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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신의 얼굴은 볼 수 없다 | 김희헌 | 2020-10-18

by 김희헌 posted Oct 18, 2020 Views 20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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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10-18

신의 얼굴은 볼 수 없다 (33:12-23, 살전 1:1-10, 22:15-22)

2020.10.18. 창조절 일곱 번째 주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세 가지 열쇠]

거리두기가 1단계로 완화되어 대면 예배를 다시 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3월부터 시작된 코로나 위기 속에서 대면과 비대면 예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보를 살펴보았더니, 31일부터 10주간을 비대면 예배로 드리다가, 510일부터 14주간은 대면 예배로 드렸고, 816일부터 지난주까지 9주 동안 비대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면서, 코로나의 위태로운 시기에도 어느 정도 적응해가는 듯합니다.

요즘 화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삶도 신앙도 뉴노멀이 필요한 때입니다. 김경재 목사님은 최근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풀어갈 열쇠가 되는 말을 세 가지로, 단순성, 연대성, 우주적 영성을 들었습니다. 앞으로의 뉴노멀은 이 세 가지 특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먼저 인류는 단순한 삶으로 거대한 전환을 해나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한 삶은 환경파괴와 기후위기의 시대에 요청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내면적으로 더 자유롭고 만족스러운 생활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연대성은 만물이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팬데믹 시대의 교훈을 바탕으로 인류가 지구공동체를 돌보는 청지기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런 각성이 우주적 영성에 대해서 더 크게 눈뜨게 하면서, 근시안적인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이념투쟁이나 종교갈등을 넘어서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통적인 제도 종교는 약화되는 반면, 존재의 근원에 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깊이 있는 영성, 진화하는 우주 속에서 새로움과 정신성을 발견하는 창조적 영성이 더 강하게 일어날 것으로 전망합니다.

저는 이런 예측에 공감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시대는 그저 오지 않고, 현실의 혼란과 불안을 견디면서 조금씩 다가올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는 사람들을 두려움과 공포에 빠뜨리는 것들에 맞설 때 동트고, 책임과 연대 속에서 정직한 희망을 밀고 나갈 때 열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민중신학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거기서 믿음이 자라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신앙인은 복이 있습니다.

종교철학자 존 힉은 인간의 신성체험 방식을 무지개와 등산로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무지갯빛처럼 다양하게 경험되며, 하나님을 만나는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때로는 사람들의 위대한 사랑을 통해서, 때로는 우리 내면의 깊은 목소리를 통해서, 때로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 이 코로나 시기에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디에서 거룩한 체험을 하고 있습니까?

 

[출애굽기의 비대면 신학 / 출애굽기 3312-23]

지난주 출애굽기의 내용은 금송아지 우상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시간이 지나가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들과 함께 시내산을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33:3)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얻기 위해 간청합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우상의 소용돌이가 아직 여운으로 남은 상황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개의 대화로 이루어졌습니다. 모세가 먼저 하나님께 요청한 내용은 하나님의 계획을 가르쳐달라’(show me your ways)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하나님은 마음을 돌리시고,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모세의 두 번째 요청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도 함께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도 다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마지막 요청은 주님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요청에 대해서 하나님은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십니다.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겠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등은 보게 될 것이다.’ (19~23, 요약)

나의 등은 보게 될 것이지만,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의 개인적인 하나님 체험의 형식을 빌었지만, 성서가 가진 종교철학을 말해줍니다. 그것을 비대면의 신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당혹감을 줍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신앙이 무르익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봐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서 역시 다른 곳을 보면, 하나님의 얼굴을 봤다고 증언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얍복강가에서 밤새 씨름을 한 야곱은 아침에 길을 떠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이렇게 목숨이 붙어있구나!’ 하고 말합니다. (32:30)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22:4)

그러나, 출애굽기를 비롯한 성서의 대체적인 주장은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다는 비대면 신학을 기본 입장으로 갖고 있습니다. 성서의 비대면 신학이 말하려는 것은, 신성체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종교체험에서 얻은 독특한 의미를 말입니다. 그 의미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인 의미입니다.

존재론적 의미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절대적 간격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범접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외감을 말합니다. 마치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신발을 벗고 서서,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던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3:5-6)

이런 종교적 경외감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기보다는,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도록 하는 민주사상과 연결됩니다. 종교적 경외감은 정치적인 민주주의나 평등사상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올바른 경외감을 잃었을 때, 그 자리에 돈과 권력을 우상화하는 변질된 심리가 자리 잡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절대적 간격을 깨닫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때 비로소, 모든 생명을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는 평등한 연대 사상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성서의 비대면 신학이 말하는 존재론적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비대면 신학에는 인식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는 일의 불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이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자기가 하나님을 다 파악하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도 까불면 죽는다라는 망발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모두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진리에 대한 겸손과 아울러, ‘진리를 향한 정진을 요청합니다. 자신에게는 비록 완벽한 진리체험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며, 위험한 일입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진리를 주장할 때는 도가 지나치지 않는 과유불급의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진리 주장을 절대화할 때, 그 진리는 이미 죽은 것일 뿐만 아니라, 진리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파괴하게 됩니다.

유한한 피조물은 신을 모두 소유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역사에 절대 길들지 않습니다. 이런 신학적 인식은 믿음의 겸손과 희망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리 앞에 서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떠한 역사의 절망과 좌절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이끕니다.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비대면의 신학은 기독교가 영적이고 실천적인종교가 되는데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영적인 가르침이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음으로써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역설적인 깨달음입니다. 만일 자기 안에 하나님처럼 모셔진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아마 그것은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우상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님이 하나님을 가리켜 없이 계신 분이라고 한 것은 절묘한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신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 뒹굴고 있는 우상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자기 한계 안에서 만들어놓은 신에게서 풀려나야, 비로소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비대면 신학의 실천적인 가르침은 성서에 흐르는 가장 근본적인 사상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제국주의적 폭력에 대한 비판의식입니다. 이집트 제국의 파라오와 바벨론의 왕은 신처럼 섬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폭력은 신성화되었습니다. 성서는 이런 폭력 이데올로기를 거부합니다. 신을 보면 죽는다는 성서의 선언은, 이 땅의 그 누구도 신적인 존재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해방의 정신입니다.

 

[황제의 초상 vs. 믿음의 모범 / 마태 22:15-22, 살전 1:1-10]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바리새인과 예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대화는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 사이에 벌어진 세 가지 논쟁 가운데 첫 번째인데, 그 주제는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바리새인은 이 질문을 올무로 삼아서 예수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헤롯 당원과 함께 예수를 찾아갑니다. 한참 발림 말을 늘어놓은 다음에 묻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를 묻는 그들의 물음에는 이미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맞물려 있습니다. 그것이 당시 민심이었습니다. 납세거부 운동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는 유대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난 항쟁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 질문을 던진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둘로 갈라져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만을 섬겨야지 황제를 우상처럼 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생각이 하나의 마음에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식민지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누구나 안고 있는 갈등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들은 자기 시대의 비극을 발판으로 삼아 예수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질문을 받은 예수가 되묻습니다. 동전에 있는 초상과 글자가 가리키는 것은 누구인가? 그러자, ‘황제의 것이라고 답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라.’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탄복하며 떠나갔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예수의 대답은 명료했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라’. 이 짧은 답에 사람들이 탄복한 이유는, 덫에 걸려들지 않고 문제를 풀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도 문제 되지 않고, 종교적으로도 양심에 걸리지 않는 기막힌 수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관심을 끄는 대목은 속임수에 걸려들지 않은 예수의 대답보다, 질문을 던진 사람에게 되묻는 예수의 물음입니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냐? 이 질문은, 그것에 대답하는 순간, 자신의 분열된 정신을 스스로 폭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황제의 것이라고 대답할 경우, 그렇다면 왜 자신들은 마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한 듯이 위선적인 질문을 했는지를 보여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향합니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냐? 이 질문을 바꾸면 이렇습니다. 이 코로나 시대의 삶에서 너희는 무슨 초상(肖像)을 보느냐? 우리 시대의 초상은 문명의 위기입니다. 지난 시대의 삶이 방식이 몰고 온 총체적인 위기입니다. 경제적 위기는 오히려 피상적인 것입니다. 더욱 근원적인 것은 존재의 위기입니다. 무엇을 위한 삶인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무엇을 위한 국가인가, 무엇을 위한 종교인가, 무엇을 위한 교회인가? 이런 근본적인 물음 앞에서 우리는 신앙의 길을 다시 묻게 됩니다.

 

오늘 데살로니가 본문은 예수 운동 초창기의 활력과 기쁨을 보여줍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제2성서 가운데 최초의 문서로 알려집니다. 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된 것으로서, 예수 운동에 관한 첫 번째 문서입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중에 그리스 데살로니가 지역에 들렀다가,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수에 관한 증언을 하고 동지들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감동적인 활동을 하면서 신앙공동체를 지어갔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마케도니아 지역을 넘어서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5~8)

그들은 서로 본받는 삶을 살아가면서, 공동체 운동의 전형을 세워갔습니다. 황제의 초상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사랑과 연대로 뭉친 새로운 세계를 지어갔습니다. 그것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3)

이 세 가지는 예수 운동을 지탱하는 핵심 사상입니다. 종교 공동체만이 아니라, 한 시대가 위기를 맞고 있을 때 지어야 할 뉴노멀도 믿음의 행위사랑의 수고소망의 인내를 통해서 세워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서, 과거는 불능에 빠졌고, 현실은 위태롭고, 미래는 아직 밝아오지 않은 듯합니다. 지난 문명을 지배했던 우상의 소란은 여전한데,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는 비대면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어수선한 위기 속에서, 우리 교회는 예배당을 짓고 있습니다. 예배당만이 아니라 선교 계획을 다시 세우고, 그 계획을 뒷받침할 기금을 조성하고, 그 물질적 기반 위에 신앙공동체를 굳게 세우고자 분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우리의 염원과 노력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던 기쁨과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새 시대를 준비하는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우리 모두의 삶에서 열매를 거두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주님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의 요청에, 주님은 모든 영광을 보여주겠지만, 얼굴은 보여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지어가는 우리 모두의 삶에서,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풍성한 열매가 맺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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