별중독사회]

지난 월요일,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었습니다. 이제라도 다시 발의되었으니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1948년에 제정된 <세계인권선언>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70여 년이 지나도록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가치를 제도화하지 못한 채 온갖 사회적 차별을 묵인해왔습니다. 2007년에 처음 차별금지법이 발의될 때에도 그랬고, 2011년부터 3년 동안 해마다 보수개신교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다행스럽게도, 그사이에 시민의식이 성장했습니다. 올해 4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성인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차별이 심각하다고 대답한 응답자가 82%에 이르렀고,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하는 사람은 88%에 달했습니다. (2013, 찬성 60%) 성 소수자도 존중받고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물음에는 74%가 동의했습니다. (“차별금지법 발의 임박보수 교계는 허위 정보 타령,” 뉴스앤조이, 2020.6.26.)

이번에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을 읽어보았습니다. 4, 57조로 구성된 내용을 읽어가다가, 저 자신의 사회적 차별에 대한 인식이 충분하지 못함을 느끼며 반성했습니다. 3조에서 차별 금지의 범위로 열거된 항목은 23가지입니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 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사라진 전과,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 신분.”

이걸 듣고,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이걸 다 지켜?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를 옭아맨 차별의 그물이 매우 촘촘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적응과정을 갖다 보면, 우리 사회는 차별의 덫에서 풀려나 훨씬 더 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낡은 율법에 갇힌 사람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합니다. 그들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도덕이 무너지고, 종교의 자유가 억압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차별금지법은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을 억압하는 법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얼마 전, ‘한교총이라는 단체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개신교를 대표한다고 모인 이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차별과 혐오를 옹호합니다. 혐오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혐오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혐오를 표현할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우리 사회는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거대한 국가적 대결 구도 속에서 갈등하며 살아왔습니다. 적으로 간주한 사람을 학살하고, 위험하다고 여겨진 사람을 억압하는 일을 당연시했습니다. 정통성을 갖지 못한 지배층은 증오를 장려했고, 서로의 차이를 차별하도록 몰아붙였습니다. 정치만이 아니라 문화와 도덕도 차별에 중독되었고, 종교마저도 그렇게 물들었습니다.

이렇게 차별에 중독된 우리 사회를 소생시키는 데 차별금지법은 좋은 안내자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결과 차별을 위해 쏟아부었던 수많은 의미가 실상은 중독된 삶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더 자연스럽고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삶의 기쁨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삶을 삶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을 채우는 것들 / 창세기 2434-67]

오늘 제1성서의 본문인 창세기 24장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자신의 늙은 종을 고향으로 보낸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말년에 있던 작은 행복을 그린 이 이야기를 역사비평의 칼로 해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인생사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을 법한 일에서 생겨난 크고 작은 기쁨들을 먼저 찾아보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고비의 순간을 예상치 못한 기쁨의 사건으로 이어서 그려갑니다. 처음에는 주인과의 약속을 성실히 지켜가는 늙은 종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지친 나그네와 그의 가축에 대한 리브가의 환대, 그리고 우물가에서 나눈 격의 없는 대화, 너그러운 만남과 집으로의 초대, 좋은 인연과 교감, 떠나는 딸에 대한 축복의 환송, 미래를 향한 리브가의 모험, 설렘과 기대 속에 만난 연인, 사랑과 위로 속에 열리는 미래, 이런 장면들에는 삶을 삶답게 만들어주는 언어가 있습니다. 신뢰, 환대, 인연, 너그러움, 교감, 초대, 축복, 모험, 설렘, 기대, 사랑, 위로, 미래를 여는 암시들이 그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주인과의 약속에 대한 종의 성실함을 대가를 바란 욕망으로 읽거나, 이방인에 대한 리브가의 환대를 낯선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꿔 읽고, 딸을 보내기로 한 가족들의 결정을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가정 폭력으로 이해하며, 가족을 떠나는 리브가의 모험을 자신을 판 부모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야기는 온통 잿빛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비틀어서 읽다 보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와 겹쳐 보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며 열렬히 진행했던 삶들이 오히려 기쁨과 행복에서 얼마나 멀어진 것인지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분투하며 사는 이유는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을 한 번 해보지요. 만일, 지금이 우리가 바랐던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이라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에 관한 일화는 무엇이 본질적인 삶인지를 일깨워줍니다. 단순한 삶을 추구한 디오게네스가 늘 하듯이 통 속에서 햇볕을 즐기고 있을 때,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서 그를 돕겠다며 무엇이 필요한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다만 거기서 햇볕을 가리지 말고 옆으로 비켜주실 수 있냐고 응수했다 합니다. 통상적인 삶의 기준을 뒤집는 절묘한 이야기입니다.

삶을 풍요롭게 해보려고 우리는 의미로 가득한 시간을 욕망합니다. 그런데,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의미를 양산하지만, 만들어진 수많은 의미가 도리어 삶을 지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삶은 의미에 중독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다가, 자연스러운 삶을 어긋 내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동양의 정신에서 최고의 의미는 자연스러움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고자, 이 이야기를 덤덤히 지나가면서, 인간사를 채우는 기쁨의 언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어긋난 삶에 관한 성찰 / 로마서 715-25a]

로마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며 발견한 사실을 전합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인간 삶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성찰처럼 여겨집니다. 그가 본 것은 어긋난 삶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지성의 부족이나 의지의 결핍 탓이 아닙니다. 율법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를수록, 도리어 죄의 굴레와 속박 속으로 빠져드는 삶의 어긋남에 관한 경험이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죄에 관한 정보를 정확히 알려주는 선한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의 질서를 극복할 수 있는 변화를 끌어내지 못합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사람들의 상식을 깨뜨립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만일 모든 사람이 법대로 살면 이 세상은 평화로운 곳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울은 그런 생각을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대신 바울은 자신의 관찰에서 하나의 법칙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고자 하지만, 도리어 죄에 빠지고 있는 역설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여기서 삶의 비참을 경험하고, 그 사망의 질서에서 구원받는 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행동하지 않는 신앙이 신앙인가를 묻곤 합니다. 그것은 야고보서의 주제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믿음이 없이 과연 행위라는 것이 가능합니까?’ 하고 말입니다. 율법에 갇혀 어긋나버린 삶이, 믿음 없이, 과연 그 율법의 차별과 배제를 이겨내고, 삶을 삶답게 만들어가는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에 의하면,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의 세계를 믿음으로 뛰어넘는 것입니다. 율법의 세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사람이 등장하지 않으면, 세상은 율법의 계명들이 죄의 질서를 구축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종교는 인식의 불균형에 빠집니다. 죄를 과도하게 부풀려서 이 세상을 저주하거나, 과도하게 줄여서 관념적인 교만에 물들게 됩니다.

향린에서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오늘은 저에게 향린에서 3년이 지난 첫 주일이 됩니다. 교회에 부임한 날, 저는 리브가와 같은 설렘과 기대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독특한 허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길을 잃은 사랑과 넘쳐난 의미가 삶을 어긋 내는 경험도 있었습니다.

왜 우리가 가진 사랑과 성실은 우리 삶을 어긋 내고 말았을까? 지성의 부족도 의지의 결핍도 아니었는데, 왜 우리 향린은 어긋난 길을 걸었을까? 바울의 성찰과 고백을 생각해봅니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에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7:22-23) 이 고백은 바울만의 것이 아니라, 분단체제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됩니다.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24) 바울의 이 탄식 역시, 전쟁이 남긴 갈등과 증오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 사회의 탄식이요, 바로 우리들의 탄식이 됩니다.

 

[편하고 가벼운 단순한 삶 / 마태복음 1116-19, 25-30]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긋난 세대를 보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은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11:16-17)

어긋난 세대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의미와 비판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거꾸로,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광야의 예언자 요한에게는 메뚜기와 석청만 먹는다고 저 사람 미쳤다고 말하며, 민중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는 사람을 향해서는 먹보요, 술보요, 죄인의 친구라고 손가락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먹보와 술보인 예수가 싫다면 그렇지 않은 요한을 칭찬해야 하고, 반대로 광야에서 사는 요한이 못마땅하다면 예수를 옹호해야 할 텐데, 어긋난 세대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의미에 중독되어 차별과 혐오를 지어냅니다.

예수님이 내린 해법은 단순한 삶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 드러나는 진실입니다.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초대의 목소리입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11:28-30)

무엇이 편하고 가벼운 삶일까요? 무엇이 우리가 무거운 짐을 내리고 예수와 함께 쉴 수 있도록 해 줄까요? 말하기는 쉽지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삶은 단순히 비어 있는 삶이 아니라, 균형감을 가진 삶이기 때문입니다.

라이몬 파니카라고 하는 신학자는 균형감을 가진 생명력 있는 삶의 경험을 가리켜 cosmotheandric experience라고 말합니다. 우주(cosmos)와 신(theos)과 인간(anthropos)에 대한 경험,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은 삶을 의미합니다. 균형감을 이룰수록 그 모습은 단순합니다. 종교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대한 책임, 신을 향한 겸손, 자신에 성찰이 혼연일체를 이룰 때,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참된 길을 걷는 종교라고 할 것입니다.

코로나의 시대가 종료되기는 멀었고, 삶의 불안정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기까지 세상은 요란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를 앞서가시니, 차별과 증오는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기쁨을 얻을 때까지, 주안에서 모두 평화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예상할 수 없는 위기의 시간을 기쁨의 순간으로 바꾸는 삶이 있습니다. 차별과 증오에서 풀려난 삶, 하나님과 세계와 자신 앞에 겸손한 삶입니다. 어긋난 세대를 향한 예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삶을 삶답게 살아내는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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