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준의 문향] <15> 길 위의 시인 이제현의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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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이름난 시인으로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1287~1367)은 이 시대 사람으로는 드물게 중원(中原) 땅을 헤매며 길 위서 산 사람이었다. 몽골이 원나라를 세워 유라시아 대륙까지 휩쓸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려는 28년이나 처절하게 항쟁하면서도 끝내는 98년간 몽골의 간섭 속에 수모를 겪었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 1275~1325?재위1308~1313)은 그 어머니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여서, 연경(燕京)에 머물게 되었고, 그의 부름으로 익재는 10년이나 중원 땅에 살았다.(지영재: <서정록을 찾아서>(푸른역사 발행) 참조)

익재가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머문 것은 27살 때부터 10년 동안이고, 그는 8번 연행(燕行)에다 상왕(上王)이 유배된 티베트 땅까지 4만㎞가 넘는 여행에 <익재집(益齋集> 제1, 2권은 자연히 중원 땅 여행의 시로 채워졌다.

그 가운데서도 명승으로 아미산(蛾眉山) 길을 걸으며, 촉나라(사천성) 성도(成都) 여정을 끝내고 진나라(섬서성) 서안(西安)으로 들어서며 지은 '길 위에서(路上)'란 시는 특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말 위에 끄덕끄덕 촉도란을 읊으면서/ 다시금 오늘 아침 진관으로 들어갈 제/ 푸른 구름 저문 날에 어부수 막혀 있고/ 붉은 나무 아침 숲은 조서산이 여기라네/ 문자는 남아 있어 천고 한을 더하였고/ 명리에 지친 몸은 언제나 한가할고/ 나의 생각 잠긴 곳은 안화사 옛길에서/ 죽장망혜 짚고 신고 오가던 그 일뿐을(馬上行吟蜀道難 今朝始複入秦關 碧雲暮隔魚鳧水 紅樹秋連鳥鼠山 文字乘添千古恨 利名誰博一身閑 令人最憶安和路 竹杖芒鞋自往還)'(이가원 역 <국역 열하일기>)

'촉도란(蜀道難)'을 읊은 이태백의 여정을 걸으면서, 촉나라 길이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어렵다'는 싯귀를 떠올림은 당연한 용사(用事)일 터이다. 그러나 수 천리 남의 땅을 헤매는 시인은 금세 고국의 개성 송악산 자핫골로 달려, 죽장망혜 짚고 신고 오가던 안화사(安和寺)로 향수를 달랬다.

송나라 사절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1123)에는 개성에 절이 300개도 넘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관음사와 대흥사와 함께 안화사가 복원되어 있고, 안화사 길이라면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머물던 연암(燕巖) 뒷산 기슭에서 한 재 마루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

연암은 안화사 옛터를 오르며 이 '길 위에서'라는 시를 노상 외고, '촉나라 길'을 생각했다고 썼다. 그리고 연행해서는 열하(熱河)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이 시를 다시 읊으며, 익재도 이르지 못한 열하를 걷는 기쁨을 자랑했다.(<열하일기>중 '피서록')

익재는 연경에서는 충선왕의 만권당(萬卷堂) 서재를 중심으로 조맹부(趙孟?) 등 원나라 명사들과 사귀었고, 운율의 속박에서 벗어난 장단구(長短句)와 국어시를 한시로 번역한 소악부(小樂府) 시를 창안한 시인으로 고려 한문학사의 외연을 크게 빛낸 문인이다.


[김태준의 문향] <14> 에밀레종의 신비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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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기록이 아니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글로 금석문(金石文)이 수없이 많다. 고구려의 옛 터전에 남아 있는 광개토대왕비나 충청도 성주산 기슭에 남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같은 국보급이 적지 않고, 국립 경주박물관 입구에 우뚝 매달린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에밀레 설화'와 함께 그 명문(銘文)이 또한 명문(名文)이다.

'지극한 도리는 형상의 바깥까지를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 없고, 커다란 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울리므로 들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는)가설을 세워서 세 가지 진여(眞如)의 깊은 뜻을 보이고 신성한 종을 달아서 일승(一乘ㆍ부처님 말씀)의 원만한 소리를 깨닫게 하였다.(중략)

삼가 생각하건대, 성덕대왕께서는…어질고 충직한 사람들을 등용하여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예악을 숭상하여 풍속을 살리시니 들에서는 생업의 근본인 농사에 힘썼고, 시장에는 넘치는 물건이 없었다. 당시 세상에서는 금과 옥 같은 보물을 싫어하였고, 문화를 숭상하였다.

…이 때…신령한 그릇이 이루어지니 모양은 산악이 솟은 것 같고 소리는 용이 우는 것 같았다. (그 소리)위로는 하늘 끝까지 이르고 아래로 끝없는 지옥까지 통할 것이다. 보는 자는 기이하다 칭찬할 것이고 듣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하략)'(김필해 지음, 김상일 교수 번역, 성낙주: <에밀레 종의 비밀>)


성낙주 선생의 <에밀레 종의 비밀>(푸른역사)에 따르면, '에밀레 전설'은 신라 당대로부터 구한말에 이르는 어느 사료에도 전하지 않고 천 년을 민간에 떠돌다가, 알렌ㆍ헐버트 등 서양 선교사들의 글에서부터 성덕대왕신종의 연기설화로 굳어진 것이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신종의 '신령한 그릇이…위로 하늘 끝까지 이르고 아래로 끝없는 지옥까지 이르는' 그 소리의 신비한 생명성 때문일 터이다.

실제로 이 종의 소리와 범종 몸체의 떨림 모양을 분석해 만든 김석현(강원대)ㆍ이장무(서울대) 교수들의 '맥놀이 지도'에 따르면, 종을 치고 50여 가지의 낱소리들이 다 사라진 뒤에 에밀레종만의 신비한 소리의 세계는 숨소리 같은 64 ㎐와 어린이의 울음소리 같은 168 ㎐의 음파만이 9초 간격으로 지배하는 신비한 소리의 세계라고 했다

그러나 이 신종의 백미는 또 하나의 '소리의 신기(神器)'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종의 머리(종정부)에 한 마리 용(龍)과 쌍으로 얹은 대목이다. 이것은 두 마리 용을 등지게 앉히는 중국이나 일본의 종과 근본부터 다른 신라 종의 제일 특징이며, 후대 우리 종의 특징이 되었다.

'만파식적'은 백성의 소리의 상징일 터이며, 임금은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예악을 숭상하여 풍속을 살렸기에 이런 신기가 나올 수 있었을 터이다. 들에서는 농사에 힘썼고, 시장에는 넘치는 물건이 없으며, 사람들은 금은 보물을 싫어하고, 문화를 숭상하는 세상. 에밀레종의 명문은 그 소리를 듣기만 해도 복을 받는 이런 가난한 영혼들의 삶과 예술의 비밀을 웅변한다.

 

[김태준의 문향] <13>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의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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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는 지은이 일연(一然)의 '머리말'과 같은 글이 따로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이 시작되는 '기이'편에 '머리말(敍曰)'을 붙여, 귀신이나 도깨비 이야기 같은 허탄한 이야기라도 그것이 역사적 진실이라면 괴이할 것이 없다는 편찬 방침을 밝혀 놓아 크게 주목할 만하다.

'무릇 옛날 성인이 바야흐로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교화를 베푸는데 괴력(怪力)이나 난신(亂神)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나려는 때에는 부명(符命)과 도록(圖?)을 받아, 반드시 여느 사람과 다른 데가 있은 후에야 능히 큰 변화를 타서 제왕의 자리를 얻고, 큰일을 이루었다.'

'괴력난신'이라면 괴이한 힘이나 귀신 이야기를 말하고, 중국의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우리 삼국(三國)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기적으로 탄생했다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다고 할 것인가를 되물었다.

일연은 이것이 책 첫머리에 '기이편'을 싣는 까닭이고, 신이(神異)를 여러 편의 앞에 싣는 뜻임을 뚜렷이 하였다. 이 말은 일연이 이 역사책을 쓰는 뜻과 사관을 밝히는 중요한 대목이어서 다시 곱씹어 논의할 만하다.


그래서 2,000년 전에 곰의 아들이라는 단군 임금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운 '고조선-왕검조선'으로부터, 삼한(三韓)ㆍ오가야(五伽倻)와 부여(扶餘) 등, 삼국 이전의 한(韓) 민족 전래 문헌들을 주의 깊게 기록하여, 세 나라의 역사의 전통을 뚜렷이 밝혀 주었다.

고조선을 통일된 우리 민족 국가의 기원으로 규정하고, 한민족 국가 전통의 역사적 개념을 명백히 드러냈다. 게다가 <삼국사기>보다 반세기 이상 앞서 만들어져 이미 실전된 <가락국기(駕洛國記)>의 귀중한 역사 문헌을 요약함으로써, 고대 네 나라 시대의 역사를 복원시켜 준 것은 이 책의 더없는 가치이다.

더구나 이러한 신이한 기사는, 나라의 시조들뿐만 아니라 신라 역대의 왕들과 스님과 화랑(花郞)에서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인물과 소재의 승속(僧俗)은 물론 사람들의 역사 속에 보이는 마음의 작용과 신앙의 능력까지 중시한 것이다.

고려 시대는 역사학의 시대였다. 1145년에 <삼국사기>가 완성되고 1215년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이 지어진 뒤에, 1281년경 일연의 <삼국유사>가 탈고되기까지 대략 70여년 간격으로 세 개의 주목할 역사책이 지어졌다.

이 고려 사학사(史學史)는 <삼국사기>가 불교와 한민족의 신앙의 마음을 뺀 역사라는 반성에서 시작하여, 삼국의 역사를 고승전 중심으로 쓴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로 불교적 시각에서 크게 바꾸는 역사의식의 변화였다.

그리하여 '괴력 난신'을 들고 나온 이 짧은 머리말은, 구전 설화와 불교사를 새 역사로 통합하고, 이것은 한민족의 신앙(信仰)의 역사와 함께, '고조선'과 '사뇌가(鄕歌)' 14수와 같은 역사와 문학의 광대한 문화 광맥을 되살려냈다.

이를 두고 일연의 '신이사관(神異史觀)'을 말하기도 하는 것은 사관(史觀)이 역사가의 양심이란 말을 되새겨 보게 하는 귀중한 본보기라 할 터이다.

 

[김태준의 문향] <12> 삼국유사의 '원효불기(元曉不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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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스님 일연(一然ㆍ1206~1289)이 지은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쌍벽을 이루는 우리 고대사의 보고이지만, 흥법(興法)ㆍ의해(義解)ㆍ감통(感通) 같은 분류 체계에서처럼, 중국 고승전(高僧傳)의 체제를 따른 승전 문학의 성격이 강하다. 권1ㆍ2의 왕력(王曆)과 기이(紀異)를 뺀 나머지 7편은 각 편이 '원효불기'에서처럼, 스님의 이름을 얹어 제목을 삼은 것이 많고, 내용 또한 스님의 전기적 일화를 중심으로 엮었다.

<삼국유사>의 스님 이야기는 '흥법'에서 이차돈 등 6명을 비롯하여, '의해'에서 원효 등 13명, '감통'에서 광덕 등 11명이고, 제5편 '신주(神呪)'에서도 밀본 등 3명의 전기를 다루었다. 이렇게 <삼국유사>에서는 모두 250명의 스님의 이야기를 다루어, 스님의 이름 하나도 다루지 않고 국가불교시대를 쓴 <삼국사기>와는 엄청나게 다른 역사책을 썼다. 게다가 <유사>에는 300개의 절과 사찰연기설화를 다루어 여러 면에서 승전과 중복된다.

이 가운데서도 '원효불기'는 '의상전교'와 함께 <삼국유사> 승전 류를 대표하는 전기 작품으로, <송고승전(宋高僧傳)>같은 정전(正傳)이 아니고, 향전(鄕傳)에 전한다는 한두 가지 이상한 일화를 강조하여 써낸 원효전이다. 그 제목에서 벌써 드러나듯이, 원효의 매이지 않는 성격은 그의 전기적 일화로 널리 알려진 요석공주와의 연애담이 중심이다. 그리고 파계한 원효 스님이 뭇 고을로 돌아다니며 춤추고 노래 부르며, 쪽박을 두들겨 참회의 법화를 크게 한 내력이다. 이로써 '원효불기'는 종래의 원효전들과 다른 전기를 이룩했고, 바다용의 권유에 따라 <삼매경>의 논소(論疏)를 지었다는 대목에서 이야기는 '의해'편의 주제를 만족시켰다. 이야말로 '왕생론주(往生論註)'에 따라,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자라야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一道出生死)'는 무애의 경지를 기린 셈이다.

이런 매이지 않는 성격을 일연이 원효전의 중심 주제로 강조한 뜻은 지은이의 역사의식을 대변한다. 원효 스님 당대의 신라 불교는 당나라 불교의 파동에 뒤흔들리며 호국불교로 정치에 야합하였고, 신라는 정치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다 당나라와의 공조도 순조롭지 못했다. 이런 때에 원효 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하지 않고도 스스로 깨달았고, 매임이 없는 법화로 신라 불교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왕실 중심의 계율주의를 벗어나, 촌락을 헤매며 염불하고 춤추며, 몽매한 민중으로 하여금 부처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교화하였다고 했다. 그리하여. '미혹 속에 있음을 스스로 깨달은 자는 벌써 큰 미혹에 있지 않으며, 어둠 속에 있음을 스스로 깨달은 자는 벌써 극심한 어둠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 주었다.


이렇게 <삼국유사>는 250명이 넘는 스님의 이름과 신라 '십대덕(十大德)' 가운데서도 원효 스님을 들어, 신라불교의 민족사적 민중 불교의 의미를 훌륭히 역사로 정립했다.

 

[김태준의 문향] <11>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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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인 정치가 김부식이 펴낸 <삼국사기>(1145)는 고구려ㆍ신라ㆍ백제 등 세 나라 역사를 50권의 기전체(紀傳體)로 엮은 역사책이다. 기전체란 제왕의 전기를 본기(本紀)로 하고, 역사인물을 열전(列傳)으로 다루는 역사 쓰기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서 유래하여 , <한서>에서 확립된 중국의 정사(正史) 기술 방식이다.

<삼국사기>는 이 체제를 따라 모두 50권 가운데 제41~50권까지 10권을 열전으로 채웠다. 이 곳에 개인 전기로 입전(立傳)된 역사 인물은 51개 전기에 80여명으로, 이것은 이 역사책 전체의 5분의 1이 넘는 분량이다.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를 편찬하면서, 특히 열전을 중시한 역사기술의 뜻을 짐작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더구나 이 열전 10권 가운데, 제41~43권까지 3권을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배당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사마천의 <사기>가 열전의 서두를 백이ㆍ숙제(伯夷ㆍ叔齊)로 장식한 유교주의와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진 특징이다.

김유신(595~673)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군인이었다. 그리고 이 열전에 입전한 인물의 절반이 넘는 34명이 신라 통일 시대인 7세기 인물이며, 37명이 군인이고, 21명이 이 때 순국한 사람이다.


이것은 이 역사책 전체에 풍기는 신라 중심, 유교 중심의 성격과 함께,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가 모두 국가불교 시대였던 역사를 다루면서 스님 한 사람도 입전하지 않은 사실과 크게 대비되는 성격이다.

심지어는 신라 통일시대와 관련해서 도저히 뺄 수 없는 원효(元曉)의 이름까지 이 열전이 과감히 빼버렸다는 것은 <삼국유사>가 고승전의 성격을 가졌다는 것과 크게 구별되는 유교적 성격이다.

이 '김유신전'은 유신의 현손 장청(長淸)이 지었다는 <행록(行錄)> 10권을 바탕으로 삼았고, 이 행록은 고려 중기까지 널리 읽히는 독서물이었다고 김부식은 썼다. 그러나 이 전기를 구성한 두드러진 특징은 김유신의 생애와 나라의 역사를 대위법적으로 중첩시킨 데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김유신의 삶과 신라통일의 위업을 함께 드높이기에 모두 타당한 구성법일 터이다. 그것은 '논찬(論贊)'의 머리말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대개 신라가 김유신을 대한 것을 보면 친근하여 틈을 주지 않았고, 일을 맡기면 두 번 간섭하지 않았다(觀夫新羅之待庾信也.親近而無間,委任而不貳)."

이 글에서는 김유신의 인격이 신라 나라와 동격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김유신의 사람됨을 드러내는 일화는 유신이 상장군으로 백제를 쳤을 때 크게 이기고 돌아와 임금을 뵙기도 전에 다시 출정 명령을 받았다는 데서 두드러졌다.

그는 집 앞을 지나면서도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다시 출정하였는데, 집을 50걸음 쯤 지나쳐 말을 세우고, 사람을 집으로 보내어 물을 떠 오게 했다. 그리고 "집의 물맛이 아직도 옛날 그대로 맛이 있구나" 라고 말하며 그냥 떠났다. 이를 본 군사들이 본을 보고 모두 그대로 다시 출정하여 백제를 막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