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재판 영화를 좋아하는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한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다. 살인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용의자와 변호사의 대화이다. 변호사는 단 한번도 그 용의자에게 "당신이 살인을 저질렀느냐?"고 묻지 않는다. 변호사는 용의자가 살인을 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반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그 용의자에게 유리한 모든 증거를 끄집어내는 일만 할 뿐 실재로 살인을 저질렀는 지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은 용의자가 먼저 말을 꺼낸다. "내가 실제로 살인을 했는지에 대해 왜 묻지 않습니까?" 변호사는 대답한다. "말하고 싶은가? 말하고 싶으면 말하라. 하지만 그 이야기는 내가 당신을 변호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대충 이런 이야기다.

미국의 변호사들이 실재로 이렇게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변호사의 입장과 태도는 아주 오랫동안 인상 깊게 나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 변호사와 같은 태도를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진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진실을 알려는 노력이 버거워서, 어떤 경우에는 그 문제에 해답을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그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태도를 정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고 그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아니다. 변호사가 어찌 용의자의 살인 여부 문제를 회피할 수 있겠는가?

진보적인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부활 문제를 대하는 방식이 마치 이 변호사의 태도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회피하지는 않지만 직접적으로 다가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변호사가 살인의 주변 정황만을 파헤쳐 용의자에게 유리한 증거를 찾아내듯이, 부활의 상징적 의미만을 심도 깊게 논의하되 부활 사건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대답을 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지난 부활절에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때마침 그 전날 밤 기독교TV에서 나자렛 예수(제목은 정확히 모르겠음)이라는 영화를 했는데 부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 많은 생각을 하던 참에 설교를 듣고, 그리고 게시판의 김종완 님의 글 '내 머리로 생각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접하니 나도 머리 속에 가득찬 생각을 털고 싶은 생각이 든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니 내가 봤던 영화는 철저히 마가의 부활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부활을 적나라하게 주장하기 보다는 텅빈 무덤과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메시지의 전달을 중심에 놓고 있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 육체의 부활을 나타내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다분히 상징적인 구도로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같은 정적인 구도로만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인 또는 보수적인 기독교에서의 부활 이해는 오로지 '믿음'만을 강요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에도 최소한의 논리는 존재해야 한다. 2+2=3이라고 주장하고 무조건 믿음만을 강요한다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가식적인 믿음, 끊임없는 자기 기만적, 자기 최면적인 믿음을 가질 뿐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육체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논리적 모순이 있는데도 그 부분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육체의 부활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빈 무덤'을 통해 확인되듯이 분명 '육체'가 부활한 것인데, 실재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 육체가 아니라 '귀신(이런 표현을 쓰는 것을 양해 바람)'이다. 다른 사람의 육체에 들어가 말하는 예수, 갑자기 등장했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예수, 하늘로 올라가는 예수, 누구는 보고 누구는 볼 수 없는 예수. 이것은 무덤에서 육체로서 부활한 예수가 아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귀신'이다. 그러면 이러한 논리가 성립해야 한다. "육체가 부활하여 그 과정에서 '귀신'이 되었다." 최소한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앞뒤가 맞는다. 어쨋든 이러한 주장은 더 이상 사고를 진척시킬 방법이 없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나 김종완 님의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부활'은 가장 큰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그렇기에 기독교가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다.

진수의 <삼국지>(원본 삼국지)나 다른 중국의 고전 역사서를 보면(내가 직접 읽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데도 불구하고 유독 하늘을 나는 '용'이 수도 없이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중국에 그런 용이 살아있었는지 모르지만(만약 그렇다면 고고학자들이 밝혀냈을 것이다) 도무지 그렇게 글을 쓰는 사고구조를 이해할 수가 없다. 쌩뚱맞게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중국인들의 사고구조에서 용이 차지하는 위치와 기독교인들의 사고에서 육체의 부활이 차지하는 위치가 비슷한 성격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쨋든 예수의 제자들이 다시 결집하여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되는 데에는 분명 '부활'이 중심에 놓여 있다. 과연 예수의 부활은 전태일의 부활과 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그런 것이었을까? 과연 그런 정도로 당시의 예수 제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 예수운동을 전개해 나가게 된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당시의 예수의 부활 '사건'은 분명 '육체의 부활'이었다. 즉 제자들에게 그리고 당시의 민중들에게는 분명히 육체의 부활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란 의미이다. 결국 핵심은 '빈 무덤' 사건이다.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무덤은 비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엔 의아해 하고, 겁도 나고,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적어도 빈 무덤 사건으로 인해 제자들이 다시 결집하게 되는 계기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빈 무덤'이 '부활'로 이해되려면 무엇인가가 더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빈 무덤'을 '부활'로 이해할 수 밖에 없도록 추동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과연 빈 무덤의 소문을 접하면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을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목격한 민중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이야말로 '빈 무덤'의 소문을 접하자마자 그것을 다짜고짜 '부활'로 받아들인 주체가 아니었을까? 다수의 민중들이 '빈 무덤' 사건을 예수의 '부활'로 이해했기에 제자들도 마침내 예수의 가르침을 반추하면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고 '부활 신앙'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앞서 언급한 논리적 모순 즉 부활한 것은 '육체'이지만 실제로 부활된 것은 '영적인 존재'로 묘사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중국인들은 용을 본 적도 없고 실재로 용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들의 문화 속에 용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용의 존재를 따져 물으면서 용을 중국 문화에서 몰아내려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부활의 의미와 그것이 주는 믿음의 힘이 너무나 크고 깊은 것이기에 우리는 '빈 무덤'의 구체적인 경위를 따져 묻지는 않는다. 때론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로 남겨두어야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