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준의 문향] <20> 두시언해 '절구(絶句)'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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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이 파라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 빛이 불붙는 듯하다.

올 봄이 보건대는 또 지나가나니/ 어느 날이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해인고.

(江碧鳥逾白 山靑花欲然.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무제(無題)시 두 수 가운데 둘째 '절구(絶句)'로, 안록산의 난리에 피난하던 성도(成都)에서 지은 명편이다. 색채를 곁들여 기교를 다 한 시화(詩畵)는 아름다운 봄 경치에서 일어난 느낌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또 지나가는" 봄에 머물렀다. 일찍이 육당(六堂)이 시조로 옮겨 "강산이 때를 만나 푸른빛이 새로우니/ 물가엔 새 더 희고 산에 핀 꽃 불이 붙네/ 올 봄도 그냥 지낼 사 돌아 언제 갈거나"라 읊었고(이병주 <두시언해비주> 참조), 미당의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고 한 시상은 이 시의 "또 지나가나니"를 연상시킨다.


두시는 중국에서도 성당기(盛唐期)의 정점으로 평가되었고, 아예 시 공부의 모범으로 여겨진 송(宋)나라의 전통이 과거제도와 함께 고려조에 전해져서, 조선 시단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특히 두시에 관한 시험문제가 많이 나왔는데, 이퇴계(李退溪)도 두시를 논평하라는 과제를 '시사(詩史)'의 뜻으로 해석하여 급제했다. 두시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시 공부와 시험 문제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문학작품이리라.

언해 사업을 주도한 조위(曺偉)의 <두시언해 서문>((1481)에서도 시를 공부하고자 하면서도 두보를 어렵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석을 달고 언해를 한다고 했다. 훈민정음 창제 뒤 조선조의 언해(諺解) 사업은 불경과 유교경전에 이어, 두시 거의 전부를 언해하여 《두시언해》27권 17책으로 중간(重刊)하는 대사업으로 150년 간 이어졌다.

게다가 두시는 높은 주제의식과 정치한 용사(用事), 박력 있는 시격(詩格)과 전쟁의 체험으로 인간의 근원적 비애를 흉내낼 수 없는 경지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의 두시 수용은 한국문학사에서 그대로 중국문학을 대표했다. 이것은 일본의 한문학이 백락천(白樂天)의 독무대였다는 사실과 크게 대비된다. 일본의 백시(白詩) 편향은 평명한 말과 불교에 호의적인 시풍이 일본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라 한다.

수백 년간 일본문학의 교과서였다는 <화한낭영집(和漢朗泳集)>에 실린 중국 한시 234수 가운데 백락천의 시가 139편으로 두 번째인 원진(元?.11편)을 크게 따돌리고, 이태백이나 두보의 시는 한 편도 뽑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런 한시 수용의 차이는 백시(白詩)의 낭만시와 두시의 사회시를 선호한 두 나라의 문학적 기호 밖에도, 과거제도의 유무라는 문학 사회학적 환경이 크게 관련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연전에 두보초당(杜甫草堂)을 방문한 감흥은 시 한편 제대로 못 쓰는 나로서도 우리 문학사 속에 살아있는 두시 수용의 전통을 실감케 하는 체험이었다. 더구나 60년 떠돈 봄이 보건대는 또 지나가는데,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봄은 어느 봄이란 말인가?

 


[김태준의 문향] <19> 남효온의 '육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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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강 남효온(秋江南孝?,1454-1492)은 죽음을 무릅쓰고 <육신전(六臣傳)>을 지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평생 사우(師友)로 세속과 짝하지 않은 방외인이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상소를 올려 받아들여지지 않자, 20대에 세상 뜻을 버리고 산천을 두루 찾아 그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했다.

의식(衣食)이 거칠고 술을 그치지 않아 39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가을 강의 뜻을 담은 '추강'이란 그의 아호는 김시습의 '설잠(雪岑)'처럼 단종과 소릉의 한을 담은 방외인의 차가운 삶의 고뇌를 드러낸다.

스스로 '자만 4장(自輓四章'>이란 긴 만사(輓詞)를 쓴 추강은 '여섯 가지 액'을 읊어 자기의 삶을 반어법으로 희화화했다. 특히 술 때문에 병에 걸린 그가 김시습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주덕송(酒德頌)>'라 할 사연이 지극경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고 '지주부(止酒賦)'를 짓고, 10년 동안 정말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했고, 중풍을 앓아 다시 술을 마시다가 병이 그치자 '부지주부(復止酒賦)'를 짓고 다시 5년 동안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추강은 스스로 "36년을 지나는 동안에 언제나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는 실로 죽어서도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허균(許筠)은 '남효온론'을 쓰면서, 추강이 겨우 스무 살부터 항소해서 서둘러 스스로를 곤궁한 몸으로 내쳤다고 애석해 하면서도, 벼슬에 연연한 그의 스승 김종직을 혹평하여 추강의 기개와 강개한 인품을 높이 기렸다.

추강이 남긴 <육신전(六臣傳)>과 <허후전(許?傳)>이 모두 충신전이다. 특히 <육신전>은 각각이 독립된 전을 이루는 통일된 주제의 집전(集傳)으로 지은이의 인물관과 역사의식을 대변한다(박희병;<한국고전인물전연구> 참조).

'박팽년전'은 <육신전>의 머리를 이루면서 '성삼문전'으로 이어지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농담을 즐기고 앉고 눕는 것이 절도가 없는 성삼문에 비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을 풀지 않는 박팽년의 지사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성삼문은 달군 쇠창에 다리가 뚫리고 팔이 잘리는 형벌 속에도 '안색불변'하는 의연한 지조로 높이 평가 되었다.

<육신전>의 후반은 남은 네 명의 전으로 간략하나, 몸이 쇠약한 이개가 곤장 밑에서도 '안색불변'의 지사로 장하게 그려지고, 유성원은 사건이 나자 부인과 술을 나누어 영결하고 사당에 올라 자결한 사실로 현창했다.

하위지는 세종 이후 인재를 논할 때 첫째로 꼽혔다는 세간의 평가로, 유응부는 무인으로 선비와는 더불어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한 기개를 높이 샀다. 특히 그는 달군 쇠를 가져다 배 아래에 놓아 기름과 불이 함께 일어났는데도 '안색 불변'으로 끝내 불복하고 죽었다 하여, 이 <육신전>의 대미로 삼았다. 이야말로 '선비전'의 교과서일 터이다.

 


[김태준의 문향] <18> 김시습 '귀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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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외인으로 김시습은 뛰어난 시인이었을 뿐 아니라 주목할 만한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자연 철학자였다. <귀신론>이라면 낯선 느낌을 주지만 유교입국(儒敎立國)이란 정치 사회적 배경에서 발달하여 조선 초기의 학자 성현과 김시습을 비롯하여 서경덕ㆍ이율곡에서 19세기의 최한기에 이르기까지 40여 편 넘게 써내려 간 철학 산문이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주로 고려 불교의 귀신 풍속을 공격하고, 유교적 제사의 질서를 확립한다는 논거를 마련하고, 15세기의 김시습에서 서경덕으로 이어지는 기일원론의 자연철학을 성숙시켰다.

김시습은 <신귀설(神鬼說)> 과 소설 <남염부주지>를 써서, 기(氣)가 변하는 이치로 귀신론을 폈다. 여기서 그는 "하늘과 땅 사이는 오직 하나의 기의 풀무이다"라고 하는 명제 아래, 제사 받는 신(祭祀之神)과 조화의 신(造化之神) 곧 하느님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논리를 체계화했다.

따라서 천지만물은 본체가 하나이기에 결국 사람이 죽어 기가 흩어진 뒤에 저승에 가거나 응보를 받을 어떤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뚜렷이 했다.


김시습에게 '신(神)'이란 바로 자연의 순환 작용을 뜻했다.(「體元贊」) 곧 음양이기(陰陽二氣)의 작용하는 이치가 도(道)이며, 도에서 나왔으므로 작용이 생긴다는 뜻이다. 기의 작용은 돌고 도는 것이 이치인데, 이렇게 그침 없이 변화하는 것이기에 신묘하여 신(神)이라고 한다.

그는 "만민은 나의 동포이며, 만물은 나의 동반자다"라는 북송의 기철학자 장재(張載)의 말을 이끌고 있는데, 이것이 그의 자연철학과 사회철학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뚜렷이 해주는 대목이다.

'나'라는 미미한 존재가 하늘 아버지와 땅 어머니 가운데 살고 만민과 동포가 되니, 우리의 몸이 우주의 몸이 되고 우리의 성(性)이 우주의 성이 된다.

우주를 부모 섬기는 도리로 제사하는 이치가 여기에 있고, 자연 순환에 따르는 천인합일의 사상이 여기에서 나온다. 따라서 조상제사나 천지 산천에 드리는 감사의 예도 천지만물과 생명의 일체감을 나타내는 제사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이런 조선조의 귀신론은 기 철학으로 우주론이며 삶과 죽음의 철학이어서 '사생(死生)'이란 말을 앞에 붙여 <사생귀신론>이라고도 썼다. 김시습과 함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가장 친했던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귀신론〉을 함께 읽으면 귀신론이 본체론과 인성론에 걸쳐 있고, 조선 성리학의 사생관이 기철학으로 발전된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귀(鬼)란 돌아간다[歸]는 뜻이며, 신(神)이란 펼쳐진다[伸]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와서 펼쳐지는 것은 모두 신이며, 흩어져 돌아가는 것은 모두 귀신이라 할 수 있다.(鬼者歸也, 神者伸也. 然則天地之間, 至而伸者, 皆神也. 散而歸者, 皆鬼也)"(남효온;<귀신론>)

남효온은 성리학 전통의 글자풀이로 귀신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천지 사이에 펼쳐지고 흩어져 돌아가는 자연 변화의 개념으로 김시습의 기일원론을 이어 후세에 전했다.

 


[김태준의 문향] <17> 김시습의 시 '무제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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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종일 짚신으로 되는 대로 거니나니/ 한 산을 걸어 다하면 또 한 산이 푸르네// 마음에 생각 없거니 어찌 몸에 불리우며/ 도(道)는 본래 이름 없거니 어찌 거짓 이뤄지리// 밤이슬은 마르지 않았는데 산새는 울고/ 봄바람이 끝이 없으매 들꽃이 아름답다// 짧은 지팡이로 돌아오매 봉우리마다 고요한데/ 푸른 절벽에 어지러운 놀이 볕에서 난다." (김시습, <무제 삼수> 시의 첫 수, 김달진 번역)

조선 초기의 대표적 방외인(方外人)으로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ㆍ1435~93)은 허균(許筠)이 "진여(眞如)를 깨달은 경지"라고 평했다는 이 시를 읊으며 방랑길에 올랐다.

수양대군[世祖]이 조카 단종(端宗)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에 삼각산 절방에서 과거 공부하던 책을 불사르고 뛰쳐나와, 사육신(死六臣)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鷺粱津)에 묻은 일이 유랑 길로 이어졌다.

21살에 떠돌기 시작하여 호남을 거쳐 경주 금오산실(金鰲山室)에 한 동안 정착했을 때 그의 나이는 29살. 여기서 지은 <금오신화(金鰲新話)> 5편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절대 고독한 인물상으로 방랑자의 고독한 내면을 반영한다. 그러나 방랑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평생을 계속했다.


강릉과 양양에 머물던 51살 어름에 쓴 <동봉육가(東峯六歌)>에서는 첫 구절부터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 이름은 동봉"이라고 했고, 둘째 수에서는 아예 "지팡이여 지팡이여"라고 했다. 직률나무 지팡이야말로 반생의 반려이자 표상이었다. 그의 발자국은 부여 무량사에 묻힌다.

그는 평생을 산에 의지했다. 그의 호인 동봉(東峰)에는 수락산이, 설잠(雪岑)에는 겨울 산이 있다. 그에게 있어 겨울 산은 한계산(寒溪山)과 설악산으로, 특히 설악에 남긴 고독과 절의의 자취는 오세암을 영원한 그의 유허(遺墟)로 전하고, 지금도 안동 김씨의 후대가 지키고 있을 영시암(永矢菴)은 오세암에서 지척이다.

삼연(三淵) 김창흡이 즐겨 머물렀던 가평의 벽계(碧溪)에서 북한강을 따라 청평산과 춘천을 거쳐 설악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매월당의 자취가 짙게 서린 곳이다.

"금강산은 수려하기는 하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기는 하나 수려하지 못하다. 이에 비하여 설악산은 수려한데다 또한 웅장하다." 이것이 매월당의 평이라 전하는데, 과연 원통의 백담사 계곡으로 오르는 1,700여 미터의 내설악은 36번이나 내를 건너 대청봉에 이르고, 다시 비선대로 내려가는 천불동 계곡은 금강산의 만물상과 비겨 손색이 없는 장관이다. 내외 금강을 다 오르고 설악을 새로 넘은 사람이면 수긍하고도 남을 평가이다.

김시습의 전기를 쓴 율곡 이이(李珥)가 매월당의 삶을 평하여 '선비의 마음에 스님의 발자취[心儒迹佛]'라고 한 이 한마디에 그의 삶의 고뇌와 평생의 방황은 물론 사상의 너비까지 잘 갈무리되어 있다. 눈 쌓인 사육신묘에 다시 서니, 50년을 그 언저리에 산 인연이 오늘 더욱 다사롭다.

 

 

[김태준의 문향] <16> '정음'과 '세종'의 수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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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경인년(庚寅年)은 세종 임금의 <훈민정음 서문>을 다시 읽어 새해를 맞는다. 대명천지 대한민국에서 나라 글로 '한글[正音]'과 글을 만드신 세종 임금의 이름이 모두 수난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음이 어떤 글인가? 세종 임금이 몸소 쓰신 이 머리말에 잘 밝혀져 있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글로는 그 뜻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 이에,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 내 이를 어여삐 여겨 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널리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나라 말이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글자도 달라야 한다는 뜻은 훈민정음의 제일 전제이며, 민족 문화의 독립 선언이다. 이런 사실을 가장 잘 안 사람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이었고, 이런 백성들의 마음을 가장 잘 실어 펼 수 있는 글자를 만든 뜻을 천하에 알리는 선언이 이 머리말이다.

옛부터 "하늘이 듣는 것은 백성이 듣는 데서 시작한다"고 일렀다. 이것을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에서는 "아마도 하늘이 성군(聖君)의 마음을 여시고 그 손을 빌린 것이리라"고 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쓴 함석헌(咸錫憲) 선생은 훈민정음 창제를 한국 역사의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하고, 그 뜻을 "씨알의 자각운동이 싹트는 민족 역사사건"으로 풀었다.

"하늘이 하는 일이겠지. 씨알이 죽지 않은 증거겠지. 세종이 어질기도 하지만, 이것이 씨알의 요구인 것을 어찌하나? …이제는 민중을 가르치지 않고는 할 수가 없게끔 역사의 행진이 거기까지 온 것이다"고 했다.(<한국역사> 257쪽) 역사 사상가로서 그가 '씨알'이란 말을 처음 쓴 것이 이 대목에서였다.

씨알이 누군가? 말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다 하지 못하는 백성, 아낙네며 서민이다. 그래서 정음을 '언문'이라 하고 '암클'이라고도 했을 터이다. 19세기에 이 땅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은 이 '암클'에 주목하여 아낙네들과 서민들을 가르쳐 선교하고, 한글 보급에도 공을 세웠다.

문자의 생명성은 실용성에 있다. <세종이 발명한 최고의 알파벳 한글>(루덴스)을 쓴 김영욱 교수(서울시립대)는 LG전자 손전화의 <획 추가> 원리와 삼성전자의 <천지인> 원리를 들어 한글 창제와 쓰기의 원리를 명쾌하게 풀었다.

이런 정음 창제의 원리와 중요성은 한국 신학(神學) 철학 쪽에서는 우리말로 신학하기(김흥호ㆍ이정배 목사들), 우리말로 철학하기(이기상 교수) 등에서 새 바람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초등학교에 입학도 하기 전에 한글을 깨우친다. 그런데 요사이 글을 보면 평생 국어를 가르쳐 온 나로서도 모르는 말 투성이다. 한글학자 정재도 선생은 6년째 우리말로 바꿀 한자말 7만 낱말을 정리했다고 한다.

공공문서 공공언어는 어려운 한자말 투성이에다 법률 용어는 일본말 찌꺼기에다, 교육은 영어 몰입교육 소동으로 영어 망령. 여기에 '세종시' 문제까지, 지금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정음'과 '세종'의 수난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