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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낯선 당신이 우리에게 왔다"ㅣ김정원ㅣ2021-08-29

by 나비정원 posted Aug 29, 2021 Views 15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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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8-29

< 낯선 당신이 우리에게 왔다>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은 낯선 당신이 우리에게 왔다입니다. 설교 제목으로는 다소 낯선 느낌이지요? 저는 오늘 다소 미학적 하늘뜻펴기를 준비하였는데요, 그간 그림, 시 등을 소개하며 그것들을 성서와 씨줄과 날줄을 엮듯 같이 뜨개질해나갔었는데요. 오늘도 미학적 재료들을 도구 삼아 말씀을 지어나가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서를 읽었습니다. 야고보서의 큰 주제 중 하나가 율법과 자유그리고 신앙과 행위가 있는데, 오늘 본문은 이 주제들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율법을 잘 따라 행동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자유케 하는 율법이라 합니다.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율법은 보통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는데요. 율법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을 강조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바울에게 율법은 자유와 철저하게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요. 그런데 오늘 야고보는 그냥 율법이 아닌, ‘자유를 주는 율법이라 말합니다.

 

야고보는, 율법이 우리 인간에게 심겨져서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이때 그가 말한 율법은 구약의 종교적 계명도, 도덕적 계명도, 십계명도 아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러한 율법만을 강조하며 객관적인 표준치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배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율법은 객관적 지표라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뜻으로 규정합니다. 이 뜻을 실천하게 될 때 비로소 자유함을 얻는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 야고보는 실천을 강조하며 율법을 우리 삶에 재소환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머무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요. 그것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것은 마치 영혼이 없는 몸과 같다고 말하며,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됨을 재차 전하고 있습니다. (행함, 곧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다 보니,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더라구요. 우리 학교 윤리학 교수님이셨는데, 어찌나 말을 거칠게 하고, 술은 또 얼마나 자주 드시던지 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분의 명성은 자자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똘똘하게 보셨던지 유달리 저에게는 참 자상하게 대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되셨지만 이 이야기를 소개하여도 실례가 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 교수님 와이프는 늘 cbscts에서 나오는 설교를 들으셨다고 해요. 급진적인 신앙을 가졌던 그가 그 소리가 너무 듣기가 싫어서, 티브이 좀 끄라고 소리를 질렀다 합니다. 그랬더니 와이프 되시는 장로님께서 니가 목사냐? 그럼 난 하나님이다라고 대꾸하셨다고 해요. 그만큼 행함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겠지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야고보는 오늘 본문 24절에서 강조하듯, 단순히 은혜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지 않으며 실천을 통해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의 주장이 바울의 것과는 다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바울은 할례를 받은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차별과 배제를 당하던 이방인들의 삶의 정황 속에서 활동하였기에, 바울의 것과는 또 다른 자리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야고보는 바울사상의 본 뜻이 퇴색되어, 그저 믿음이면 다 된다는 사람들에게, 혹은 은혜만을 찾던 사람들에게 외쳤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이게 되어버린 교인들에게, 즉 어떠한 행함도 없는 교회의 현실이 몹시 안타까워 야고보는 외쳤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가 이르는 실천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빨리 듣고, 말하기와 노하기는 느리게 하기가 그것입니다.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보다 호소력 있게 옮겨놓았습니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또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마십시오.” 이 권면은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생활규율입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옆 사람, 우리 공동체 속 사람들, 이웃의 이야기를 빨리 들어야 함을 말합니다. 조금 더 말을 삼가고, 내 안의 화를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 말을 불의한 것에 대해 눈감아 주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교우들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야고보는 이 권면 뒤에 화를 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룰 수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웃과의 연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일진데, 화를 냄으로써 공동체가 깨지게 되면,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 사람을 비유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야고보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거울에 비친 얼굴을 잠깐 보고서는 곧 돌아서서 그것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가 흥미로워 주석을 찾아가며 곱씹어 보았습니다.

 

거울은 보통 문학에서, reflection, 즉 반성과 성찰의 의미를 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24)의 얼굴은 문자 그대로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 자신’, 본성, 성격, 기질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 두 의미를 모아보니, 이 비유는 실천의 부재를 반성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고이자, 자신의 타고난 성격과 기질을 다스리지 못한 것에 대한 꾸짖음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결국, 야고보가 말하는 자유를 주는 율법이란, 끊임없이 자기의 성격과 기질을 어르고 타이르고 성찰함으로써, ‘자기’, ‘’, ‘자기 이기주의로부터의 해방되는 것이기에 자유를 주는 율법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쯤 되면, ‘이것은 클리셰가 아니냐? 뭐가 이렇게 뻔해?’라고 말하는 교우분들도 있을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토록 진부한 권면을 실천하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다른 의견을 말할 때, 화내기를 더디하며 경청하기가 사실 쉽지 않음을 우리가 인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일상 속에서 타인에게 자주 상처를 주고, 또 받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저는 야고보가 전하는 말씀을 남북관계나 노동해방, 반자본주의와 같은 큰 담론에 묶어두고 싶지가 않습니다. 되레 우리의 삶, 우리 공동체, 우리 교회 속에서 풀어내고 싶습니다. 언급했듯, ‘잘 듣고, 말은 더디하고,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을 것’, 이 율법이 생활밀착형인 듯 구체적인 만큼, 그리고 공동체가 지킬 규율로 선포된 만큼, 우리네 속에서 풀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자리를 마가복음으로 옮겨볼까요? 오늘 복음서에는 우리에게 언제나 반면교사가 되어주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가 등장합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누군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두드러지게 드러냈을 때 쓰는 표현이 있는데요. 요즘 가장 핫한, 배구의 신이라 불리는 김연경 선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김연경이 강스파이크를 때려 아주 멋지게 득점을 했을 때, “~ 김연경이 김연경했네라고 말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씻지 않은 더러운 손으로 빵을 먹는 제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부정하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 바리새인이 바리새인했네~” , 오늘도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는 규례를 지키지 않는 제자들을 빌미로 예수께 따져 묻고 있습니다. 예수 역시 늘 그러했듯, 그들의 위선과 교만을 지적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와 제자들이 왜 그리 싫고, 왜 그리도 미웠을까요? 그들이 가진 폭력성은 이분법적 배타성을 근간으로 합니다. 배타성은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어떤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는 생각이 같아. 너랑 나랑은 이것에 동의해,

여기 모인 우리는 누구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우리는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동일한 지향과 목표를 가지고 있어,

우리는 저들이 모르는 것을 이미 알고 경험한 사람들이야

 

이러한 생각이 동질성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 동질성을 계속 유지하다보면, 이질적인 것, 다른 것들은 동질집단의 정체성을 깨뜨릴 수 있는 위협적인 요소로 여기게 됩니다. 이때 미움과 혐오의 감정이 작동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와 다른 성질의 것들은 비정상적이거나 혹은 빌런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저 집단은, 저 사람은 배제해도 되고, 심판해도 된다라고 하는 정당성이 성립되기도 합니다(김상덕). 이는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마음 한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우리 스스로가 거울을 보고 깊이 살피지 않으면 그 심판에 가담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잠깐 작품 하나를 보실까요? (뒤샹, )

마르셀 뒤샹의 이라는 작품입니다. 1917년 뒤샹은 뉴욕의 철공소에서 이 소변기 하나를 사가지고 온 뒤, 전시회에 작품으로 제출하였습니다. 작가협회 회원들은 소변기 하나가 과연 작품이 될 수 있는지를 토론하다, 결국 전시회에 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모더니즘 페인팅은 순수한 것을 추구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미술하면 딱 떠올려지는, 기술적으로 잘 그려진 그림 혹은 극적으로 표현된 추상화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예술의 내부에서만 찾던 때였는데, 뒤샹의 관심은 같은 것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내부가 아닌, 세속적이고 순수하지 않은 외부에 속해 있었습니다. 모더니즘을 지향하고 형식주의자였던 20세기의 저명한 비평가 그린버그에게 뒤샹의 작품은 아주 이질적이고 비정상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뒤샹의 작품이 한낱 장난에 불과한 것이라 평하며, 뒤샹이 모더니즘의 순수한 형식을 타락시켰고, 자신이 주장하던 추상표현주의 미학에 적대적인 것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술이론가인 아멜리아 존스는 뒤샹을 고급 미술과 대중문화를 분리시키는 엘리트주의 제도를 전복하는 대중주의 미술 공예가이다라고 평합니다. 실제로 뒤샹은 미술 작품을 작가 자신이나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작품을 보는 모든이들에게 작품의 해석 권한을 넘겨주었습니다. 뒤샹은 소변기처럼 이미 만들어진 사물을 제시함으로써, 일상의 사물 또한 미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대중주의적인 입장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결국 다시 사물에 미적 의미를 부여하는 미술가의 절대적인 힘을 재확인하게 된다는 평도 있지만, 여하튼 뒤샹의 작품 이 문제적이었고, 반체제적이었고, 동질성의 집단에 전혀 다른 담론을 제기하여 새 물꼬를 튼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마그리트, 파이프)또 하나의 작품인데요

 작품 역시 익숙한 분들이 꽤 있을 것 같습니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으로서, 보통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로 불리는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림 속엔 분명 우리가 아는 그 파이프가 그려져 있지만, 그 밑에는 불어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있습니다. 아니, 분명 파이프인데 왜 파이프가 아니란 말인가요?!

 

 

마그리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들을 낯설게 결합시켜, 우리가 상식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다시금 살펴보고 성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것은 분명히 맞다! 이것은 틀림이 없다! 이것은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다시 의심하고 들추어보게 만듭니다. 이를 예술에서는 낯설게하기기법이라 부릅니다.

 

우리의 지각구조는 비슷하거나 동일한 것들을 자동반사적으로 편하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계속 편한 것들 속에 머물다 보면 개념파악이나 판단 역시 늘 동일한 것들 속에서 뱅뱅 돌게 됩니다. 다름을 신선하게 느끼기 보다는 불편하게 여기게 되고, 이질적인 것을 적대자로 만들기도 하며, ‘낯선 것들은 그룹 밖으로 배제해야 한다, 혹은 배제해도 괜찮다라는 생각을 무리 없이 하게 만듭니다.

 

낯설게하기가 우리의 인식의 습관적 태도에 충격을 가져온 것처럼, 우리 속에 있는 다른 소리, 다른 의견은 우리가 탄탄하다고 믿었던 우리의 이성과, 그간 고수해왔던 합목적성을 환기시켜줄 수 있는 또 하나의 감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낯선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는 결국, 야고보가 말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율법이 아닌, ‘율법을 위한 율법’, ‘그들의 내부 결속만을 위한 율법’, ‘그들이 가진 권한을 유지존속하게 하는 율법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구약본문인 아가서는 에로스를 그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주저함 없이 자유롭게 노래합니다. 규범이나 법칙 아래 놓여서는 절대 부를 수 없는 자유의 노래입니다. “나의 임이시여, 활짝 핀 꽃들 사이로 오시는군요. 어서 오소서, 나의 사랑하는 임이여, 어서 이리 오소서이 아름다운 노래가 연인들 사이에서만 불러질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이 아가서의 노랫말이 그대로 우리의 언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일한 것들 속에서, 비슷한 생각들 속에서 박차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공동체를 해하는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길을 갈 때, 우리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맘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잘 듣고, 말하기를 더디하고,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아야 합니다.

 

낯선 의견을 가진 이들이 우리 속에 있기를 원합니다. 낯선 당신이 어여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 파 송 사 >

낯선 그대들이여, 우리 속으로 오십시오 , 어서 오십시오.

아름다운 임이시여- 꽃 같은 임이시여,

전혀 익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아주 낯선 모습으로

우리에게 어서 오십시오.

 

자유로운 율법 속에 우리, 함께 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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