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정약용과 신작의 한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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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천(石泉) 신작(申綽, 1760-1828)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2년 차이의 동년배로 다산이 귀양에서 돌아온 말년에 두물 머리[兩水]에서 이웃으로 지기(知己)로 교유했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는 옛날 광주(廣州) 마현리[마재]로, 천마산을 배경으로 남ㆍ북 한강과 초내[苕川]가 합류하는 경승이다. 다산이 태어나고 묻힌 고향이며, 석천은 강화도에서 정제두(鄭齊斗)의 강화학(江華學)을 이은 그 사위 신대우(申大羽)의 아들로, 50살 때 광주 사촌(社村)으로 이사하여 선영(先塋)을 지키며 크게 이룬 경학자(經學者)였다.

  마침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반생의 원고뭉치를) 안고 온 지 3년인데 함께 읽어줄 사람 하나 없다(抱歸三年 無人共讀)"고 읊은 때 석천과 만나, 두 사람의 만남이 조선 후기 한강의 문명을 함께 이루어 갔던 모습의 일단을 짐작하게 한다.

속세의 생활 반평생에 바라는 것 없으나
유독 맑고 그윽한 그대의 거처를 좋아하네.
집에 전하는 옛 사업은 천 권의 경서이고
늘그막의 생애는 한 언덕의 보리밭일세.
짙은 그늘 꽃다운 나무엔 지나는 새를 보겠고
고요한 푸른 못에는 고기 노는 걸 알겠네.
아무 일 없이 흉금을 헤치고 서로 마주하니
저 강호에 둥둥 뜬 배와 서로 같네.
[半世塵?無所求 喜君居止獨淸幽 傳家舊業經千卷 晩境生涯麥一邱 芳樹陰濃看鳥過 碧潭風靜識魚游 披襟共對虛無事 等是江湖泛泛舟]

                                                                                         [정약용,『다산시문집』 제7권, 시(詩)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

  다산의 이 시집에는 두 사람의 사귐의 모습들을 전해 주는데, 사촌은 지금의 초월읍 서하리(西霞里)로, 이곳 사마루 마을의 석천의 서재에는 4,000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천권의 경서"라고 한 석천의 가학(家學)은 이른바 강화학으로, 그의 경학은 일찍이 정인보 선생이 신석천과 정다산을 경학자[經師]와 경세가로 지목하여 그 학문적 지향을 함께 말한 뜻을 짐작케 한다. 이들의 사귐은 학문과 우의로 두 가문의 세교(世交)로 이어졌고, 세교로 이어진 정경은 석천의 아들 명연(命淵)이 다산을 따라 수종사(水鐘寺)를 유람하고 강 건너 천진암에 이르러 차운한 시에, "좋은 때에 어른들을 시종하여 조용한 놀음으로 운림(雲林)을 찾았다"고 한 글(<次韻上天眞寺>《의유당전서》1 <천진소요집>)에서도 뚜렷하다.

  그러나 이런 한강의 문화환경이 난개발 속에 크게 훼손되고 있다. 근기(近畿) 실학과 양근(陽根)의 서학(西學)과 여주ㆍ광주의 문학이며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실학 전통은 조선 후기의 학문과 문예와 사상의 한 중심이었다. 이 두물 머리 문화권의 문화와 사상을 뛰어난 자연 경관과 함께 총체적으로 보존 연구 발전시킬 한강 문화유산 특별계획이 절실한 시점이다. (2010. 8.22)

 

 

<47> 심노숭의 '눈물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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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전(孝田) 심노숭(1762-1837)은 <눈물이란 무엇인가(淚原)>라는 소품으로 요사이 많이 알려졌지만, 방대한 야사집의 편자로, 다채로운 시문과 문예론을 남긴 조선 한문학의 마지막 시대 인물이다. 76세까지 장수하며 《대동패림(大東稗林)》 136책을 편찬하고, 유배일기 20책을 포함한 문집 《효전산고(孝田散稿)》 58책을 남겼다. 명(明) 나라 말기의 소품가들에게는 "기쁨과 웃음, 노함과 꾸짖음이 다 훌륭한 문장이 되었다"고 하지만, 심노숭이 아내의 죽음에 흘린 눈물의 진정성이 특히 감동을 준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 것인가?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한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맥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에 있지 않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눈만이 주관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있지 않다면, 마음이 움직임 없이 눈 그 자체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으니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마치 오줌이 방광으로부터 그곳으로 나오는 것처럼 눈물이 마음으로부터 눈으로 나온다면 저것은 다 같은 물의 유(類)로써 아래로 흐른다는 성질을 잃지 않고 있으되 왜 유독 눈물만은 그렇지 않은가? 마음은 아래에 있고 눈은 위에 있는데 어찌 물인데도 아래로부터 위로 가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 (김영진 옮김,《눈물이란 무엇인가》, 태학사)

 

  일찍이 당대의 대표적 패사소품 작가, 김려(金?)ㆍ이옥(李鈺)ㆍ강이천(姜?天) 등과 성균관에서 가까이 사귀었고, 문학의 경향에도 공통되는 성격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심노숭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5월에는 네 살 된 딸을 잃고, 한 달이 채 못 되어 동갑내기 아내 전주 이씨를 잃었다고 했다. 이런 청천벽력 앞에 흘린 눈물의 문학은 그 후 2년 남짓 동안에 26제(題)의 시와 산문 23편의 도망시문(悼亡詩文)을 남긴 사실만으로도 가슴을 울린다. 그런 정성스런 아내 사랑의 마음을 가진 이였기에 이런 유례없는 눈물의 시문집이 책을 이루었을 터이다.

 

  그는 스스로 "정이 여리기(情弱)가 꼭 아녀자(兒女子) 같아서", 아내의 병이 심해진 뒤에는 곁에서 머뭇거렸고,(<아내 영전에>), "삶과 죽음 사이에서 때로 슬픔이 지나쳐 상(傷)함에 이르렀다"(<베개 맡에서 지은 글>)고 했다. 이옥과 김려처럼 절친한 친구도 없었다. 그런 여린 성격이었기에 제사를 지내면, "곡(哭)하여 눈물을 흘리면 제사를 지냈다고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고 여겼다"고 했다. 이렇게 '여기의 느꺼움'으로 '저곳의 응함'을 알 수 있으니, 눈물이 나면 아내의 혼령이 내 곁에 왔구나 라고 여겼다고 했다.

 
  이 시대에는 담헌 홍대용이 북경의 유리창에서 중원의 선비들과 남자의 눈물을 논한 바 있고, 연암 박지원은 연행 중에 <호곡장(好哭場)>을 말하고 또 "영웅과 미인은 눈물이 많다"고 한 말로 화제를 뿌린 바 있었다. 이런 뒷시대에 나온 심노숭의 <눈물>은 우리 문학이 낳은 감성적 사랑 문학의 한 기념비라 할 터이다.



<48> 담정 김려의 '연희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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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정(?庭) 김려(1766-1821)는 이옥(李鈺)ㆍ김조순(金祖淳) 등과 함께 이른바 패사소품(稗史小品) 문학인의 한 사람이다. 정조(正祖) 문체반정의 한 가운데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잃고, 서학(西學)의 문제로 32세에 함경도 부령(富嶺)으로 유배되고, 다시 경상도 진해로 옮겨지며 10여 년을 정배 살았다. <연희의 집>은 부령에서 깊이 사랑하게 된 여인 연희를 회상하며 진해에서 지은 《사유악부(思?樂府)》 시의 한 편이다. '사유'란 '생각하는 창문'이란 뜻으로, 담정이 남쪽 유배지의 창문에 붙인 편액(扁額)이라고 했다. 진해로 이배(移配)되자 하루도 북쪽으로 연희를 생각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생각이란 즐거워서도 하고 슬퍼서도 하고, 하면 할수록 못 잊는 연상으로 290편 《사유악부》를 이루었다. 시는 넘치는 생각으로, 매 편마다 민요의 메김 소리처럼 "무얼 생각하나, 저 북쪽 바닷가"를 머리에 얹었다.

"무얼 생각하나, 저 북쪽 바닷가,
눈에 삼삼한 성 동쪽 길
두 번째 다리 곁에 연희가 살지.
집 앞엔 한 줄기 맑은 시내 흐르고
집 뒤엔 험한 암석 산 주위를 덮었네.
계곡 가에 버드나무 수십 그룬데
문 앞에 한 그루 누각에 비치네.
누각 위엔 창에다 베틀을 놓았고
누각 아래엔 한 자 높이 돌절구 있네.
누각 남쪽 작은 우물엔 앵두나무 있고
누각 밖은 북쪽으로 회령 가는 길.

[問汝何所思 所思北海湄, 眼中分明城東路 第二橋邊蓮姬住 屋前一道淸溪流 屋後亂石顚山周 谿上楊柳數十株 一株當門映粉樓 樓上對?安機? 樓下石臼高尺許 樓南小井種櫻桃 樓外直北會寧去](박혜숙 옮김;《부령을 그리며》,돌베개),

  부령은 이름난 유배의 땅이면서, 경성 등과 함께 임금에게 어물을 진상하는 마천령 이북 네 고을의 하나였다. 동쪽 60리에 남반ㆍ북반 두 포구가 있고 "남포의 도미는 날치만큼 컸다"며 그 북쪽 바닷가를 그리워했다. 석보(石堡)의 남쪽, 청계(淸溪)의 서쪽, 200호가 살았다는 이 부령에서도 "성 동쪽 길 두 번째 다리 곁"에 연희네 집이 '사유' 곧 '생각하는 창문'의 원천이다. '산고수장루(山高水長樓)', 그 아래로는 단풍나무 숲, 누각 위엔 창에다 베틀을 놓고, 누각 아래엔 한 자 높이 돌절구와 남쪽으로 앵두나무 선 작은 우물. 그의 혼은 꿈속에도 사랑의 지도를 그린다. 연희는 유배객의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목욕재계하고 제수 차리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저버리지 않는 벗은 억만 사람 가운데 하나나 있을까요"속삭이던 여인이다.

그러나 "누각 밖은 북쪽으로 회령 가는 길"이라는 결구에서는 "하늘 끝 땅 끝에 산과 강이 막힌다"는 싯귀 그대로의 절망이다. 그럼에도 사랑이란 생각하면 할수록 더 못 잊게 되는 것, 그렇게 《사유악부》는 유배와 이별의 땅 '부령'을 연희의 땅, 사랑의 문학 지리(文學地理)로 자리매김한 유배객의 눈물어린 절창(絶唱)이다.

 

<49> 김금원 '호동서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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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금원(金錦園ㆍ1817-?)은 기행문이자 자서(自敍)이기도 한 《호동서낙기(湖東西洛記)》라는 작품을 남긴 조선 말기의 여성 문인이다. 여성의 국문 기행문으로 의령(宜寧) 남씨(南氏)의《관북유람일기(關北遊覽日記)》와도 비길 만한 기행문이면서, 평생 여행의 내력을 정리하여 자서전이 되게 한 곳에 묘미가 있는 글이다.

  동인 박죽서(朴竹西)가 발문에 썼듯이, "시문에 능한 이가 예로부터 강산(江山)의 도움이 많다"고 한 좋은 보기 글이라고 할 만하다. 시골의 한미(寒微)한 가문에 태어난 14세 소녀가 고향인 원주(原州)에서 제천을 거쳐 금강산(金剛山)과 한양을 여행하고, 결혼 뒤에는 남편을 따라 북쪽변방을 두루 여행했다.

  "천하 강산은 크고, 고금 세월은 오래구나. 인간사 가고 옴은 하나도 같지 않고, 생물은 형형색색 또한 만 가지로 같지 않다. 산은 본래 하나이나 끝내 만 가지로 흩어져 수많은 모습의 서로 다른 산이 있고, 물은 본래 만 줄기이나 끝내 하나로 모여 일천 물결 일만 굽이의 다름이 있다. …남자와 여자의 다름도… 만물마다 다르다.

  비록 그러나 눈으로 산하의 큼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사물의 중다함을 겪지 못 한다면 통변하여 그 이치에 도달할 수 없어, 국량이 협소해지고 식견이 통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며, 남자가 사방에 노니는 뜻을 귀중히 여기는 이유이다. 여자 같으면 발이 규문 밖을 나가지 못하고… 규중에 깊이 살아 그 총명과 식견을 넓힐 수가 없어 끝내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이혜순, 정하영 역편; 《한국고전여성문학의 세계》산문편)

  경인년(庚寅年ㆍ1830) 춘삼월 열네 살 난 시골 소녀는 남장(男裝)을 하고 수레를 타고 의림지를 찾아서는, 풍류를 곁들인 연못 구경과 민물 생선회를 맛보며, 지방의 명물인 순채를 데쳐서 오미자 간을 쳐서 처음 먹어보는 호사를 더했다. 그리고 동해안으로 내금강과 외금강을 두루 구경하고, 관동팔경(關東八景)과 설악산을 종주하여 한양(漢陽)에 이르렀다.

  시골 소녀 김금원의 금강산 여행은 천하 명기 황진이(黃眞伊)를 빼면, 제주 여걸 김만덕(金萬德)의 금강산 유람과 멀지 않은 동시대였다. 그리고 29세에는 의주(義州) 부윤으로 부임하는 시랑(侍郞) 김덕희(金德熙)의 소실이 되어, 행차보다 먼저 길을 떠나 의주에 이르렀다. 2년간 이곳 용만(龍灣)에 살며, 통군정(統軍亭)에 오르고, 압록강과 구련성(九連城)을 구경하며 국경 도시를 두루 여행한 그미(그녀)의 이 평생의 여행의 내력이 자서전을 이루었다.

  지금은 바야흐로 '길'[걷기]의 시대, 길 걷는 사람들의 주류는 단연 여성. 예로부터 아들을 낳으면 뽕나무 활에 쑥대화살로 천지사방을 쏘아, 웅비(雄飛)하기를 비는 풍습이 있었다. 지금은 산천유람의 7~8할은 여성인 시대, 일찍이 김금원은 황진이 김만덕을 이어, 이런 여성 길 걷기 시대의 선봉이 될 꿈이나 꾸었을까?

 

<50> 김삿갓의 풍악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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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고(蘭皐) 김삿갓(金炳淵ㆍ1807~1863)은 우리 문학사에서 한문학의 마지막 시대를 장식한 작가로, 방랑의 생애와 풍자적 세계인식에서 특징적인 존재이다. 스스로 답청유자(踏靑遊子) 행락소년으로 자처했다는 김삿갓이 특히 금강산을 이웃집 다니듯 했다는 말은 그의 금강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천하를 떠도는 자가 또 가을을 맞아
시붕과 언약하고 금강산 산사에서 만났다
소동의 사람들도 함께 와 흐르는 물도 암암한데
절로 돌아가는 중의 뒤로 흰 구름이 뜬다.
삼생의 소원을 내 이제 약간 푼 셈이니
크게 마심이 만 가지 수심을 능히 풀만 하도다.
맑은 느낌을 어렴풋이 붓 들어 감나무 잎에 쓰고
잠깐 누어 서쪽 수풀에 비 돋는 소리가 그윽함을 듣는다.

[江湖浪跡又逢秋 約伴詩朋會寺樓 小洞人來流水暗 古龕僧去白雲浮 薄遊少答三生願 豪飮能消萬種愁 擬把淸懷書?葉 臥聽西國雨聲幽] <금강산>

  가을의 금강산은 그 이름도 풍악산, 풍악의 가을은 "천하 가을의 대본영"이라니(이응수 <김삿갓과 금강산>), 가을에 금강을 다시 찾은 행락소년으로서도 "이제 삼생의 소원을 약간 푼 셈"이라고 했을 터이다. 전생과 내생의 소원까지 푼 즐거움이며, 당연히 "크게 마셔 만 가지 수심을 능히 풀 만하다"고 하였으리라. 게다가 시 동인(詩朋)과 함께 한 가을 저녁에, 소동정(통천의 바닷물 호수, 석호)의 물빛이 비추는 절로 돌아가는 스님의 모습이 평화로운 금강의 가을 풍광이다.

  금강산 시 이야기를 쓰자니, 오래 막혔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 훈풍으로 날아들었다. 남녘에 금강산 길이 열리면서 나는 외금강에 두 차례 내금강에 한 차례를 봉래산에 올랐다. 내금강이 열리던 날은 후배인 김상일 교수의 '금강산 시' 강의의 종강 기념 기행이라고 해서 대학원생들과 동행했다. 시집가는 기쁨으로 초등학생 손주까지 데리고 따라 나선 남녘 출신인 내 아내의 금강산 시 한 수는 분단 60년을 떠 돈 민족 이산(離散)의 역사로 읽히기에 김삿갓 금강산 시 뒤에 붙여본다.

금강 부부나무
내금강 표훈사 내리막 길가
포옹하다 뜨거워
녹아서 붙어버린 가슴으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산가족 상봉하던 부부의
타는 속과 가슴이 저러할까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허리가 부러져라 껴안은 것을 보면
선 채로 나무가 되어 부부로 살고 싶은 모양이다.

(이소희 시집 <밤을 떠나는 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