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주시경과 태권도인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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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힌샘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은 갑오경장 이후에 일어난 애국운동과 우리말 우리글의 보급과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노력을 기울인 국어학자이며, 사상가였다.

  우리 글 정음(正音)을 '한글'이라고 이름 붙인 이가 그이며, 우리 문법 연구의 길을 열고, 우리 말ㆍ글의 연구와 보급에 앞장서서 청년 학도를 길러낸 분이다. 국어 연구의 제1세대인 장지영, 권덕규, 김두봉, 신명균, 최현배, 김윤경, 이병기 등을 키워낸 이가 바로 '주보따리' 한흰샘 선생이다.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태어나 서울에 와서 배재학교에서 공부하고, 독립신문의 교정을 맡아보면서 배재학교 등 수십 곳을 돌며 한글을 가르쳤고,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만들어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한글학회로 발전할 기틀을 만든 국어 연구, 국어 보급, 국어 사랑의 전도사였다. 갑오경장 뒤에 정부의 학부(學部) 안에 둔 국문연구소의 중심인물이었고,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1908) 등 책을 지어 국어연구에도 앞장섰다.

  "하늘이 그 구역에 그 인종이 살기를 명하고, 그 인종에 그 말을 명하여, 한 구역의 땅에 한 인종을 낳고, 한 인종의 사람에 한 가지 말을 내게 함이라. 그러므로 하늘이 명한 성을 따라 그 구역에 그 인종이 살기 편하며, 그 인종이 그 말을 내기에 알맞아 천연(天然)의 사회로 국가를 만들어 독립이 각각 정해지니, 그 구역은 독립의 터전[基]이요, 그 인종은 독립의 몸[?]이요, 그 말[言]은 독립의 성(性)이다."(<국어문전음학>, 박종국 <한국어발달사 증보>참조)


  나라 말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서고, 그 말은 독립의 바탕이라는 굳은 믿음은 그의 투철한 사상이었다. 그리고 융희 원년(1907) 여름에 상동(지금 남창동) 청년 학원에서 '제1회 하기 국어 강습소'를 차린 것을 시작으로, 융희3(1909)년 수송동 보성중학교(지금 조계사)에 일요학교 '한글모(조선어 강습소)'를 차려 191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열과 성을 다하여 이끌었다.(<한글학회 50년사>참고)

  한힌샘은 언제나 검소한 무명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늘상 책 보따리를 들고 다녀서, '주 보따리'라는 별명으로 통했다고 한다. 혹은 한글만 쓰기를 주장해서 학생들이 주선생의 이름, 두루 주(周) 때 시(時), 글 경(經)을 풀어서 "두루 때 글" 선생이라고 불렀다는 일화도 전한다.

  주시경은 나라와 민족의 정신인 한글을 소홀히 하고 한문 배우기에 반생을 허비하는 우리 교육의 현실이 안타까워, 한글 펴기에 전심하다 마흔도 못 되는 나이에 돌아갔다. 북한은 그 제자 김두봉 등이 앞장서서 순수 한글문화를 이루었다. 남한은 옛날 한문 자리에 영어가 차고 앉아 우리말 우리글이 한문 시대보다 더한 수난의 세월이다.

  영어 몰입교육으로 자발적 문화 식민지가 된 현실에서 최근에는 '한글·김치·한복'과 더불어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대표적 문화 자산인 태권도가, 한국 사람이 총재인 세계연맹에서 공식용어를 영어로 바꾸었다는 태권도인의 눈물의 한탄이 울려 퍼졌다. 다시 한힌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구역은 독립의 터전이요, 그 인종은 독립의 몸이요, 그 말은 독립의 성(性)이다."

 

 

<57> 나혜석의 '인형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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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ㆍ1896-1948)은 한국 근대 최초 여성화가이자, 작가, 여성해방론자로 한국 여성사의 한 샛별이었다.

  일류 화가, 작가, 사상가로 뚜렷한 자기 세계를 추구했던 여성으로, 남편이 아닌 남자와 연애를 하고, '이혼 고백장'과 같은 자기를 드러내는 글씨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여성에 대한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을 그치지 않았던 그미는 '100년을 앞서 살았던 여성'이었다.(이상경 <나혜석전집>)

  나혜석은 한마디로 사건의 일생을 살았다. 군수를 지낸 관료의 딸로 수원에서 태어났고,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유학한 19세에 일본의 전위적 여성 문예지 <세이토>(靑?)의 세례를 받으면서, 유학생학우회 잡지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며 스스로 여성해방론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상적 부인'은 넘치는 의욕에 비하면 거의 소화되지 않은 사상과 치졸하게 모방된 문체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개성, 자각, 이상적 부인 등의 열쇠 말이 두드러졌고, '그림자(影子)도 보이지 않는 어떤 길을 향하여 무한한 고통과 싸우며 노력코자' 하는 의지가 뚜렷이 드러난 삶을 지향했다.

 

  '신여성'으로 나혜석의 자각은 그미의 '모(母)된 감상기'를 통해서 일차적으로 폭발하였다고 할 만하다. 1920년 4월 25세의 나이로 결혼한 나혜석은 이듬해 4월에 첫 딸을 낳고, '김(우영)과 나(혜석)의 기쁨'이란 뜻으로 김나열(金羅悅)이라는 이름을 지어, 딸의 출산을 자축하였다. 이 맘 때쯤 나혜석의 시 '인형의 가(家)'가 발표되었는데, 이야말로 그의 여성해방 사상을 잘 드러낸 작품이었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기뻐하듯/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남편의 아내 인형으로/그들을 기쁘게 하는/위안물 되도다.
  (후렴) 노라를 놓아라./최후로 순순하게/엄밀히 막아 논/장벽에서/견고히 닫혔던/문을 열고/노라를 놓아주게. (중략)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나를 보아/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맑은 암흑 횡행(橫行)할지나/다른 날, 폭풍우 뒤에/사람은 너와 나.(<每日申報> 1921.4.3)

  이 해(1921) 1월 25일부터 <매일신보>에 입센의 <人形의 家>가 양백화(梁白華) 등의 번역으로 연재되는 마지막 회에 나혜석의 이 노래가 실렸다. '노라'는 여성 해방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나열을 낳아 기른 지 2년에 문제의 '모(母)된 감상기'를 잡지에 발표했는데, '조선 역사에 처음 있을' 어머니의 고백이면서, 이 세상 모든 여성이 겪어왔을 해산의 경험과 감상을 글로 공표하는 사실 자체로서 '사건'이었다.

  이를 비판하는 백결생(百結生)의 '관념의 남루(襤褸)를 벗은 비애'와 다시 나혜석의 반박으로, 여성의 허물 벗기는 한층 대담해졌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3ㆍ1운동 때에는 김마리아 등과 여성 운동을 조직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신문을 당하고, 이렇게 그미는 한국 근대 여성사 100년을 앞서 산 선각자였다.

 

 

<58> 방정환 "어린이 고대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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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ㆍ1899~1931)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어린이날'을 만들고, '어린이 찬미'를 쓰고, 처음으로 본격적 아동문학과 어린이문화운동을 일으킨 세계 어린이 운동의 창시자였다.

  양반에 대하여 상민이, 남자에 대하여 여자가, 자본가에 대하여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위해 떨치고 일어난 인권 운동도 쉽지 않은 변화였다. 그러나 어린이처럼 스스로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진보적 선견(先見)이며, 인권운동이었다.

  소파는 일본에 유학하여 철학과 아동문학을 공부하고, 1920년 '개벽(開闢)'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어린이'란 말을 문화어로 정착시키고, 어린이를 한 인격체로 높이는 운동을 일으켰다. 1921년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고, 이듬해에는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고, 1923년 어린이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두 같은 입술로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대로 한울(하늘)의 소리입니다. 비둘기와 같이 토끼와 같이, 부드러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뛰어 노는 모양 고대로가 자연의 자태이고, 고대로가 한울의 그림자입니다."('어린이' 창간사)
 

  어린이가 사랑스럽다고 귀여워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마는, 이렇게 어린이가 부르는 노래를 '하늘의 소리'에 비기고, 그 노는 모양을 하늘의 그림자라고 고백할 줄을 사람들은 몰랐다. 소파는 또 말했다.

  "어린이는 풀로 비기면 싹이요, 나무로 비기면 손인 것을 알쟈. … 한(限) 없는 극(極) 없는 보다 이상(以上)의 명일(明日)의 광명을 향하야 줄달음치는 자임을 알쟈. … 그들 (어린이)을 떠나서는 우리에게 아무러한 희망도 광명도 없는 것을 깨닫쟈."('개벽' 23호, 1923)

  이런 어린이 사랑의 정신은 그가 천도교를 알고, 특히 3대 교주였던 의암 손병희(孫秉熙)의 사위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투철한 그의 사람 사랑의 정신의 도달점이었을 터이다. 그의 어린이 사랑의 정신은 그가 쓴 '어린이 찬미'에서 특히 아름답게 발현되었다.

  "이태까지는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복을 준다고 믿어 왔다. 그 복을 많이 가져 온 이가 어린이다. 그래 그 한없이 많이 가지고 온 복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준다. 어린이는 순 복덩이다. 마른 잔디에 새 풀이 나고, 나뭇가지에 새 움이 돋는다고 제일 먼저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 눈이 온다고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어린이 찬미')

  이런 소파의 소년 운동은 1957년 '어린이 헌장' 공표로 이어졌다. 서울 종로 경운동 수운회관 앞에 선 '세계 어린이 운동 발상지' 기념비는 유엔의 '세계 아동인권 선언'보다 30년 앞선 한국의 어린이 운동을 기념하고, 여기 소파의 말을 새겼다.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 사람이 삼사십년 앞선 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59> 김교신의 '조선지리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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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교신(1901-1945)은 동경 유학 중이던 1927년 함석헌(咸錫憲) 등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하고, 1930년부터는 주필로 출판을 스스로 담당하며, '<성서조선> 사건'으로 탄압을 겪은 민족주의자였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교신자보다는 조선혼(朝鮮魂)을 소유한 조선인에게로 가라!시골로 가라! 산골로 가라!"고 창간사에 썼던 그는 15년 간 이 잡지를 내어 민족혼을 북돋우며, 잡지를 폐간에 이르게 한 '조와(弔蛙ㆍ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와 같은 명문장을 쏟아냈다. 특히 그는 동경고사(東京高師)의 영문과에서 지리박물학과로 전과한 지리학자였으며, 최남선과 함께 한국 근대 지리학의 토대를 만든 지리학자였다(이은숙;<진리의 벗이 되어> 제52호, 2001.3. 참고).

  그는 양정고보에서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우승자 손기정 선수를 키운 스승이었으며, '물에 산에'라는 답사 모임을 이끌어 학생들에게 지리역사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식을 고취한 사상가였다. 특히 지리학자로서 <성서조선>에 남긴 '조선 지리 소고(小考)'는 그의 지리 역사의 조예(造詣)와 함께 그의 국토 사랑 민족 사상을 전해주는 명문이다.

  "조선 산천을 말하는 사람은 금강산의 기암괴석을 찬미하거나 백두산의 웅장한 봉우리를 감탄하는 것으로 끝나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쓰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조선식 해안의 길이가 무궁함을 표현하는 데나 사용할 말이다. 지자(智者)는 바다를 사랑한다는 말이 사실일진대, 무릇 지자로서 자처하는 이는 한산도 앞 바다에 작은 배를 띄워 놓고 나갈 길을 찾아 볼 것이다. 바다와 육지의 상대적 관계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이 허다한 섬과 산허리 사이사이에서 돛을 달아 노를 저어가 보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자기의 지략을 신뢰할 수 있는 자는 미친 자이거나 불세출의 영웅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확신하여도 무방할 것이다."(5. 해안선)

  "<대영백과사전>에서 '고려'라는 항목을 찾아보라. 거기에는 이순신과 거북선의 그림 설명이 있으리니, 세계인들로 하여금 조선을 기억하게 한 것은 다도해의 무궁무진한 그 기묘한 이치를 파악할 줄 알았던 한 장부가 있었던 까닭을 알 수 있다. … 요컨대 3면의 해안선으로 보아도 조선 강토에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해안선만은 실상 과분하다 하리만큼 조물주가 우리 민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조선 지리 소고', <성서조선>제 62호, 1934.)

  그의 지리 사상에는 그를 무교회주의로 이끈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이 컸다. 우치무라는 <성서지연구(聖書之硏究)>를 발간하는 한 편으로, 유럽 지리학자 기요(Arnold Guyot)의 <지인론(地人論ㆍThe Earth and Man)> 등을 참고로 <지인론>을 썼고, <지리학고(地理學考)>를 낸 지리학자였다. 그러나 김교신의 '조선지리소고'는 "조선의 국토는 그대로 조선의 역사이며, 조선 사람의 정신이 이 땅에 깃들고 민족 생활의 자취가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다"는 그의 지리 사상의 부연이며, '성서'와 '조선(지리)'은 그의 삶의 두 기둥이었다.

 

 

<60> 가네코 후미코, 조선의 흙이 된 日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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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ㆍ1903~1926)는 일본 여인으로, 조선 사람과 결혼하고 조선의 흙이 된 국적 없는 조선(한국) 사람이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미는 9살이 되던 1912년 조선에 나와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에 살며 3ㆍ1운동을 겪고, 귀국한 것이 17살이었다. 일본에서 조선 청년 박열(朴烈ㆍ1902~1974)을 만나 동거에 들어갔는데, 이때 맺은 '공동생활의 서약'은 그미의 공동체 의식과 민족초월의 평등사상을 뚜렷이 드러낸 글이다.

  1. 동지로서 동거할 것. 2. 운동, 활동 방면에 있어서는 (金子文子가) 여성이라는 관념을 제거할 것. 3. 서로는 '주의(主義)'를 위해서 그 운동에 협력할 것. 4. 한쪽의 사상이 타락해서 권력자와 손을 잡을 일이 생겼을 때에는 즉시 공동생활을 해지할 것. (金一勉; <朴烈>, 合同出版, 東京, 1973. 55쪽)

  가네코 후미코는 '청년조선'지에 실린 박열의 '개새끼'라는 시 한 편을 읽고, 서로 만나기도 전에 벌써 "전 생명을 고양하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고, 그를 만나서는 "나는 당신에게서 내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고 고백했다.

 

  두 사람은 곧 "마음과 마음으로 맺어지고", "사상적 동지, 사랑의 동거자"로 이어졌다고 했다. 박열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 학생으로, 3ㆍ1운동의 탄압을 피해 1919년 10월 도쿄로 건너갔고, 1922년 봄에 가네코 후미코를 만나 동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을 빌미로 일제는 사회주의자와 조선인 토벌에 나서서 9월 3일 이들을 붙잡아갔고, 일본 사회주의자의 대부 오스기 사카에(大杉榮)부부를 총살시켰으며, 조선사람 6,000명을 잡아 죽였다.

  이 과정에서 박열ㆍ후미코 부부를 천황 암살을 모의한 대역죄인으로 사형수로 만들었다. 이 일로 박열은 일본 정치범 최장기수로 22년 2개월을 감옥에서 보냈고,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의문사로, 스물 세 해의 짧은 삶을 마쳤다. 박열의 주선으로 후미코는 문경의 박씨 선산에 묻혀, 평양 신미리 묘지에 묻힌 애인 대신 그 고향의 흙이 되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ごうさせたか)>라는 자서전에서 후미코는 스스로 반항운동에 동참한 이유와 일본제국주의 타도의 명분을 뚜렷이 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겪은 체험을 중심으로, 학대 받은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하여, "자신을 표준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라는 자각을 뚜렷이 했다.

  "나는 본디부터 인간평등을 생각해 왔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평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평등 앞에는 바보도 영리한 자도 없으며,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으며, 땅 위의 자연적 존재로서 삶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삶의 가치는 완전히 평등하며, 모든 삶이 삶이라는 오직 한 가지 자격으로 사람의 사람다운 삶의 권리를 완전히 그리고 평등하게 향유해야 할 터입니다."(가네코 후미코; '천황제 타도는 부부의 약속' <運命の勝利者 朴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