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준의 문향] <26> 이율곡의 '학교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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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栗谷 李珥ㆍ1536-84)는 16세기 후반 이퇴계(李退溪)와 함께 조선 사상계의 두 거장이면서, 임진왜란 전 폭풍전야의 조선의 사회 모순에 끊임없이 대안을 토로하고 몸소 활동했던 문신이며, 철학가이며 교육가였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끈 유학사상에서 가장 두드러져 있지만, 특히 성인(聖人)의 도를 편 <성학집요(聖學輯要)>와 교육사상을 요약한 <학교모범(學校模範)> 등 교육관련 저서에서 실제적이고 주목할 업적들이 적지 않다. 그 중 <학교모범>에서는 풍습이 경박해지고 양심이 마비되어 가는 사회를 비판하고, 뜻 세우기[立志]로부터 독서와 학교생활에 이르는 16가지 구체적 덕목을 논하여 정의사회 구현의 꿈을 펼쳐 보였다. 여기에 <의를 지키는 일[守義]>의 한 대목을 보인다.

"배우는 자는 무엇보다도 의(義)와 이(利)의 분별을 밝게 하여야 한다. 의란 것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도둑의 무리이니 어찌 경계하지 않으랴? 선을 행하면서 이름을 구하는 자는 또한 이(利)의 마음이니, 군자는 그것을 구멍을 파는 도둑보다도 더 심하게 보거늘, 하물며 불선(不善)을 행하면서 이득을 보겠다는 자이랴? 배우는 자는 털끝만큼의 이욕이라도 가슴 가운데 머물러 두게 해서는 안 된다. 옛사람은 부모를 위해서 노무(勞務)에 종사해서 품팔이와 쌀을 짊어지기도 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개결(介潔)하여 이(利)의 더러움에 물드는 일이 없었건만, 오늘날의 선비는 온종일 성현(聖賢)의 글을 읽고도 오히려 이익을 버리지 못하니 슬프지 않을 수 없다."(<국역 율곡집>I <학교모범>)

'의'란 마땅하다는 뜻이며, <의를 지키는 일>을 강조하는 것은 "의가 곧 바른 길"이기 때문이다(<성학집요>Ⅱ). 교육을 말하면서 강조하는 '의'는 옮음, 곧 정의(正義)'이며, 의리(義理)이며, 또한 '의미'의 뜻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인격의 바탕이며, 따라서 사람을 키우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며, 그 자체로서 목적이다. <행장>에 따르면, 율곡은 "한결같이 성인(聖人)을 표준으로 삼아, '경(敬)'과 '의'를 아울러 힘써서, 가르침 없이 스스로 학문을 이루었다"고 했다.

여기서 율곡이 '의'와 함께 '이(利)'를 말하는 데 주목할 일이다. <어록>에 따르면 "'의'와 '이'는 본디 하나였고, 옛날에는 선(善)을 행하면 복이 되었으며, 선은 이롭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뒷시대에 악을 행하는 사람이 이익을 보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이롭지 못한 세상이 되면서 의와 이가 나누어졌다"고 했다.

지금 세상은 정치가는 물론, 서울의 선출직 교육감과 백여 명 교장들이 사리(私利)를 탐하여 구속 혹은 입건되고, 무상급식을 추진하는 지방 교육감은 사리를 위한 것이 아닌데도 고발당하는 현실이다. 더구나 학생들은 오늘도 '수단[利]'을 위해서 무한경쟁에 내몰리는 현실에서, 율곡 선생의 500년 전의 가르침이 '정의'를 세우는 우리 시대의 <학교모범>으로 새삼 절절한 까닭이다.

 

[김태준의 문향] <27> 정철의 '관동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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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93)은 임진왜란 앞뒤 시대에 활동한 문신으로, 한국 시가문학사를 빛낸 대표적 문인이다.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사미인곡(思美人曲>'등 4편의 가사(歌辭)와 단가[時調] 74수를 남긴 조선조 제일의 시인으로, 임억령·김인후·기대승의 성산가단(星山歌壇)에서 배우고, 호남가단(湖南歌壇)의 중심이 된 문인이다. 특히 그의 국문 시가는 우리말의 구사와 조어에서 뛰어나서 "악보(樂譜) 가운데 으뜸 노래[絶調]로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에 비견되고(홍만종;<순오지(旬五志)>), 혹은 "동방의 <이소(離騷)>"(김춘택;<북헌집(北軒集)>) 로 굴원(屈原)에 비견된 평가를 받았다.

특히 '관동별곡'은 송강이 45살 되던 해(1580)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관동팔경을 구경하고 쓴 기행가사로, 294구로 쓴 장가이다.

"소향로 대향로봉 눈 아래 굽어보며/ 정양사 뒤 진헐대에 다시 올라 앉아보니

금강산  참 모습이 여기서는 다 뵈는구나. /어와 조물주가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날거든 뛰지 말거나 섰거든 솟지 말거나 / 부용을 꽂아놓은 듯 백옥을 묶어놓은 듯

동해를 박차는 듯 북극성을 괴고 있는 듯/ 높을시고 망고대 외로울 사 혈망봉이

하늘에 치밀어 무슨 일을 아뢰려고/ 천만 겁 지나도록 굽힐 줄 모르는가

아아 너로구나 너 같은 것이 또 있는가."(<관동별곡> 일부, 풀어쓰기)

금강산의 정맥(正脈)에 자리 잡아 볕 바른 곳 정양사(正陽寺)는 내금강의 40여 개 봉우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최고 전망으로 이름난 곳. 이 절 뒤 진헐대에 올라 앉아 금강산을 내려다보며 읊어낸 송강의 노래는 "이태백(李太白)이 다시 나서 고쳐 의론하더라도 여산(廬山)이 여기보다 낫단 말은 못하리라"고 했다. 겸제 정선(謙齋鄭敾, 1676-1759)이 1734년에 그렸다는 '금강전도'(국보 제217호)는 그림의 왼쪽에 무성한 숲이 어우러진 정양사와 진헐대를 배치하여 '관동별곡'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림 위에 붙인 제화시(題畵詩)에는 "만 이천 봉 개골산을 누가 참모습 그릴 건가?… 몇 송이 연꽃 해맑은 자태 드러내고 솔과 잣나무 숲에 절간은 가려있네"라 하였다.(유준영;<금강전도>해설 참조)

송강의 이 기행가사 또한 그보다 25년 앞서 나온 백광홍(白光弘,1522-56)의 '관서별곡'에서 영향을 받았고, 우리말을 맘대로 주물러서 구사한 솜씨는 그가 젊어서부터 익힌 호남가단의 시적 전통에 이어져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훈민가 제16')나, "한 잔 먹세거녀, 또 한 잔 먹세거녀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거녀..."('장진주사(將進酒詞)') 등 시조에서 더욱 빛났다.

보덕굴 벼랑 밑으로 이영로 박사를 따라 천연기념물 제232호 금강국수나무꽃을 찾던 내금강 기행을 떠올리며, 내외금강 길이 다시 열릴 날을 손꼽는다.


<28> 임란 포로 강항의 '간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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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은 강항(睡隱 姜沆,1567-1618)은  임진왜란때 일본에 끌려갔던 전쟁포로로, 덕천(德川) 일본에 처음으로 유교를 가르친 사람이며, 죽살이치는 포로 생활을 <간양록>으로 남겼다.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으로 호조랑(戶曹郞)이었던 그는 정유재란을 만나 군량미를 독려하는 직책으로 고향에 내려왔다가 왜군에 포로가 되었다. 정유(丁酉,1597)년 9월 14일에 가족과 함께 영광(靈光) 앞바다에 피난의 배를 띄우고 23일 왜적에 잡혔는데, 이 때 무안 앞 바다를 메운 600~700척의 거의 절반이 포로로 잡힌 우리나라 남녀를 실은 배였다고 한다.(<적중봉소(敵中封疏)>)

  문벌이 높은 문인학자였던 강항은 왜(倭)의 땅에서도 지방 토호의 보호 속에 일본에 퇴계학(退溪學)을 전한 유학의 스승이 되었고, 그 옛날 백제의 왕인(王人) 박사가 천자문을 전했던 뱃길로 그는 다시 조선 유학의 씨를 뿌린 제2의 왕인박사였다.

  그러나 4년이나 이어진 포로 생활 속에서 당연히 고국을 향한 망향(望鄕)과 도망할 노력이 이어졌고,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잡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보내졌다는 무관 이엽(李曄)이 도망하다 잡혀 자결하며 남긴 한 편의 절명사(絶命辭)에 큰 감명을 받았다.

  “봄이 금방 동으로 오니 한(恨)이 금방 길어지고/ 바람 절로 서쪽으로 부니 생각도 절로 바쁘구나./ 밤 지팡이 잃은 어버이는 새벽달에 부르짖고/ 아내는 낮 촛불처럼 아침볕에 곡을 하리./ 물려받은 옛 동산에 꽃은 응당 졌을 게고/ 대대로 지킨 선영(先塋)에는 풀이 정녕 묵었으리./ 모두 다 삼한(三韓)이라 양반집 후손인데,/ 어찌 쉽게 이역에서 우양(牛羊)과 섞이리.”(원 한문,<국역 해행총재>)


  전라 좌병영(左兵營)의 종3품 우후(虞侯) 벼슬로 포로 된 이엽은 고국 동포들과 결탁하여 배를 사서 하관(下關)까지 가서 왜적의 추적을 받자, 칼을 빼서 자결하며 이 시를 남겼다고 했다. 강항은 이 시를 얻어 보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이렇게 차운(次韻)했다.

  “만권의 책을 읽은 서생이 면목 없네/ 두 해나 궁발(窮髮)에서 숫양(?羊)을 먹이다니/ 인의(仁義)를 이루고 의를 취하는 것은 우리의 가훈(家訓)인데/ 아이들까지 개와 양에게 절하는 것 부끄럽네”(원 한문)

‘궁발’은 초목이 나지 않는 모진 땅, 이 땅에 포로 된 동포들에게 그는 격문을 보내 귀국을 독려하고, <적중봉소(敵中封疏)>로 비밀문서를 조선 임금에게 보냈다. 물론 스스로 귀국을 감행했다. 이 정유년에 포로 되었던 정희득(鄭希得)은 이때 일본에 끌려 간 조선 사람이 10만 이상이리라고 했는데(《月峯海上錄》), 고국으로 쇄환(刷還)된 수는 7,5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內藤雋輔;<文祿慶長役被擄人の硏究>,東京大學出版會).

<간양록>은 같은 이름의 방송극과 조용필의 애끓는 주제곡으로도 널리 알려진 임진란 실기문학이며, 강항의 자취는 그가 머물렀던 일본 땅 애원현대주시(愛媛縣大洲市)에 지금껏 역력하다.

 

 

<29> 지봉 이수광의 '조완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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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의 일대 사건으로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무려 7년이나 이어진 장기전쟁으로 문학사에 끼친 영향도 두드러진다. 이 시대의 문인 실학자로 지봉 이수광(芝峰 李?光,1563-1628)은 이 전쟁 체험과 시대적 반성의 기틀을 《지봉유설》20권으로 정리하면서, 백과전서적 내용 가운데도 세계의 지리와 지도에 두드러진 관심을 보인 사람이다.

  그 가운데 임진란 포로로 일본 무역선의 서기가 되어 안남(安南, 베트남) 등 해외로 활약했던 조완벽(趙完璧)의 사적은 이 책에서는 <이문(異聞)>조에 전했다. <조완벽전>이라고 한 이 글에서는 완벽이 약관에 정유재란을 만나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고, 장사하는 왜인의 서기가 되어 세 번이나 안남에 다녀 온 뒤에 고국에 돌아와 탈 없이 살았다고 전했다. 이 밖에 조완벽의 말이라 하여, 일본과 안남의 여러 이상한 이야기를 소개하여, 임진란 이후에 한국문학에서 지리개념과 세계인식이 확대된 모습을 두루 전한다. 이 조완벽의 전기는 이지항(李志恒)의 《표주록(漂舟錄)》에도 전하고, 이보다 자세한 <조완벽전>이 안정복(安鼎福)의 《목천현지(木川縣志)》에도 실려 전한다. 특히 안정복의 글에서는 조완벽이 안남의 총대감 문리후 정초(文理侯鄭?)의 환대를 받아 알게 된 사실로, 안남에서 이수광의 한시집은 없는 집이 없을 만큼 널리 읽히는 문학 교과서였다고 했다. 지봉은 일찍이 진위사(鎭慰使)로 명나라 북경에 갔던 1597년, 안남의 연행사(燕行使) 풍극관(馮克寬)과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에서 50여 일간 함께 머물며 사귄 바 있었고, 이때의 창수시(唱酬詩)가 두 나라에 회자(膾炙)되고, 특히 안남에서 지봉의 명성을 높였다.

두 사람의 옥하관 창수는 그보다 2 세기가 지난 1790년(정조 14) 열하(熱河)에서 조선 연행 부사(副使) 서호수(徐浩修)와 월남 이부상서 반휘익(潘輝益) 사이에 "천고의 기이한 만남[千古奇遇]"으로 반추(反芻)된 바 있었다(서호수;《연행기》제 2편). 이때 서호수가 조선의 지봉과 안남 사신의 창수시를 외웠고, 반휘익 또한 "지봉의 시는 운치가 순아(醇雅)하고, 풍극관의 시는 의장(意匠)이 굳세다"고 평하여 두 나라 문학 교류 200년의 역사를 재확인했다. <조완벽전>은 이렇게 《지봉유설》을 통하여 조선과 월남의 문학의 교류사를 전한다.

이 임란 전쟁에 장기[長崎] 노예시장에서는 포르트갈 상인들에게 팔려 나간 조선 포로의 수가 적지 않았다 하며, 조선 소년 다섯 명을 사서 인도의 고아까지 데리고 가 풀어 주었다는 피렌체 상인 까르레티의 증언(《동방견문록》)도 전한다. 그 가운데 안토니오 꼬레아는 로마에 이르러 신부가 되었다고 하며, 이 소년을 모델로 그렸다는 루벤스의 <한복을 입은 소년>은 또 다른 <조완벽전>일 터이다. <조완벽전>은 <한국사전(傳)>으로 방송된 바 있지만, 작고한 소설가 한무숙(韓戊淑) 선생이 소설 작업으로 나에게도 의견을 물으시던 미완의 <조완벽전>은 일본의 조선병합 100년을 뼈아프게 되돌아보는 한일관계사의 한 단면이며, 또한 한국으로 시집오는 수많은 월남 아가씨의 애환이기도 할 터이다.

 

 

<30> 허균이 지어 올린 사명당의 시호(諡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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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임진란의 승병대장(僧兵隊將)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포로 쇄환(刷還)에 몸바쳤던 사명당 유정(四溟堂惟政ㆍ1544-1610)의 입적(入寂)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임진란의 뒷수습을 위해 조선 조정이 일본으로 갈 사신으로 사명당을 뽑았을 때, "성세(盛世)에 이름난 장수도 많았지만/ 기이한 공(功)은 노스님이 으뜸이었네"라 노래한 젊은 문인 이수광(李?光)의 송별시가 널리 회자(膾炙)되었다. 이 시는 사명당이 이 전쟁에서 보여준 지도력과 왜국을 상대한 외교 능력을 칭송하고, 스스로 "허리춤에 찬 한 자루 긴 칼/ 오늘날 남아(男兒)된 것 부끄러워라"(《지봉유설》 원한문)고 끝맺고 있다.

  그런데 이런 승병대장 사명당이 해인사 홍제암에서 돌아가자, 그와 서산대사의 문하의 동문 후배이며 호남에서 의승병(義僧兵)을 일으켰던 처영(處英)이 그의 문집을 펴내고 비(碑)를 세우면서, 서문과 비문을 모두 교산 허균(蛟山許筠ㆍ1569-1618)에게 쓰게 했다. 허균은 전 해의 귀양에서 풀려나 전라도 부안(扶安)의 농장에 있으면서, 문집의 서문을 쓰고 또 비문을 지었다고 했다.

  사명당이라면 임진란 7년 전쟁에 승병(僧兵)을 일으켜 싸웠을 뿐 아니라, 임란 뒤 3,000여 명의 포로 송환과 전쟁 뒤처리까지 "그 기이한 공은 노스님이 으뜸"이었는데도, 스님이기에 비문에 시호(諡號)를 쓸 수 없다는 것이 교산의 마음을 짓눌렀다. 시호는 지체가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임금이 내리는 존칭인데, 허균은 임금에게 이를 건의할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적(私的)으로 사명당에게 시호를 지어 올리기로 하고,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설명을 붙여, "말법(末法)을 받들어 구한 것을 자(慈)라 하고, 한 교(敎)에 구애되지 않는 것을 통(通)이라 하며, 은택을 많은 백성에게 끼친 것을 홍(弘)이라 하고, 그 공이 국토를 거듭 회복한 것을 제(濟)라 하니, 이것이 시호를 정한 뜻이라 했다.

  허균은 불교와 나라에 아울러 공덕이 많은 큰 스님의 비를 세우면서 시호를 머리에 쓸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는 말로, "참람(僭濫)되게" 개인적으로 시호를 지어 올리는 변(辨)을 삼았다(조영록, 《사명당평전》 <백성이 바친 시호 '자통홍제존자'> 한길사 참조). 이 시호를 올리는 글에서는 종교의 구실을 피안(彼岸)에 이르는 길로 한정하지 않고, 사바세계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했던 사명당의 번뇌와 진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한편 시호의 새김은 허균 스스로의 삶의 자세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터이다. 대중을 구제하고 생명의 땅을 회복하고, 모든 종교에 회융(會融)하고자 한 것은 《홍길동전》과 <호민론(豪民論)> 등을 지은 허균의 뜻과도 통한다.

  허균이 중형[許?]을 따라 봉은사(奉恩寺)에서 처음 만난 그 사명당의 인상을 "훤칠한 키에 뜻은 원대했다"고 했는데, 이제 '훤칠한 키에' "진실이 곧 도반(道伴)이라"는 봉은사 현 주지 명진(明進)스님은 사명대사 입적 400년에 맞는 어떤 바깥바람에도 '자통홍제'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