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큉의 <그리스도교>를 읽고...

 

1068쪽에 달하는 이 두툼한 책을 '새로운 안병무 읽기' 모임에서 근 반년에 걸쳐 함께 읽은 후 맨 처음 드는 생각은 "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첫 쪽을 열어 지금은 다시 100쪽 정도 진도가 나갔다. 홍영진 장로님도 "그동안 다른 책들은 읽은 후 주위 사람에게 권하며 주었는데, 이 책은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레퍼런스처럼 자주 봐야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책을 읽고 느낀 깊은 감응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닌 듯 싶다.

 

2000년의 기독교 역사를 담아내면서 비단 교회의 한정된 영역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꿰뚫는 시각을 견지하며, 어떤 의미에서 서양 사상사 전체를 포괄하는 그 넓이에 감탄하게 된다. 아울러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는 부분에서 조차도 저자의 충분한 이해와 해석에 기반하고 있음을 느끼기에 그 깊이에 또한 압도되지 않을 수가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왠만한 사람이면 '곡예'를 해야 가능할 것을 저자는 넘치는 확신과 근거를 가지고 설득력 있게 논파한다는 점이다. 종교다양성을 포용하면서 기독교를 확고하게 자리매김 하는 것. 역사비판적 성서해석에 근거하면서 정통적 교리와 신앙을 보다 확고히 틀 지워주는 것. 역사 속에서 자행된 교회의 모든 폐악을 몽땅 들추어 내면서도, 일관되게 관통되는 기독교의 알맹이를 보듬어 주는 것.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에서 구하고자 했던 답을 찾지는 못했다. 물론 그 해답보다 더 많은 중요한 알곡들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책을 다시 읽기로 마음 먹은 것은 구하지 못한 답을 찾고자 함은 아니다. 이 책이 주는 풍요로움에 빠져드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본래 안병무 읽기에 참여하며, 또한 이 책을 열심히 읽으며 찾으려 했던 답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함이요, 나 자신이 그러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말이 좀 거창하지만 쉽게 말해서 "나에게 신앙이 있는가?"라는 단순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모든 것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그럼 "신앙이 무엇인가?"

 

예수를 알고, 그의 말씀과 삶에 감동하고, 그것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삶의 좌표로 삼고, 그에 비추어 나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것이 모든 것이라면 그리 큰 문제는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역사적 예수'를 여러 책을 통해서 접해 보았다. 그런데 그 '역사' 이후, 즉 예수의 죽음 및 갈릴리로 향하는 제자들의 발걸음 이후 2000년 기독교의 역사는 분명 그 역사적 예수와 일관성이 없다. 2000년까지 갈 필요가 없이 단 20년 후에 쓰여지기 시작한 바울 서신부터 모든 것을 혼란으로 빠트린다. 내가 교회에서 행하는 대부분의 종교적 의식은 예수와 맞닿는 부분도 있지만 그후 2000년의 교회 역사가 '창조한' 것들로 채워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역사적 예수'와 그 이후의 '신앙 고백'적인 기록들, 그리고 그에 근거한 교리와 교회의 역사가 모두 하나가 되어 나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예수의 삶에 근거하여(또는 왜곡하여) 성서가 쓰여지고, 그에 근거하여(또는 왜곡하여) 교리가 만들어지고 교회(가톨릭)가 세워지고, 교회는 이제 모든 것 위에 군림하게 된다. 1500년 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에야 교회(가톨릭)와 교리가 깨어지고 본래의 성서를 찾아간다. 본래의 성서? 성서보다는 인간의 탐욕에 근거한 교회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찾아낸 '성서'은 곧바로 모든 것 위에 군림한다. 한스 큉이 이야기했듯이 교황의 자리에 종이(문자)를 올려놓은 꼴이다. 그리고 다시 수백년이 흐른 후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예수를 찾아나간다. 물론 한스 큉은 이렇게 단순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예수로 돌아감과 그것 이외의 것들의 괴리감을 해결하기가 힘들다.

 

기장 목사가 향린에는 '성자'만이 있다고 하여(성부와 성령은 없다는 의미) 물의를 일으켰다. 그것을 향린에 대해서 이야기함은 참으로 가당치 않고 경솔한 것이며 향린의 다른 교우들을 생각할 때 부당한 음해라고까지 표현해야 적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만 그러한 말을 했다면 나는 그의 의도를 비판했을 지 몰라도 나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 항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향린은 개인의 신앙고백에 대해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몫이다. 무신론자라고 해도 신앙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퇴출시키지도 않는다. 하지만 향린의 식구가 되려면 적어도 2번 서약(이 표현이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을 해야 한다. 한번은 새신자 교육 이후이고 다른 한번은 세례를 받을 때이다. 이때 그냥 형식적으로 'Yes'할 수도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향해, 그리고 다른 모든 교우들 앞에서 서약하는 행위는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다. 서약의 내용도 하나하나 곱씹어보면 단순치 않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주는 엄청난 무게감도 그러려니와 교리적 내용을 담은 신앙 고백적 내용도 호락호락한 내용이 아니다. 그러한 서약을 해야 향린의 식구가 된다. 아무도 강압하지는 않지만 사실은 엄청난 서약을 하고 향린의 식구가 되는 것이다.

 

10년 넘게 향린을 떠나 있었다. 교회를 나오지 않게 된 이유는 특별한 것이 없다.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은 무수히 많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중 하나가 나의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솔직해져야 한다고 느꼈고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지만 진정성이 없는 행위가 주는 부담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시 향린을 찾았을 때 향린의 예배가 주는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는 정말로 향린을 사랑했던 사람이 10년 이상 척박한 생활의 현장에서 메마른 영혼으로 10년 넘게 생활해 보면 그 새로운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감동이 모든 것을 덮어주지는 못한다. 비록 내가 새신자가 아니어서 새신자 서약을 할 필요가 없었고, 이미 오래 전에 세례를 받았기에 또 다른 서약을 할 필요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서약을 지켜 보면서 나는 여전히 향린의 식구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다시 한스 큉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기독교의 핵심적 구성요소로 "항구적 전제, 전범적 근본표상, 좨쳐대는 힘"을 말한다. 그것이 곧 "하느님, 그리스도, 성령"이다. 이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그는 이 세가지가 일체라는 교리적 조각 맞춤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합리적인 이성에 근거한 것이면서도 그것만으로 분해될 수 없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나는 역사학을 전공해서 인지 사물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역사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으로 오리엔테이션되어 있다. 예수의 죽음 이후 20년 동안 무엇이 있었길래 바울 서신이 나올 수 있었고, 그리고 또 20년 동안 무엇이 있었기에 공관복음서가 쓰여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다. 결코 투명해질 수 없고 결코 완벽한 해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단지 그러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노력들이, 예수를 따르는 삶의 지향에 의해 떠받쳐져 있다는 확신만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