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준의 문향] <5> 뭇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衆口삭金)

5.jpg



신라 성덕왕(702~737 재위) 때 순정공(純貞公)이란 사람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수로(水路) 부인과 함께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부인이 바위 끝에 핀 진달래꽃을 탐내자, 암소를 끌고 지나던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한다. 이 향가가 '헌화가(獻花歌)'이다.

'자주 빛 바위 끝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그런데 이번에는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물고 들어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길을 지나던 노인이 말하기를, "중구삭금(衆口삭金)"이라 하여 뭇 백성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 했으니, 백성을 모아 노래를 부르고 막대로 언덕을 치라고 했다. 태수는 이 말에 따라 백성을 모아 노래를 불러 부인을 돌아오게 했다는 것이 '해가(海歌)'라는 한역 시로 따로 전한다.


<삼국유사>에는 수로부인을 둘러싼 이런 두 가지 사건을 전하고, 두 번 모두 신기한 노인이 나타나서 '중구삭금'으로 천기(天機)를 발하는 민중의 말을 강조해 보였다.

부임하는 태수로서 백성의 말을 들어 정치를 하라는 가르침이었을 터이다. 2008년 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 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이어진 촛불집회에서도 신문들은 이 '중구삭금'의 고사를 이끌어 민중의 말을 중시했다.

10월 상달은 한글날이 들어 있고, 특히 금년 한글 반포 563주년 기념일에는 세종로에 한글을 창제한 세종 임금의 거대 동상이 세워지고, 문화부가 생기면서 초대 이어령 장관의 절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휴일에서 빠진 한글날 공휴일론도 다시 공론화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나랏 말씀이 중국과 달라', 백성이 하늘 뜻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마음대로 쓸 수 없음을 걱정한 <훈민정음> 창제의 백성사랑 정신은 어디로 가고, 관공소 현판에 버젓이 'Hi Seoul', '일어서自!'가 도대체 어느 나라 국어란 말인가?

<훈민정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도 10년에, 자랑스런 한글문화는 일본식 한자문화와 영어몰입교육 풍토와, 인사 청문회에서 보는 정치 지도층의 거짓말 공해 속에 이 나라 교육 대계까지 뿌리 채 흔들고 있다.

"말을 보이게 하면 글이고, 글을 들리게 하면 말이다. 말이 글이요, 글이 말이다. 하느님의 뜻을 담는 신기(神器)요, 제기(祭器)다."

"말이란 정말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말도 정말 이렇게 되어야 좋은 문학, 좋은 철학이 나오지, 지금 같이 남에게(외국어) 얻어온 것 가지고는 아무것도 안돼요. 글자 한 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 있고, 말 한 마디에 영원한 진리가 숨어 있어요."

한글날 세시 반이면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이런 정음 사랑을 몸으로 실천했다는 다석 유영모 선생이 그리운 아침이다.

 

[김태준의 문향] <4> 원효의 '한 마음' 사상

4.jpg



신라의 원효(元曉ㆍ617~686)스님은 육두품 출신이란 신분적 제약 속에 살면서, 세계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한 마음(一心)'에서 체계를 세운 불교사상가이며 실천가였다.

중관학파(中觀學派)에 따르면 모든 법은 공(空)이며 생멸(生滅)이 없이 본래 고요하다고 했고, 이에 대하여 특히 '마음학'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식학(唯識學)은 주관적 인식 그 자체까지 없다고 할 수 없고 모든 법은 있음(有)과 없음(無)에 통한다고 했다.

인도에서 중국의 불교계까지 이어진 이런 '없음(빔)'과 '있음(참)'의 대립 문제를 소통하여 화해하려 애쓴 사람이 신라의 스님 원측(圓測)이었고, 원효 스님이 이 대립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사상을 '한 마음(一心)'으로 종합하여 우리 마음의 철학의 길을 환히 밝혔다.

"무릇 한 마음의 근원은 있음(有)과 없음(無)을 떠나서 홀로 조촐하고, 삼공(三空)의 바다는 참(眞)과 속(俗)을 아우르면서 맑으니, 맑아서 둘을 아우러도 하나가 아니며, 홀로 조촐하여 모퉁이(邊)를 떠났으나 가운데(中)가 아니다.


가운데가 아니면서 모퉁이를 떠나기 때문에 법을 지나지 않으나 곧 없음에 머무르지 않으며, 상(相)이 없지 않으나 곧 있음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아우르기 때문에 참이 아닌 일[事]도 비로소 속되지 않고, 속되지 않은 이(理)도 비로소 참(眞)이 되지 않는다."(금강삼매경론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니라는 것은 불교의 바탕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원효 스님은 '있음과 없음'과 함께 '참됨과 속됨', '가운데와 모퉁이'라는 짝을 더하여, 이런 모든 대립개념의 갈등요소를 뛰어넘어 조화한다는 화쟁(和諍)의 사상을 마련했다.

참되고 성스러워 마땅한 종교적 마음의 자리를 세속 세간의 현실적 세계에까지 넓힌다는 있음ㆍ없음과 진ㆍ속과 중ㆍ변의 아우름은 이 7세기 후반에 신라 귀족불교를 대표하는 의상(義湘ㆍ625~702)과 비교하는 데서 더욱 두드러진다.

원효는 의상처럼 중국에 유학하거나 화엄학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면서, 신분적 제약 속에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도 불성(佛性)이 있어 성불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대승기신론소>에서 이룩하고 <금강삼매경론서>에서 '일심'으로 뚜렷이 했다.

불교의 역사를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찾는 구도의 역사라 한다면, 마음의 문제를 인식과 삶의 문제로 고민하고 실천해온 자취는 불교에 이어 발달한 유교에서도 심성론(心性論)을 거쳐 실심실학(實心實學)을 이룩한 우리 철학의 승리였다 할 것이다.

이것은 '있는 것(존재)'에 대한 놀라움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하는 서양 사람과 얼마나 다른 철학의 전통인가? 없음(無)과 빈탕(空)과 텅 빔(虛)에서 영성을 발견하는 것이 불교의 마음, 동양의 영성으로 이어졌다. 그러기에 하느님도 '없어 계신 이'로 이해했던 다석(多夕) 유영모나 함석헌의 '한국신학'이 나올 수 있었을 터이다.

 

[김태준의 문향] <3> '춘향전'의 힘

3.jpg



'백년이 지나서도 아직도 읽히는 책이라면 고전'이라는 말이 있다. 할아버지가 읽고, 아버지가 읽고 또 손자가 읽는 책. 그러기에 책을 쓰는 작가나 저자라면 누구나 이런 책을 쓰고자 할 터이다.

근대의 천재라는 육당 최남선도 세상을 마치며 역사에 남을 책을 남기지 못하고 죽는 것을 슬퍼했다고 하는데, 무애 양주동은 육당이 후대에 남을 책으로 외솔 최현배의 <우리말본>과 무애 자신의 <고가연구>를 500년 남을 책이라고 했다는 일화를 자랑으로 전했다.

우리 문학의 고전이라면 가깝게는 <춘향전>이나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만해(卍海)의 <님의 침묵>같은 책을 꼽을 수도 있을 터이다.

특히 한국은 시집(詩集)이 팔리는 드문 나라라 하고 시를 좋아하는 전통이 대단해서 <두시(杜詩)>의 경우는 조선 전기의 이름 있는 문인을 모두 동원하여 당(唐) 나라 두보의 시를 몽땅 언해(諺解)하고, 150년에 걸쳐 중간(重刊)하는 역사를 남겼다.


그리고 이어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은 자국 역대의 시문을 133권의 본편과 <속집>23권으로 펴내서 <왕조실록>과 함께 사고(史庫)에 갈무리하고, 중국과 일본에 보내어 문학의 나라임을 자랑했다.

<춘향전>은 판소리나 소설로서는 물론, 연극이나 영화나 오페라 등 여러 양식으로 넘나들며 재창작되고, 존망의 갈림길에 선 극단이나 영화사는 <춘향전>으로 재기를 모색한다는 말까지 낳았다. 소설을 영화화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은 미국 언론인 셀리그 헤리슨이 2001년 4월 <춘향뎐의 힘>이라는 신문 기고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여기서 '힘'이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한국문화의 힘이란 뜻일 터이지만, 지식을 주는 책들과 달리 문학은 독자로 하여금 그 첫발부터 그 삶을 변화시키고 향상시키는 힘을 지닌다.

그러나 문학은 향유하는 사람에게 힘이다. 내 친구 정대구 시인은 시를 배우겠다고 찾아 오는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시집을 골라 300번 읽고 100번 써 오도록 시킨다고 한다. 이런 열성이라야 시를 배울 수 있다는 가르침일 터이다.

정 시인 뿐 아니고, 그의 돌아가신 어머니 밀양 박씨(1893~1990)는 평범한 시골 아낙이었지만, 95세 때까지 <춘향전>은 물론, <유충렬전>이나 <삼국지>등 10여편의 고전 소설을 줄줄 외셨다. 이런 어머니에게서 시인 아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나는 시 한편 못 쓰는 국어 선생이면서도, 입학 면접 때에는 언제나 한 가지만 묻는다.

"자네는 시를 몇 편이나 외나?"

그러나 시를 외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향유하는 일이다. 한국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간 일본의 한국문학자 사에구사(三枝壽勝) 교수의 편지에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며 어려움을 느낄 때, 자기 나라 책들 가운데서 찾아 읽는 책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말이 있었다.

읽을 책이 없을 이치가 없다. 시험을 위한 교육을 집어 치우고, 고전에서 삶을 배우는 교육을 되살리는 날, 우리 문화의 힘이 되살아 날 터이다.


[김태준의 문향] <2> '아리랑' 민족의 노래, 세계의 노래

2.jpg



한가위 명절이 다가오면서, 옛 중국의 역사책들에 전하는 우리 민족의 명절 풍속을 떠올린다. 한민족은 그 옛날부터 모두 노래 부르고 춤추기를 좋아하며, 특히 씨뿌리기를 마친 오월과, 농사가 끝난 상달이면 마을 사람이 모두 모여 가무음주하며 밤낮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수십 명씩 모두 일어나 서로 따라가며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자세를 높였다 낮추었다 하는데, 손발이 함께 잘 어울렸다고 했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춤에 맞추어 부른 노래는 '쾌지나 칭칭나네'나, 한민족이 어디서나 부르는 '아리랑'과 같은 그런 돌림노래였을 터이다.

이런 역사 기록은 천 년도 더 지났을 지금 읽어도 머리에 그 풍경이 방불하게 그려지는 한민족의 노래와 놀이의 모습일 터이다. 몇 년 전 근대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여 아테네에서 열린 올림픽에서는 시드니 올림픽에 이어 두 번째로 남북한이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아리랑' 노래에 맞추어 공동 입장을 했다.

남북이 한 민족임을 이 노래로 다시 알린 것이다. '아리랑'은 이렇게 갈라지고 흩어진 한민족을 감동으로 묶어주는 민족의 애국가로, 세계의 노래로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꾼 장사익은 자기의 대표곡의 하나로 '아리랑'을 부를 때에는 꼭 '애국가'를 부른다고 하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하는 후렴구에서는 당연히 청중들도 끌어들여 흥을 돋구기 마련이다.

이런 장사익의 아리랑을 따라 부르면 나는 영락없이 눈물이 난다. 그리고 만주벌에 말달리며 불렀다는 독립군 김 산의 아리랑은 그 스스로 말하듯이 정말 슬픈 노래다.

그러나 '아리랑'은 생각하면 기쁜 노래다. 올림픽에서 남북 선수를 따라 내가 부른 아리랑, 그리고 한일 월드컵 대회에서 눈물의 4강을 이루며 함께 부른 아리랑은 누가 뭐래도 기쁜 노래였다.

벌써 20여 년 전에 일본 민속학회의 회장인 노 교수와 함께 남한 각지를 여행했을 때, 이 이웃나라 민속학자가 한국 노인네들에게 묻는 질문이 꼭 한 가지 있었다. "아리랑은 슬픈 노래예요? 기쁜 노래예요?" 그런데 그 대답은 거의 모두가 "아리랑은 기쁜 노래"라고 했다.

그렇다. 지금도 백두산이나 고구려 유적 답사에서 조선족 냉면집에 들를라 치면 냉면 한 그릇 먹고도 뒤풀이는 으레 아리랑을 부르며 춤 한 바탕 추고야 끝나는 조선족 아낙네의 흥겨움과 만날 수 있다.

세계 125개 나라에 흩어져 사는 교민사회 모두 '조국의 노래'로 부르고 있는 노래,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보존을 지원하기 위해 제정한 상을 '아리랑상(Arirang Prize)'으로 정한 이름. 이 '아리랑'은 민족의 노래이며, '역사의 노래'이며, '노래의 역사'가 되었다.

이런 우리 노래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아리랑 박물관을 세워 세계화 할 때가 아닌가? 이 추석 절에도 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금강산에서 남북 가족 상봉으로 울며 웃으며 민족 통일을 노래할 것이다.

 


[김태준의 문향] <1> 두세 권의 책

1.jpg

내 우연히 문학을 배우고 가르치며, 문학 속에 살아온 세월이 하마 고희에 이르렀다. 내 문학의 환경은 9살에 해방을 맞은 일제 말의 국어의 수난과, 북녘에서 남녘으로 피난한 혼란스런 교육환경 속에서 스산했다.

그러나 1년을 넘겨 다닌 몽금포수산중학교는 졸업 작품으로 단편소설을 한 편 써야 한다는 엉뚱한 전통이 있었다고 했고, 입학한 해의 여름, 아름다운 명사십리 앞바다에서 보낸 일주일 간의 해양실습은 매일 잡아 올린 까나리로 끊인 국 맛과 해양실습의 멋으로, 6ㆍ25 전쟁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마도로스가 아니면 해양 소설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해방이 된 해의 9월, 일본어 대신 처음으로 배운 조선어 시험에서, '구두, 모자, 보자기'를 외워 쓰는 문제에 '보자기'를 쓰지 못해 담임 한순창 선생에게 회초리를 세 대나 맞았던 부끄럽고 아픈 기억은 나를 국문학으로 인도한 국어의 원체험이었음에 틀림없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동향의 천재 시인 무애 양주동(梁柱東ㆍ1903~1977) 선생에게 배우며 자주 감격에 찼는데, 졸업반이던 1960년 뜻밖에도 무애 선생이 연세대 대학원장으로, 연세대 대학원장이던 영문학자 최재서(崔載瑞ㆍ1908~1964) 선생이 동국대의 대학원장으로 자리를 바꾸는 희한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최재서 선생의 대학원장 취임 강연인 '세익스피아의 4대 비극론'은 잊을 수 없는 명강의로, '비교문학'이란 학문이 있다는 일도 이 때 처음으로 배웠다. 게다가 이즈음에 나온 그의 명저 <문학원론>은 다음과 같은 문학론으로 특히 인상 깊었다.

"만약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있어 책을 두세 권만 가지고 피난을 떠나라 한다면 나는 어떤 책을 고를까? 내 전공인 <세익스피아 전집>과 <옥스포드 영어사전>, 그리고 다른 책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동란이 일어나, 과연 1950년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그 두 책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친구의 찝차에 편승하여 남하(南下)했다.

아무 주석도 없이 작은 영어사전만을 의지로 읽으니까 자연 골똘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이 작품들에서 이전에 맛볼 수 없었던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위안을 발견했고, 그래서 신산한 가운데서 산 보람과 또 살고 싶은 의욕을 느꼈다. 문학은 체험의 조직화이며 감정의 질서화이며, 가치의 실현이라는 이론이 추호의 틀림이 없는 진리임을 깨달았다."

'두세 권의 책' 이야기를 했지만, 두세 권의 책 못지않게 중요한 바는 예술 작품 또한 그림이나 조각품처럼 소유대상으로 삼아서는 토지나 아파트와 다를 것이 없고, 구체적인 체험의 문학이 중요하며, 좋은 체험이란 일상과 다른 삶의 경험을 말한다. 생명, 그것은 함석헌 선생의 말처럼 '살라는 명령'일 터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