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허난설헌의 꿈과 세 가지 한(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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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선조 때 학자 초당 허엽(草堂 許曄)과 후처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봉(?) 균(筠)과 초희(楚姬ㆍ1563-1589)는 모두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남매 문인이었다. 동시에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상 속에서 부딪치다가 모두 일찍 세상을 버리는 치열한 삶들을 살았다.

  그 가운데 허난설헌으로 더 잘 알려진 초희는 무한한 꿈과 넘치는 자의식 속에 세 가지 한(恨)을 품고 27년의 짧은 삶을 살았다고 알려졌다. 난설헌은 여덟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다는 천재로, 일찍부터 신선세계를 꿈꾸었다. 열너덧살에 안동 김씨 명문가의 김성립(金誠立)에게 시집갔지만, 그는 난설헌이 죽던 해에야 겨우 문과에 합격했다는 평범한 남자로, 이들 부부는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였다고 한다.

  이런 가정 분위기에서 임진왜란 이전 시대를 살았던 난설헌은 자의식이 넘치는 이른바 세 가지 한을 가졌다고 전한다. 첫째, 이 넓은 세상에 하필이면 왜 조선에 태어났는가. 둘째, 하필이면 왜 여자로 태어나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서러움을 지녀야 하는가. 셋째, 수많은 남자 가운데 왜 하필이면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16세기의 끝자락을 산 깨어있는 조선 여성으로 난설헌의 이런 생각에는 어디까지나 중국과의 관계, 혹은 남편과 자식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존재의식이 뚜렷이 배어 있다.

  최초로 조선 여성 지성사(知性史)의 체계를 세운 이혜순(李慧淳) 교수는 조선 후기 여성 지성사를 여는 인물 김호연재(金浩然齋ㆍ1681-1722)를 중심으로, 임병양란(壬丙兩亂)을 한국 여성사의 한 획기(劃期)로 삼은 바 있다(<조선후기조선여성사>ㆍ이화여여자대학교출판부ㆍ2007).

  그러나 예술 작품사의 면에서라면 조선 후기의 시인 자하 신위(紫霞 申緯)가 난설헌의 시를 규수시(閨秀詩)의 으뜸으로 꼽았고(<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35수), 중국에서는 <열조시집(列朝詩集)>에 난설헌 시 19편이 소개됐으며, 1606년에는 <난설헌시집>이 간행됐다. 일본에서도 1711년 난설헌시집이 간행되는 등 그의 한 많은 짧은 생애에 비하면 그의 이름은 동아시아 세 나라에 떨쳤다. 여기 한두 수 한시 작품을 소개한다.

'봄비'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찬바람이 장막 속 숨어 들을 제/뜬 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송이송이 살구꽃 담 우에 지네

(春雨暗西池 輕寒襲羅幕 愁意小屛風 墻頭杏花落)

'수양버들 가지에'(楊柳枝詞)
안개랄까 봄비에 어리운 버들/ 해마다 가지 꺾어 가는 임 줬네/ 봄 바람은 이 이한(離恨) 모르노란 듯/ 낮은 가지 휘둘며 길만 쓰나니

(楊柳含煙溺岸春 年年攀折贈行人 東風不解傷離別 吹却低枝歸路塵)(안서 김억(岸曙 金億)의 <조선여류 한시선역, 꽃다발>)

'봄비'에서는 "뜬 시름 못내 이겨 병풍에 기대는" 아픔이 있고, '수양버들 가지에'서는 "해마다 가는 님"과 "이한(離恨)" 곧 헤어짐의 '한'이 있다. 난설헌의 세 개의 한은 그대로 한국 여인의 한일 터이며, 이 한을 품으며 풀어가며 한국 여인은 또 그렇게 살아가리라.

 

 

<32> 신흠의 교우록과 <선비의 교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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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인파 속에 놀면서 제일가는 사람과 벗을 삼지 못하면 선비가 아니다. 자신이 제일가는 선비가 된 다음에야 제일가는 사람이 찾아오는 법이다. 제일가는 사람과 벗을 삼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 제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제일이라 하는 것도 한 가지가 아니다. 문장의 분야에서 제일가는 것도 제일이고, 재주 중에서 제일가는 것도 제일이고, 말을 잘하는 것도 제일이니, 제일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모두 내가 말하는 제일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제일은 오직 덕이 제일가는 것과 학문이 제일가는 것이다."(신흠;《국역상촌집 》제39권 《잡저(雜著)》 <택교편(擇交篇)>)

  상촌 신흠의 교우론은 벗 사귀는 도리와 함께 글쓴이의 사람됨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글이다. 이 글은 그 벗을 사귀고 벗이 되는 도리와 함께 스스로의 사람됨을 성찰하는 교우론이다. 그것은 "제일가는 사람과 벗을 삼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 덕과 학문에서 제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 속에 드러나 있다.

  신흠은 스스로 문장으로 혹은 하는 일로 사귄 벗이 모두 당대의 명류들이었다고 하면서도, 특히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한 사람만을 들어 그와의 사귐을 소중히 한 사람이다. 신흠이 이항복을 위해서 쓴 다른 글에서는, 두 사람이 한 번 보고 곧 망년지우(忘年之友)가 되었으며, 마을을 마주하고 30년을 살았다고 했다. 망년지우는 나이의 차이를 잊고 친구가 된 사이로, 백사 이항복은 신흠보다 열 살 손위였다. 신흠은 스스로 스승을 삼을 만한 곳이 없었다고 자주 말해온 사람이지만, 백사와는 서로 말을 나누지 않고도 생각이 같은 때가 많았고, 만년에는 한층 더 뜻이 맞았다고 했다.

  신흠이 이항복을 위해서 쓴 글로 <영의정 백사 이공 신도비명>은 6,200자 가까운 대 장편의 규모에다, 그 격조에서도 단연 압권이다. 영의정을 지낸 백사를 돌에 새기는 첫마디부터 이 글은 "임진왜란에 명나라 원군을 요청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시 찾게 한 신하"라고 평했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이이첨 등이 강토를 도탄에 빠트렸을 때는 큰 소리로 고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운 신하였다고 했다. 그는 백사 밖에도 장유(張維, 1587-1638)와 이정구(李廷龜, 1564-1635)와 이수광(李?光, 1563-1628)과도 친했으나 백사와 같지 않았다.

  우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가 있어야 한다. '내'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사람의 벗이 될 수 있다.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중국과 한국에는 이런 '자기'가 있는데, 일본에는 '사회'만이 있고, '자기'가 없어서 우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柄谷行人;《윤리 21》, 송태욱 옮김)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한 뜻일테지만, 타산지석을 삼을 만하다. 18세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의 <건정동회우록(乾淨?會友錄)>에 쓴 박지원(朴趾源)의 머리말에는 "그 벗 삼는 바도 보았고, 그 벗 되는 바도 보았으며, 내가 벗하는 바를 그는 벗하지 않음도 보았다"고 했다. 교우론의 전통을 가늠할 수 있다.


<33> 매창, 재주와 정이 넘쳤던 부안 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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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창(梅窓)으로 널리 알려진 부안 명기 이계랑(李桂娘ㆍ1573~1610)은 임진란 전후에 한시(漢詩)를 잘 쓴 시인으로, "북의 황진이 남의 매창"으로 불리었다. 허균(許筠)과 유희경(劉希慶ㆍ1545~1636)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 소객들이 그를 찾아 부안을 오르내렸고, 그들과 주고받은 시 58편이 <매창집>에 전한다. 38년이란 짧은 삶에도 그 예술적 재주와 정(情)으로 나라 안에 이름났다.

  "일찍이 남국에 계랑 이름 소문 나/ 글 솜씨 노래 재주 서울까지 울리더니/ 오늘에야 그 모습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 입고 내려온 듯하구나

(曾聞南國癸娘名 詩韻歌詞動洛城 今日相看眞面目 却疑神女下三淸) <촌은집>"

  유희경이 젊어서 부안에 놀며 <계랑에게 준 시(贈癸娘)>인데, 계랑 또한 그를 보자, "유(劉)와 백(白) 가운데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때 유희경과 만리(萬里) 백대붕(白大崩)이 문명을 떨쳤기 때문이다. 백대붕은 임진년에 의병활동 중에 전사했고, 유희경도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보아, 임란 전 유희경이 마흔여덟, 매창이 스무 살쯤의 일이리라. 그리고 지루한 전쟁이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1601년 7월에 매창은 부안을 지나던 교산 허균과 만났다. 교산은 이때 비를 피해 객사에 머물렀는데, 매창이 거문고를 끼고 찾아와 하루 종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고 했다. 교산이 33, 매창 29살이던 한창 시절에 그는 매창을 이귀(李貴)의 정인(情人)이라 조심했고, 밤이 되자 매창이 자기 조카딸을 교산의 침소에 들여보냈다고 했다. 이귀는 일찍이 장성현감과 김제군수를 지낸 사람이고, 그 전에 매창은 석주(石洲) 권필(權?)과도 사귀었고, 1602~03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된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과 사귀었다고 한다. 1607년에는 유희경이 일 때문에 부안에 와서 15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매창이 그에게 열흘만 묵어가라는 시를 주었다 한다.

 

  매창의 정과 그리움을 가장 잘 그려 유희경에게 주었다는 <이화우> 시조 한 수가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애창된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을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매 <진본 청구영언>

  배꽃 흩날리는 봄날에 울며 잡고 이별한 그 님을 천리 밖에서도 잊지 못하는 가을날의 외로운 정이 살갑다. 그 매창이 38의 아까운 나이로 죽었을 때 유희경은 "이원(梨園)에 한 곡조 남겨놓고 갔구나(只有梨園餘一曲)"하여 그도 '이화'로 조상했다. 허균은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였다(淸歌解駐雲)"는 시를 읊어 통곡했다고 하는데, 남녀의 정은 하늘이 준 것이라고 강조했던 교산과 매창의 평생 사귐이 진정(眞情)을 실감케 한다. 부안의 아전들이 그미의 시편을 모아 《매창집》을 전했는데, 그미가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는 매창 뜸(매창 마을: 가람 이병기 선생의 시비에서 인용)에선 오늘도 남녀노소 <이화우>를 읊으리라.

 

 

<34> 장유 "시는 천기(天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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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는 천기(天機)이다. 소리로 울리고 색깔과 윤기(色澤)로 빛나니 그 청탁(淸濁)과 아속(雅俗)이 자연에서 나온다. 소리와 색깔과 윤기는 사람이 만들 수 있지만 천기의 오묘함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다. …… 왜 그런가? 참됨이 없기 때문이다. '참'이란 무엇인가? 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장유;<석주집 서(石洲集 序),《국역석주집)》권 1, 참조)

  계곡(谿谷) 장유(1587-1638)는 이른바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하여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택당 이식과 함께 조선조 한문 4대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리고 임병양란 이후 양명학을 받아들여 허학(虛學)을 비판하고 '참'을 회복하자는 주장과 실천을 편 실심(實心) 실학자로 이름났다. 조선 후기 비평가의 한 사람으로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양란 뒷시대의 허학을 비판하면서, 이런 풍조와 달리 '참'에 가까웠던 사람으로 서경덕과 함께 장유를 꼽은 바 있다. 서경덕이 주자학의 체계를 기일원론으로 지양하여 안에서부터 개혁하고자 했다면, 장유는 불교나 양명학과 같은 주자학 밖의 사상에서 대안을 찾으려 한 사람이었다.

  장유는 말하기를, 중국에는 학술이 여러 갈래여서 문(文)이나 길은 하나가 아닌데, 우리나라는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정자(程子) 주자(朱子)만을 칭송하고 다른 학문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한다고 했다. 왜 그런가? 그는 이것이 참됨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이란 무엇인가? 천기를 일컫는 것이다. 그는 이런 꽉 막힌 구속 속에서는 실심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비판하고, 여러 학문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학문이 열매 맺을 수 있다고 했고, 스스로도 애썼다. 열매는 실(實)이며, 가득 참이며, 참됨(眞)이다.

  위에 보인 <천기론>은 이런 그의 사상의 일단이다. 그는 특히 문장으로 뛰어나서, 당대의 명사인 송시열과 김창협 등이 모두 장유의 문장을 조선 제일로 평했다. 그런 장유가 스스로 시는 잘 못한다고 겸사하면서도, 당대의 허학을 비판한 것처럼 또한 시를 천기로 평했다. 천기는 하늘의 기운이며, 자연의 기운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런 천기를 타고난 시라야 참 시라는 것이며, 이런 노래라야 자연을 움직이고 귀신을 통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의 말만으로 시를 볼 뿐, 시인의 사람됨으로 시를 볼 줄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조선조 최대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조선 건국의 이념이었던 주자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상체계를 천기에서 찾은 사람들에는 허균과 김창협 등이 있었다. 그리고 마음의 본바탕을 천리, 천기로, 그 작용을 정(情)으로 본 것은 장자(莊子)나 양명학에 가까웠다.


  "시는 천기다"라고 하는 말은 시의 본바탕이 '참'임을 뜻한다. 장유를 "실심에 바탕하고 실학에 법(法)하였다"(朴?, 《계곡집(谿谷集)》序)고 한 평가도 우리 학문의 새 전통으로 '실심 실학'이 참 학문으로 싹트던 변화를 웅변으로 말해 준다.

 

 

<35> 김만중의 비판지성과 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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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에 중세적 규범에 대한 찬반 논란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것은 17세기였다. 당대 대표적 문인 중 한 사람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92)은 <서포만필(西浦漫筆)>을 써서, 비판지성으로 새로운 인문정신을 가늠했다.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한 김익겸(金益謙)의 유복자로 태어나 유학자로 출세한 서포는 임ㆍ병 양란 뒷시대의 허학(虛學)을 비판하면서, 본지풍광(本地風光)과 같은 불교용어를 이끌어 새로운 인문(人文)의 질서를 모색하였다. 유학자인 그가 이런 사상적 변화에 이른 것은 37살, 당쟁에 휩쓸려 유배생활에 내몰리면서부터의 일이다. '본지풍광'은 선불교 용어다.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성품을 찾아 스스로의 본바탕(本地)을 알면, 저절로 흘러 넘치는 지혜(風光)로 부처님의 어진 마음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금강산을 보기로 들어, 정작 산에는 가보지도 않고 그림이나 보고 책이나 뒤지면서 금강산을 말하는 그런 학문을 권리풍광(卷裡風光) 지상면목(紙上面目)이라고 하여, 거짓 공부로 비판했다.

  김만중이 이런 거짓 풍조와는 달리 본지풍광, 곧 '참'에 가까웠던 사람으로 서경덕(徐敬德)과 장유(張維) 두 사람을 꼽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서경덕이 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 지양(止揚)하려 한 주자학의 체계를 장유는 양명학을 받아들여 주자학 밖에서 부정하는 유학의 위기에 대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선의 건국 이념인 주자학이 뿌리부터 흔들린 것은 임ㆍ병 양란 이후에 더욱 두드러졌고, 불교나 양명학과 같은 이단적 사상에서 비판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은 이런 시대변혁의 단적인 보기였다. 김만중이 이 두 선배 학자를 지명하며 불교 논리로 유학의 거짓을 비판한 뜻은 이런 악착스러운 구속 속에서는 실심(實心)으로 향학(向學)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 때문이었다. 서포는 같은 글에서 문학작품에도 본지풍광이 있으며, 이렇게 거짓이 없고 참된 말로 된 문학이라면 모두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통할 수 있다고 하여, 민중의 말과 국어문학을 또한 중시했다.

  이렇게 17~18세기에 발흥한 실심실학(實心實學)은 '참' 학문 운동이며, 실학의 본바탕이 실심에 있었고, 이것이 조선 실학의 제일 개념이다. '실학'은 17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약 200년간 조선에서 일어나 꽃핀 학문으로, 실학을 일으키고 발전시켜 온 나라는 조선이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제 나라의 학술사상사를 인식하는데 쓰지 않았던 개념이다. 그러기에 실학을 근대 학문으로 체계 세운 정인보(鄭寅普) 선생도 실학을 실심의 학문으로 정의했다.

  실학이 실용(實用)의 학문이란 전제에서 동아시아 근대화에 이바지하였다는 평가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경제를 위해서 온 나라 강(江)을 파헤치는 것과 같은 실용주의는 실학이 아니다. 실학은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고 지속 가능한 생명의 문명을 만들어 갈 학문, 학문과 삶이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어야 할 참 학문운동이다. 함석헌 선생이 <새 삶의 길>에선 한 말로 결론을 삼을 만하다. "참은 맞섬(直面)이다. 하나만 아는 일이다.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