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기행

내가 팔자에 없는 광주기행을 두 번 씩이나 하였다. 이것은 전적으로 김 목사 덕분이었다. 한번은 9월 초순경에 있었고 또 한번은 10월 하순이었다. 전남 광주의 김 목사에 가능하였고 그가 크게 수고하였다. 첫 번은 광주에서 이틀 밤을 김 목사님 누님 댁에 신세를 졌고 그 다음날은 배 대표 댁에서였다. 배 대표님 내외는 특별히 우리 집에서 유한 적이 있었다. 배 대표님은 귀한 손님 대접하느라고 비싼 산 낙지 집에를 우리를 데려 갔으나 이날 산 낙지를 시키는 통에 김 목사도 나도 산 낙지를 손을 대지 않아 배 대표의 실망이 컸다. 그 날 합석한 오 목사님만이 산 낙지를 즐기는 같았다.
26일 날 아침에 고속 뻐스를 탔다. 본래 KTX를 타고 가기로 하였으나 시간을 못 마추어 부득이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오늘까지 크리스챤 정치논설의 원고를 보내주기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고속 뻐스를 타고 기분 좋았다. 김 목사에게 전화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날 예정대로 1시 반에 도착하였다. 정 국장을 만나 복사하였다. 그는 따로 무안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그날 저녁 식사는 김 목사를 만났다. 말로만 듣던 김 목사다. 그가 건강진단을 한다고 하여 늦게 왔다. 물론 시간이 되어서는 전화를 하여 양해를 구했다. 그는 김 목사에 의하면 굉장히 정치적으로 실력자이다. 김 목사도 또 다른 김 목사도, 김(경제) 교수도 모두 광산 김씨라 하였다. 그래서 나와 가까운 사람이 된 것은 미국에 있고 내달 초에 방문예정인 내 처가 광산 김씨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로만 듣던 백양사를 구경시켜주었다. 그것도 경치가 좋은 시골길로 구경시켜 주려고 그렇게 루터를 정했다. 아직 단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파랗게 그대로 있어 계절은 가을에 접어들었으나 금년은 가을이 약 10일 늦게 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군데 군데 단풍이 든 곳도 있었다. 백양사를갔으나 자동차가 안에 까지 못들게 하므로 우리는 차에서 내리는 번거러움 대신에 자동차를 그냥 탄채 돌아 나와야 했다. 그는 총회장하던 집을 재치고 백양사에서 한참을 더 가서 어떤 식당 앞에 섰다. 그의 교인이 경영하는 식당 같았다. 그 식당에서 정식을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점심 때 목포에서 목회하는 김 전도사를 김 목사가 불렀는데 그가 왔다. 김 목사가 결혼하고 나서 김 목사 집에서 산화와 정기를 길렀다고 하였다. 그가 김 목사가 노래를 시켜 ‘목포의 눈물,’ ‘직녀에게’ 두 곡을 불렀다. ‘직녀에게’는 국 전도사와 문 사모님이 생각났다. 그들이 지금은 전주 고백교회 전도사로 있지만 본래 향린교회에 가입할 때 부른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 올 때는 비가 몹시 왔다. 우리가 출발한 곳에 어김없이 내려주고는 그는 봉투를 내게 주었다. 돈인 모양이었다. 후에 보니 100,000원이나 되었다. 고마운 분이었다. 그에게 감사하다는 전화를 한 것은 물론이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를 위한 내 염려를 김 목사에게 전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또 감사의 전화를 할 것을 암시하였다. 그래서 재차 전화하기도 뭣하여 김 목사의 e-mail 주소로 감사인사를 전하게 하였다.

김갑수 목사님께:

“이전에 제가 광주 갔을 때에 백양사 단풍을 구경시켜주시고 좋은 식당에서 저녁을 대접해 주시며 용돈 까지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 돈은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특히 김 목사님이 광산 김씨라고 하여 더욱 친척 같이 느낍니다. 지금 미국에 체재하고 11월 8일에 귀국 예정인 제 처가 광산 김씨이기 때문입니다. 광주에 살고 있는 김용성 목사가 제 처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물론 미국에 있는 본인은 알지 못하고 있으나 귀국하면 말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어서 무안으로 향했다. 길이 서툴렀으나 김 목사는 용케 찾아갔다. 박석분 팀장의 교육이 이미 끝나있었다. 본래 서울에서 약속은 그의 교육에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약속을 못 지킨 것이다. 이점 미안하게 생각하였다. 그날 밤은 모두 배 대표 댁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배 대표 댁에 대해서는 미안했다. 느닷없이 처 들어간 것이 되어사모님에게 미안하였다. 박 팀장은 전에 우리가 머물었던 그 방에 자게하고 우리가 거실에서 잤다. 새벽에 누가 나가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박 팀장인가 했더니 사모님인 모양이었다. 아침에 여느 때처럼 목욕을 하였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였다. 나는 목회 때처럼 억지로 아침 식사를 하였다. 그것이 몸에 베였나 보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고 배 대표가 볼 일 보는 동안 노인들을 위한 위로차 잔치를 베푸는 자리 옆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배 대표를 만나 요전에 구경하다 해가 저물어 못 본 ‘조금’ 포구를 구경삼아 보았다. 그 때 도중에 평상이 보였다. 톱 바위라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차를 세우고 잠시 물가에서 쉬었다. 해당화 열매도 보았다. 그런데 꼭 신안 비치 호텔 앞바다 같이 보였다. 목포를 물어보니 배 대표가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다른 곳을 가르쳤다. 무인도도 있었고 도시 같은 곳도 맞은편에 보였다.
나주에서 교육이 있을 예정이고 강사는 요전에 무안에서 수고했던 박 팀장이 계속하기로 되었다. 본래 김 처장이 오기로 하였으나 서울에서는 1만인 선언 때문에 못 그가 못 오고 그 대신 박 팀장이 대신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사정이 그러하므로 짐작하고 박 팀장이 그대로 강사로 했으면 한다고 어제 저녁에 이미 말했다. 그 대신 박 팀장은 낮에 집에서 컴퓨터를 했으면 하므로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 대신 나주에 갈 때는 집으로 와서 그를 픽업하기로 하였다.
그 후에 시간에 맞추어 나주를 향했다. 오늘 하필 영산강 축제를 한다고 하여 도시가 붐볐고 예비역이지만 해병대가 정복을 입고 교통정리를 하였다. 그곳 나주에는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분들은 해병대 출신으로 ‘나주 사랑 시민회’ 박 대표, 최 대표, 김 목사, 이 교수, 안 국장 등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곳의 김 목사란 이는 김 목사 또레의 목사였는데 아리랑을 불렀다. 끝나고 저녁을 먹었다.
그날은 박 팀장은 광주로 와서 광주역에서 내려 서울로 향하였고 나는 한마음 교회 사댁에서 하루 밤을 지냈다. 그 후에 강 교수님하고도 잔 밤이다. 그 때는 아마 평통사 전진대회 날인 것 같다. 다음날 아침 몰래 빠져 나와 KTX를 놓쳐 8시 20분 고속 뻐스로 돌아왔다. KTX를 놓친 것은 올 때나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인생여정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을 하리라 생각은 하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매 마찬가지일 것이다. KTX를 타려고 생각하였으나 실제로는 달랐던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번에도 내가 만나고 싶어 하던 홍 목사, 송 교수, 한 목사는 만나지 못했다. 아마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김 목사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것이 이로써 2박 3일의 광주기행이 모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