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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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년은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이면서, 안중근(安重根ㆍ1879~1910) 의사와 매천 황현(梅泉 黃玹ㆍ1855~1910)의 서거 100년을 맞는 역사의 한 해이다.

  경술년 전해(1909)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경술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동아시아 평화를 외치며 일본 국가 권력에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0일에는 전라도의 이름난 선비 매천이 나라 잃은 슬픔을 곱씹으며, 절명사를 남기고 자결했다.

  이때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동양 평화'를 깨트렸기 때문에 죽였다고 당당히 공언하고, "동양평화가 무엇이냐?"고 묻는 일제의 검찰관에게 "아시아 각국이 모두 자주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라고 일갈해서 스스로의 평화의 정신을 재천명했다.

  그는 아시아 각 나라가 자주적으로 독립하는 동양 평화를 위해서, 스스로 갇혔던 역사의 땅 뤼순의 중립화론을 비롯하여, 동양 3국 평화회의와 공동 군단 창설, 공동 경제개발, 공동 화폐 발행과 함께, 로마 교황청 인증론까지 평화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꿈꿨다.

  안 의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그래서 동양평화를 로마 교황청의 중재까지 생각했을 터이다. 그가 최후를 마친 뤼순감옥은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구한말 언론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 1936년 순국 때까지 9년을 갇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의 서거 100년, 그의 동양 평화사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동북아시대 구상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된 바 있고, EU(유럽연합) 정신의 선편으로 평가되며, 경술국치 100년의 민족사를 넘어, 새로운 국제 시대의 인류의 평화사상의 한 디딤돌이 되었다.

  한편 매천은 망국의 소식이 시골에까지 전해진 경술년 자결을 결심하고 "나라가 망하는 날에 선비 한 사람이라도 죽어야 할 인(仁)을 이루리라"고 하고 절명사(絶命辭) 4수를 남기고 죽음을 택했다. 이름 없는 무지한 백성들까지라도 나라가 망하는 소식에 목숨 바쳐 싸우는 때를 만나 "글 아는 사람구실 참으로 어렵도다"고 한탄하며, 아편을 삼켜 죽어서 나라를 구했다.

  "새와 짐승도 갯가에서 슬피 우는데/ 무궁화 나라는 이미 사라졌는가/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 회상하니/ 글 아는 사람구실 참으로 어렵도다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淪 秋燈掩卷懷千苦 難作人間識字人](<절명사>의 둘째 시)

  김택영(金澤榮)ㆍ이건창(李建昌)과 함께 조선 말 3대 시인으로 추앙되는 황현의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를 기술한 비판적 최근세사로, 그가 순국한 이듬해(1911) 일제의 검열을 피해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의 편집자로 매천과 평생토록 가장 친했던 김택영은 '본전(本傳)'에서 매천의 문장이 하늘을 움직였다고 평하여 역사적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 때 나라가 망하는 일에 의분을 참지 못해 죽은 당대의 의인 15사람의 이름을 열거하여 함께 역사에 남겼다. 금산 군수 홍범식, 판서 김석진, 참판 이만도에서 여러 지방 유생과 반씨 성을 가진 환관 한 사람까지.

 

<52> 면암 최익현의 '의병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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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은 화서 이항노(李恒老)의 문하에서 배운 독립운동가로 일제의 침략정책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 가서 순절한 애국지사이다. 1894년 청일전쟁 뒤에 일본은 조선 식민지화를 획책, 친 러시아 성향의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했다. 1904년 2월에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행, 2월22일에는 우리 독도(獨島)를 다케시마(竹島)라 하여 제나라 시마네 현(島根縣)에 편입시키는 침략을 저질렀다.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세종실록 지리지> 오십 쪽 셋째 줄"(정광태;<독도는 우리땅>) 이렇게 구성진 노래는 북녘에서도 인기가 높아, 국가 정보원이 발표한 북조선 인민이 즐겨 부르는 남한 가요 5곡 가운데 하나라고, 노래는 "대마도는 몰라도"라는 구절도 나온다.

  일본이 독도 침탈극을 일으킨 이해(1904) 3월 2일 일본공사가 한일의정서를 성토한 면암과 허위(許蔿)를 엄중 처벌하도록 한국 정부에 요구하고, 11일에는 일본 헌병대장이 직접 이들을 잡아 가두었다. 3월 일본군이 청나라 봉천(奉天ㆍ지금의 선양(瀋陽))을 점령하고는, 여세를 몰아 4월 8일 일본 내각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대하여 일본의 보호권 확립을 결정했다.

  1905년 이른바 을사 5조약이 강행 처결되자, 면암은 74살의 고령으로 조상 묘소에 하직하고 낙안(樂安) 군수를 지낸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200여명 의병을 모아, 6월4일 태인(泰仁)에서 정읍으로, 다시 흥덕을 거쳐 순창(淳昌)에 이르렀을 때에는 의병이 500명을 넘었고 순창에 이르렀을 때에는 800명에 이르렀는데, 뜻밖의 황제의 해산령을 접한 면암은 통곡하며 해산했다.

  <면암의 모병 격문> "아, 저 일본의 적(敵)은 실로 우리의 백대의 원수로서, 임진왜란에 이능(二陵)의 화를 입은 것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또한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맺어 한갓 외국의 엿보는 바가 되게 하였다. 수호조약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공갈협박의 환란이 문득 이르러 우리의 정부를 능멸하고, 우리의 도망한 역적을 감싸주며, 우리의 강상(綱常)을 어지럽히고, 우리의 의관(衣冠)을 부쉈으며, 우리의 국모(國母)를 시해(弑害)하고.

  우리 임금의 머리를 깎는가 하면, 우리의 관원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백성을 도륙(屠戮)하였고, 우리의 묘지와 재산으로써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는가. 이러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저들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호라, 작년 10월에 저들이 한 행위는 만고에 일찍이 없던 일로서......우리 의병군사의 올바름을 믿고, 적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지 말자. 이에 격문을 돌리노니, 도와 일어나라"(<勉庵集 雜著> 격문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 인용, 이광린.신용하 편저 일지사 참조)

  면암은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의 재판을 받고,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유배 3년, 1907년 1월 1일 면암은, 단식 끝에 왜(倭)의 땅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대마도 수선사(修善寺) 묘역에 그의 순국비가 외롭다.




<53>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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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ㆍ1880-1936)는 구한말의 사학자로, 금년은 그의 탄생 130주년이 되는 해다. 일찍이 《황성신문》과 《매일신보》의 논설위원으로, 이름 높은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날선 필치로 조선 민중을 일깨운 《조선상고사》 서문은 특히 이름난 명논설이어서 다시 읽는 뜻이 있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생하여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뇨? …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라 하나니, 이를테면 조선인을 아라 하고 영·미ㆍ법ㆍ로..... 등을 비아라 하지만, 영ㆍ미ㆍ법ㆍ로.... 등은 각기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고 하며, 무산(無産) 계급은 무산 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를 비아라고 하지마는, 지주나 자본가는 저마다 제붙이를 아라 하고 무산계급을 비아라 한다. …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잦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사회의 활동이 휴식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나니,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이런 강인한 역사관은 민중의 직접 혁명으로 반일 독립은 물론, 무산자의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던 말년의 사상일 터이다. 그가 <조선 혁명선언>을 쓴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자유 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 기다리게 하자"(안재홍;<조선상고사 서문)는 열성에서였을 터이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이국의 땅 뤼순 감옥에서 8년을 고문당하다 결국 한줌 재로 고국에 돌아왔다.

 

  일찍이 고향의 동지 홍명희(洪命喜)는 그의 순국 소식에, "살아서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한데, 단재는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이다"(<哭丹齋>)라고 하고, "조국과 겨레를 위해 몸 바친 광복의 화신"(<조선사연구(초) 서문)이라 평했고, 고향 후배 시인 도종환은 첫 시집 제목 시이기도 한 <고두미 마을에서 - 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을 다녀 오며>에서 그 민족정신을 이렇게 이었다.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 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 오던
한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메 마을 고령 신씨도 이제는 아니 오고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리 나무꾼
고무신 자국 한 줄 눈발이 지워진다.

?

이 땅에 누가 남아 내 살 네 살 썩 비어
고우나 고운 핏덩어릴 줄 줄 줄 흘리련가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은 내리는데.

 

 

 

<54> 한용운 '님의 침묵'의 '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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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衆生(중생)이 釋迦(석가)의 님이라면 哲學(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薔薇花(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Mazzini, 1805~1872,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끈 혁명가)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戀愛(연애)가 自由(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羊(양)이 긔루어서 이 시를 쓴다." ('군말')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은 그의 첫 시집이며 마지막 시집이기도 한 하나뿐인 시집 <님의 沈?(침묵)>의 머리말을 '군말'이라고 썼다. 그리고 첫머리에 쓰시를,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고 스스로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을 기루며, 그래서 이 시를 쓴다고 했다.


  '어린양'이라면 생후 1년 미만의 양, 주로 희생 제물로 죽임을 당하는 양을 뜻한다. 기독교의 상징어여서 다소 뜻밖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서 더욱 강렬한 이미지에 더하여, 스스로 "해저문 벌판에…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을 위해서, 그리워해서, 사랑해서 이 시를 쓴다고 '군말'을 썼다. 강렬한 중생 제도의 보살행(菩薩行)일 터이다.

  일찍이 만해의 후배로 동악(東岳) 시단에서 자란 조지훈(趙芝薰)은 말하기를, "한용운 선생의 진면목은 혁명가와 선승(禪僧)과 시인의 일체화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성격은 마치 정삼각형과 같아서 어느 것이나 다 다른 양자를 밑변으로 한 정점을 이루어, 각기 독립한 면에서도 후세의 전범이 되었지만, 이 세 가지를 아울러 보지 않고서는 만해의 진면목은 체득되지 않는다"고 했다.(박노준·인권환 <만해 한용운 연구>서문)

  그는 만해의 문학을 일관하는 정신이 또한 민족과 불(佛)을 일체화한 님에 대한 가없는 사모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 '군말'은 참으로 군말이 아니라 그의 첫 시집의 '첫 시'라 할 만하다.

  만해 스님이라면 '별난 시인'으로 인상 받기 십상이지만, 실로 그렇다. 시인으로 그가 낸 시집은 이것이 유일하고, "스무 살이 넘어서도 아직도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하고 일갈한 T.S 엘리어트의 명구가 유행하던 세기말에 50세 가까워서 이런 시집을 내며 "님의 침묵에다 머리말이 '군말'이다. 게다가 끝말로 쓴 '독자에게'에서는 스스로 시인으로 여러분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하고, "독자는 나의 시를 읽을 때"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를 슬퍼할 줄을 안다"고 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 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게 깊고, 독자는 시인을 슬퍼하고 스스로를 슬퍼할 시간, 그러나 '님의 침묵'은, 설악산의 그림자도 엷어 가고, 새벽종은 정녕 울려야 했다.

 

 

 

 

<55> 백범 김구의 '나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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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白凡) 김구(金九ㆍ1876~1949)는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가로,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이루어진 것은 65살인 1941년 망명지 중국에서였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평생을 살아온 설움과 부끄러움으로 애타면서, 독립된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다는 뜻은 "차라리 계림(鷄林)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왕(倭王)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던 박제상(朴堤上)의 고사로 더욱 빛났다.

  민족국가의 자유로운 발전 위에서만 세계평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그의 정치이념은 한 마디로 '자유'로 대표되었다. 당연히 자유의 반대개념으로 독재를 철저히 비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비판하는 것이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였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독재의 나라 소련을 가장 비판했고, 그에 비겨 미국식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이념은 독재를 싫어하고 자유로운 민주정치를 강조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백범이 마지막으로 강조하는바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는 사상의 자유를 담보하는 정치적 안정과 교육으로 화평한 문화를 이룩하는 일이다.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야말로 이런 그의 소원을 요약한 목표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부록한 그의 <나의 소원> 한 편은 조국 광복에 몸 바친 그가 민족에게 주는 말이며, 민족사상의 대강을 보여주는 감동적 글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원인은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이 <나의 소원>은 당연히 백범 스스로의 평생의 소원인 동시의 그가 생각해 온 우리 민족의 소원일 터이다. 이런 백범이기에 스스로의 삶을 공적 모습으로 설계했을 터이지만, 그의 자전으로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인간 가운데서도 그가 강조해서 그린 중요한 인물 가운데는 원칙주의 신앙인 도인권(都仁權)이 있고,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이 있었다.

  그 스스로 중시해 온 공적 인간관(公的 人間觀)을 그 자신과 이들에게서 볼 수 있고, 이것은 그들이 산 시대의 선구자들의 정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