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식산 이만부의 실심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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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이후에 조선의 '실학 운동'의 첫 명제가 실심실학이었다. 조선의 실심실학은 전통 주자학을 비판하여 김만중처럼 불교 논리로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장유나 정제두(鄭齊斗)처럼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말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고 정주학(程朱學) 또한 마음의 학문으로 심학화(心學化)하고 있었던 점에서 기호(畿湖)학파의 김원행ㆍ홍대용들과 함께 영남 지방의 고학자(古學者)로 식산 이만부(息山李萬敷,1664-1732)가 주목을 받았다. 이만부는 성호 이익(李瀷)의 친족이 되는 남인계(南人系)의 유학자로, 당대 세속 유학의 거짓됨을 비판하면서, 상주(尙州) 지방에 숨어 연구와 실천적 삶을 산 실심실학자였다(권태을;'식산의 실심실학'<息山李萬敷文學硏究> 참조).

  "왜 참[實]에 힘쓰라 하는가? 요새 사람들이 '참'에 힘쓰지 않고 겉만 꾸미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 마땅히 일용인사(日用人事)에서 그 이치[理]를 구하고 본받아 행해야지, 만일 인사의 배움에도 이르지 못하고서 먼저 고원(高遠)한 일을 구한다면, 끝내 실득(實得)할 바가 없을 것이다. 그 말에 충성과 믿음[忠信]이 있고, 행실에 어긋남이 없으며[篤敬], 들어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히 하는 일이 곧 실학이라고 할 만하다. 실학에 익숙해지면 실심에 이를 수 있지만, 참으로 실심이 없다면 얻은 바인들 어찌 오래 자기 것으로 하리오?" ('書贈柳勵仲',<息山先生文集> 권11)

  친구에게 써 보낸 이 글에서 "참[實]에 힘쓰지 않고 겉만 꾸미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라는 전제는 당대뿐이 아니고, 요즘 세상에 더 절실한 비판이며 충고이리라. 이만부는 "하늘도 '참'이 있어서 하늘이 되고, 땅도 '참'이 있어 땅이 되듯이, 사람도 '참'이 있어야 사람이 되는 것이라 하고, 실심이 없으면 실사(實事)가 없음을 강조해 마지않았다.

  여기서 이만부가 '실심'을 사람의 마음뿐이 아니고 하늘과 땅까지도 다름없이 사람답게 하는 요소로 이해했다는 데 주목하면, 내 마음에 실심이 있으면 하늘의 마음[造物의 生意]과 땅의 마음이 같은 실심으로 사람답게 된다는 이일(理一)의 이치에 이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요산요수(樂山樂水)는 산을 본다고 어질어지고, 물을 본다고 슬기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곧, 어짊[仁]과 지혜[智]를 체득하여 마음에 얻으면 저절로 이 같은 뜻이 있어서 가히 안팎의 몸이 합해진다."('조성지에게 답함(答趙成之'(二書)<文集>卷六)

  산과 물은 우리의 큰 몸이며, 살이며 피다. 우리의 이 큰 몸이 4대강 삽질로 찢기고 신음하며 죽어 간다. 강은 산에서 흘러 스스로 큰물을 이루어 바다에 이른다. 이것이 순리이며, 이렇게 숫만년 오늘에 이른 강 스스로의 지혜이며, 자연이다. 자연은 스스로 있는 '참 마음'이다. 강을 파는 일은 산을 파는 일이며 하늘의 마음을 파는 일이다.

 

 

<37> 살 만한 땅(可居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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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택리지(擇里志)>를 써서 삶의 지리학을 시도한 실학자다. 특히 그는 이 책에서 '가거지'를 큰 주제로 사대부(士大夫)의 살 만한 땅을 논했다는 점에서, 이 시대에 발달한 풍수지리(風水地理)와 함께, 사찬(私撰) 인문지리지로 역사적 저작을 남겼다.

  "무릇 살 터를 잡는 데에는 지리(地理)를 첫째로 삼으며, 생리(生利)가 그 다음이고, 그 다음은 인심(人心)이며, 다음이 산수(山水)이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가 모자라도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지리가 좋더라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수 없으며, 생리가 좋더라도 지리가 나쁘면 또한 오래 살 수 없다. 지리와 생리가 갖추어 좋더라도 인심이 착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며, 근처에 볼만한 산수가 없으면 성정(性情)을 원만히 할 수 없다.(<복거총론(卜居總論)>)

  18세기 전반기 이익(李瀷) 문하의 실학자로, 정계에서 몰려난 경기 남인인 그는 새로운 가거지를 찾아야 할 형편이었다. 이중환은 일찍이 24살에 과거에 합격하고, 32살에는 정 5품 병조좌랑(兵曹佐郞)의 벼슬에 올랐으나, 보름 뒤에는 당쟁에 휘말려 쫓겨나고, 36살에는 목호룡(睦虎龍)의 일당으로 구금되고 절도(絶島)에 유배되는 소용돌이를 겪었다.

  그 덕분에 전라도와 평안도를 뺀 온 나라를 유랑하며, 그는 사대부의 가거지를 모색했고, 발로 뛰는 지리학자로 이 책을 써냈다. 그런데 가거지가 '지리ㆍ생리ㆍ산수'와 함께 '인심'을 중요 요소로 든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처가 쪽의 풍수가[地官] 목호룡과 20대부터 명당을 찾아 나라 안의 산과 들을 헤맨 사람이지만, 이 책에서는 죽어 묻힐 묘소가 아니라 양택(陽宅), 곧 살 만한 땅에만 관심을 두었다. 사대부뿐이 아니고 모든 백성이 살 만한 땅을 찾아 쓴 글이 '복거총론'이고, 그 중에도 '인심'의 결론은 그의 정치평론이며, 삶의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시골에 살려면 인심이 좋고 나쁜 것을 따질 것 없이 같은 당색(黨色)이 많이 사는 곳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고, 문학을 연마하는 일을 닦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대부가 살지 않는 곳을 택하는 것만은 못하니, 문을 닫고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며 혼자 자신을 잘 수양한다면 비록 농민이 되든 공장이가 되든 장사아치가 되든,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인심>)

  '인심'이 아니라 '도심(道心)'을 말하고, 혹은 실심(實心)을 말해온 사대부들이 퇴폐하여, 사대부가 살지 않는 곳이라면 인심을 논할 것도 없다는 역설. 사대부라면 오늘날의 사회 지도층? 인심은커녕 민심도 모르는 이런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라면, 그곳이 가거지라는 결론. "모두 버리고 떠난다"는 수경 스님 소식이 잠시 요즘 인심을 상징하는 듯 허허하다.



[김태준의 문향] <38> 임윤지당, 한국여성지성사의 샛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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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윤지당(任允摯堂ㆍ1721-1793)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철학자였다. 어찌 윤지당 한 사람에 그칠까마는, 윤지당이 자기의 문집 초고를 지계로 올려 보내며 쓴 글을 읽으면, 조선 시대에 이런 여성 철학자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조선 여성 지성사(知性史)가 새삼 놀랍다.

  "나는 어려서 성리학이 있음을 알았다. 자라서는 그것을 좋아하기를 맛있는 음식이 입에 맞는 것 같아 그만두려 해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자라는 데 구애 받지 않고 마음 속으로 방책(方策)에 실려 있는 성현의 가르침을 연구했다. 그러기를 수십 년 하고 나니 뭔가를 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글자로 쓰고 싶지 않아서 마음 속에 묻어 두고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죽음을 앞두고 보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초목과 같이 썩어 버리고 말까 걱정이 되었다. 그리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는 여가에 틈을 내어 글로 썼더니 어느 사이에 큰 두루마리 하나가 되었다. 그 내용은 모두 40편인데 첫머리 '송씨 아내의 전(傳)'부터 '안자의 즐거움(顔子所樂論)'이란 8편의 글은 내가 시집오기 전에 지은 것이고, '자로를 논함(子路論)' 이하는 중년과 만년에 지은 것이다. 내 지식의 뿌리는 얕고 보잘것없으며 글재주는 짧고 모자라서 오묘한 뜻을 밝히지도 못해 뒷날에 남길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죽은 뒤에 이것이 항아리 덮는 종이나 되고 만다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이것을 한 책자로 엮어 아들 재준에게 준다. (하략)" (이혜순ㆍ정하영 역편,《한국고전여성문학의 세계》산문편, 이화여자대학출판부)

  조선 여자로 '성리학'을 말하는 일만으로도 전례를 보기 어려운 일인데, 윤지당은 어려서부터 이 성리학을 알았다니 학문적 자각이 놀랍다. 더구나 자라서는 학문을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고, 그렇게 수십 년 홀로 정진하여 어느 경지에 이르렀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문집으로 묶어 아들에게 보내며 이 글을 남겼다.

  물론 그미는 기호학파의 두드러진 철학자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의 누이이고, 그의 격려를 받으며 공부했다. 그러나 학문은 홀로 갈고 닦는 연찬의 과정이며, 이 글 속에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게다가 성리학(性理論)은 물론, 성리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심성 수양의 실천적 모습들이 스스로 쓴 글들에 돋보인다. 더구나 시집 온 18살 전에 벌써 전기와 논문 8편을 썼다 했고, 결혼한 지 8년 만에 홀로된 어려운 평생을, 주경야독으로 문집까지 남긴 학문적 열정은 가히 한국 여성 지성사의 귀감이라 할 만하다. 그 오라버니 녹문도 중국의 철학자 "정자(程子) 집안의 따님은 대수롭지 않다"고 평했다는 지성이다.

  마침 지난 25일(음력5월 14일)은 윤지당 서거 217주기로, 고향인 원주 여성계가 나서서 헌다례(獻茶禮)와 백일장을 열어 추모하고 현창했다는 보도이다(<강원도민일보>참조). 윤지당은 반세기 뒤에 강정일당(姜靜一堂ㆍ1722-1832)이라는 후배를 촉발한 바 있지만, 이제 인문학은 여성들의 학문이 되었다는 말이 윤지당의 후예들에게서 이루어지는 꿈을 보는 오늘이다.

 

 

[김태준의 문향] <39> 홍대용의 <의산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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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ㆍ1731~83)은 일찍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36살에 연행사를 따라 중국에 다녀온 연행(燕行)을 평생 보람으로, 18세기를 산 실심실학자였다. 2,600여 쪽에 이르는 국문본 <을병연행록>과 함께, 이 여행체험을 바탕으로 자기의 사상을 집대성한 철학소설 <의산문답(?山問答)>을 남겼다. 책은 조선의 학자 허자(虛子)와 의산에 숨어사는 실옹(實翁)의 대화체로 쓰였다.

  "오륜(五倫)과 오사(五事ㆍ외모와 말과 생각)는 사람의 예의다. 사람의 눈으로 만물을 보면 사람은 귀하고 만물은 천하며, 만물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만물이 귀하고 사람은 천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처지에서 바라보면 사람과 만물은 평등한 것이다."

  30년 공부로 천리(天理)를 깨쳤다던 허자가 실옹을 만나 새로운 깨달음에 이른 결론으로, 생태주의 생명사상을 일찍이 갈파한 선구적 주장이라 할 만하다. 이른바 홍대용의 '인물균(人物均)'사상이며, 사람은 물론 자연과 사람이 차별 없는 평등의 생명사상을 담고 있다. 이런 이치로 우주에는 위와 아래도 없고, 안과 밖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만물 가운데 스스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고, 사람이 사는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며 또한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여, 자연지배는 이제 자연의 대반격에 직면했다. 그러나 지구는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며, 무한한 우주의 한 별에 지나지 않는다. 태양계 또한 무한한 우주의 한 별무리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별무리는 우주에 무한하다. 이것이 무한한 우주 속에서는 중심이란 따로 없다는 홍대용의 <우주 무한론>이다. 지구가 태양계의 한 중심이면서 우주의 한 중심이듯이, 내가 있는 자리가 한 중심이다.

  이런 원리라면 역사에도 중심은 없다. <춘추(春秋)>가 중국의 역사라면, 각 민족은 각 민족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 <의산문답>의 이른바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이다. 이것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 중심주의를 타파했다. 중세 보편주의를 벗어나 자기 역사를 중심에 놓는 이런 역사의 깨달음은 18세기 조선 실학에서 비로소 나타난 역사의 자각이었다. 이것은 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 곧 사람과 사물의 성질은 같은가 다른가를 다투어 온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논쟁의 1세기에 걸친 축적이며, 조선 철학이 이른 큰 도달점이었다.

  18세기 홍담헌의 고뇌는 <민통선 평화기행>(창비)과 같은 평화운동을 이어 온 사진작가 이시우(1967~) 선생에게서는 사람 몸의 중심을 묻는 질문으로 구체화한다. "아픈 곳이 치유될 때까지는 온통 신경이 거기에 집중되기 때문에" 몸의 중심이 아픈 곳이듯, 사회의 중심도 아픈 곳이다. "세계의 중심 또한 전쟁과기아와 빈곤으로 인하여 '아픈 곳' 입니다. '아픈 곳'에 사회의 모순과 세계의 모순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시대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예술가에게 그것은 숙명의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이시우 <옥중서신>)

 

 [김태준의 문향] <40> 연암 박지원 '회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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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ㆍ1737~1805)은 18세기 실학자로서는 물론,<열하일기(熱河日記)>의 명문으로 최고의 명성을 얻은 문장가이다. 일찍이 교우도(交友道)를 역설한 아홉 편의 단편(九傳)을 지은 것이 젊은 때의 일인데, 그런 연암이 가장 친애하는 사우(師友)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ㆍ1731~83)의 중국 교우록에 부친 서문의 끝에 이렇게 썼다.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탄복하여 이렇게 중얼거렸다. 홍군은 벗 사귀는 법에 통달했구나! 나는 이제야 벗 사귀는 법을 알았다. 그가 누구를 벗으로 삼는지를 보고, 누가 그를 벗으로 삼는지를 보며, 또한 그가 누구를 벗으로 삼지 않는지를 보는 것, 이것이 나의 벗 사귀는 방법이다."(박희병 정길수 외 편역;<연암산문정독>,돌베개)

  홍담헌은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실학에 정진한 참 선비로, 35살에 연행사의 서장관이 된 숙부(洪檍)를 따라 연행(燕行)하게 된 행운을 하늘이 자기를 세상에 내신 뜻이라고 기뻐한 사람이다. 게다가, 북경의 인사동거리' 유리창(琉璃廠)에서 엄성(嚴誠) 등 세 사람의 항주(杭州) 선비를 만나 국경을 초월한 평생의우정을 맺고 감격한 필치로 <건정동필담(乾淨?筆談)>을 엮었다. 청나라 선비들과 두 달을 사귀며 주고받은 필담(筆談)이며, 시문과 편지들을 엮어 한 책이 되자, 담헌으로서는 당연히 가장 아끼는 후배 박연암에게 머리말을 청했고, 이렇게 이루어진 이 서문과 우정이 모두 아름다운 한 폭의 말로 된 시화(詩畵)를 이루었다.

  연암 뿐 아니고 박연암의 제자로 박제가(朴齊家)는 이 회우록을 읽고 "밥 먹던 숟가락을 잊고 먹던 밥알이 튀어나오도록" 감동했다고 했고, 이덕무(李德懋)는 이 회우록을 연구하여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라는 글을 지었다. 이덕무는 이렇게 말했다.

  "박중미(朴仲美) 선생이 영웅과 미인은 눈물이 많다고 했다. 나는 영웅도 미인도 아니지만, 한번 이 회우록을 읽으니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 회우록을 읽고 마음을 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과는 친구를 맺을 수 없다.(<국역청장관전서>)"

  '박중미 선생'은 다름 아닌 연암 선생이다. 아마도 이덕무 스스로 이 글을 읽고 적잖게 울었다는 표현일 터이며, 연암 선생 앞에서 이렇게 극언(極言)하여 마지않았을 터이다. 연암이 <방경각외전자서(放瓊閣外傳自序)>에 쓴 다음 말은 동아시아 교우론의 결론이라 할 만하다.

  "우도(友道)가 오륜(五倫)의 끝에 놓였다고 해서 낮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오행(五行) 중의 토(土)의 기능이 고루 사시(四時)의 바탕이 되는 것과 같다. 부자ㆍ군신ㆍ부부ㆍ장유 간의 도리에 붕우간의 신의가 없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으로서 떳떳하거나 그렇지 못한 것을 우도(友道)가 다 바로잡아 주는 것이 아닌가? 우도가 끝에 놓인 까닭은 뒤에서 인륜을 통섭(統攝)케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