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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8
내가 선교부를 떠난 이유
강은성 (사회부 총무)
우리 교회가 진보적인 교회로 밖에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교우들도 일부 있는 것 같다. 특히 올해 이라크 파병반대, 탄핵반대 등의 이슈로 거리에서 향린의 깃발과 교우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우리 교회가 그리 진보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보와 보수라고 부르는, 또는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가장 큰 잣대는 계급적인 문제인데, 내 자신을 포함한 우리 교우들의 다수가 중산층으로서 노동과 자본의 계급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우파나 보수의 생각을 가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제까지 선교부나 사회부 활동을 하면서 봤을 때 우리가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경우는 대부분 우리 자신의 눈앞의 손익과 그리 관계가 뚜렷하지 않는 사안이거나 사회적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는 사안에 대해서다. 이라크파병반대, 미국의 패권주의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해사건, 통일운동 등을 이의 실례로 들 수 있다. 1)
우리 교우들이 이해 관계가 뚜렷한 사안이거나 사회적 공감대가 반대로 형성되어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우리 교회는 적극적이지 못했다. 권호경 목사가 관련되었던 CBS 문제, 재산사회환원운동, 분가선교, 비정규직 노동운동, 노동자 파업, 송두율 교수 사건 등을 꼽을 수 있다. - 특히 이번 사순절 특강 때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해 강연한 민주노총 강연자에 대해 주제와 관련 없이 민주노총 활동에 대한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는 우리 교우들의 모습은 진보 교회라고 알려져 있는 우리의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우리 교회는 중산층적인 계급ㆍ계층 의식을 갖고 있는 교회이면서 지식인 관점에서 올바르다고 동의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교회라고 말하는 것이 도리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2)
한 10년 정도 일을 해 왔던 정든 선교부를 떠나 사회부로 옮기게 된 이유는, 사회부가 제 몫을 감당하면 우리 교회의 사회선교에 큰 힘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숭고한(?) 생각도 있었지만, 이러한 교회 상황에 개의치 않고 별 생각없이(!) 사회적 이슈에 참여해야 겠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가장 컸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선교이기 때문에 교회 부서 중 선교와 관련이 없는 부서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선교부는 이름 그대로 우리 교회 선교의 핵심에 있으면서, 교회의 선교 목표와 전략을 수립하고 조직하는 부서라면, 사회부는 좀더 사회적 이슈에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현장’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가 선교라고 말하면, 당연히 ‘하느님의 선교’를 말한다. 기장 교단과 우리 교회가 채택하고 있는 ‘하느님의 선교’ 개념은, 교회나 내가 선교 주체가 아니라 하느님이 스스로 선교의 주체이고, 교회는 그것에 참여하는 것임을 밝힘으로써 그동안 있어 왔던 침략적ㆍ시혜적ㆍ개인영혼 구원 중심 선교가 잘못된 것임을 명확히 했다. 또한 우리는, 신음하고 있는 하느님의 형상들을 회복시키는 하느님의 선교를 통해, 그들뿐 아니라 선교에 참여하는 이들도 함께 변화하는(구원받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를 오늘 우리 현실에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한다면, 나는 선교를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의 현장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이 ‘현장’은 안병무 선생님이 말씀하신 ‘예수 사건’의 현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적 강자가 가진 것을 누리는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과 구원의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장’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깊은 감동과 변화, 자기 초월의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예수 사건’에서 성서의 사람들이나 생존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현장에서 이 땅의 민중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참여하는 것 이외의 뭔가 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대안이 있어야 참여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분명 틀렸다. 교회는 하느님의 형상이 아파하는 곳에 찾아가 함께 아파하는 것이 그 일차적 소명이다. 아파하지 않으면서 대안이 나올 수 없고, 설사 대안이 나오더라도 그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반영하기 어렵다.
특히 앞으로 우리 교회가,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농촌 문제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와 재벌의 논리로 농촌의 피폐함과 희망 없음을 설명할 수 있고, 기업의 논리로 비정규직이 왜 필요하고, 기업의 비용을 줄임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논리에는 ‘사람’이 없다. 거기에는 가난 때문에 자살로 내닫는 하느님의 형상에 대한 애정이 없다. 우리가 신앙과 선교의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 본다면, 그 안에서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다면, 좀더 힘있게 이 일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예산이 부족해서 선교하지 못하니까 교인 수를 늘려서 재정을 확충해야 한다.
- 교회갱신실천선언의 선교 예산 30% 배정은 상징적 의미이다. 지금은 교회 예산이 적어서 30%를 배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 교회가 사회단체 같다. 영성이 부족하다.
- 우리 교회가 너무 차갑다. 교우들 사이에 관심과 따뜻함이 부족하다.
- 신도회에도 일할 사람이 없는데, 제직회 부서 일까지 하라고 하면 어렵다.
선교부 일을 해 오면서 들었던 말들이다. 위 주장에 동의하는 수준에도 차이가 있고, 반대하는 의견도 많이 있지만, 꾸준하게 이런 주장을 들었던 걸 생각하면, 일부 공감대가 있는 주장인 듯싶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우리 교회가 좀더 선교에 집중하는 교회가 되고, 우리 교우들이 선교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 예산을 미리 30% 선교 예산으로 잡아 놓고, 수입에 따라 다른 지출을 배정한다고 해서 다른 예산이 부족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예배당뿐 아니라 선교 현장에서 교우들이 만나면 관심과 따뜻함이 배가된다. 3)
굳이 서로 챙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더라도 개인 사이의 따뜻한 정이 새록새록 돋아나고 그 활력으로 신도회는 활성화된다. 내 자신의 이해 관계가 걸려 있지 않은 일들, 도리어 내 개인의 이해와 상반되는 실천의 현장에 참여해서 내 자신을 비울 때 영성의 샘물은 솟아난다. 예배당에서 서로 만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거리와 자원 봉사의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아픈 현실에서 만나자. 그 곳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우리 자신이 변화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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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운동을 여기에 넣는 것에 의아해 하는 교우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워낙 반통일 세력이나 흡수통일 세력이 많았던 탓에 우리와 같이 북녘의 반쪽 겨레를 하느님의 형상으로, 통일의 동반자로 여기는 우리들이 진보적으로 충분히 평가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진보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때는, 통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우리 세금을 올려야 한다거나, 갖고 있던 북녘 땅 문서를 무효화시켜야 한다는 등 통일과 우리의 손익이 상충할 때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진보성을 가를 수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2) 물론 우리 교회는 매우 장점이 많은 교회다.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민주적인 제도를 갖춘 교회이고, 다수 교우들이 민주적인 절차를 인정한다는 점을 든다. 우리가 그나마 진보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교우들이 협의해서 그 일을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교우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3) 이미 이라크 파병반대 집회에서 만나 저녁 한 끼 같이 한 이들, 명동 서명대에서 함께 서명받느라 애쓴 교우들, 국가보안법 폐지 국회 앞 1인시위에서 함께 하는 이들, 남양주와 주몽, 희년의 집에서 봉사하는 교우들, 들녘교회 논에서 피 뽑느라 함께 땀 흘린 교우들이 이를 이미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