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목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아! 정신을 차려라!


시내 대형교회의 김모 목사는 지난 2일 설교에서 동남아의 쓰나미 재앙에 대하여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했다`고 하여 우
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또한 물의를 빚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하고(아체, 첸나), 힌두교가 창궐했으며(첸나), 향락과 죄 짓는 장소(푸껫)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그가 그러한 무식한 소리를 용감하게 한 것이 가상하다.
이는 교통사고로 죽은 젊은 손자를 두고 통곡하는 같은 권사에게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그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야` 라고 위로했다는 한 권사의 어리석은 위로의 말과 마찬가지로 매우 적절하지 못할 뿐이다. 그는 매주 수만 명 앞에서 이렇게 설교(說敎) 아닌 `설교`(泄狡)를 하는 목사로서 최근에는 31억이란 막대한 교회 공금을 횡령하였다 하여 징역 2년 6개월에 집유 3년 선고를 받은 바 있는 큰 사도(邪道) 중 으뜸 가는 도둑일 뿐이다.
그는 사랑이 아니라 미움을 설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비판을 했지만, 한국적십자사 총재인 한완상 장로는 지난 17일 오후 그의 망언과 관련 "참 기가 차다”며 "예수님의 뜻과 가장 멀리 벗어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통탄스럽고 경악스럽다”고 비판했다.
사실 그의 그러한 설교는 비록 교회 강단에서 외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적인 설교라고 볼 수 없고 `예수의 뜻과 가장 멀리 벗어난 이야기`라고 특징 지우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회의 본질과 근본성격으로 볼 때 나는 한 목사로서 교인들을 어리석은 존재로 취급하고 있는 그런 목사의 반공 논리의 말을 매주 설교로 들어야 하는 교인들이 안스러 을 뿐이다. 그는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使徒)가 아니라 사도(邪道)의 말쟁이일 뿐이다. 설교란 목사가 하는 것이지만, 목사가 모두 보냄을 받은 목사가 아닌 것은 그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슬람교인들을 기독교가 아닌 다른 특정 종교를 믿는다 하여 그들이 해일의 피해를 당한 것을 두고 사랑의 손길은 못 펴는 마당에서 이들을 하나님의 심판을 당했다고 운운하는 것은 죽은 손자를 인해 통곡하는 권사에게 하나님의 뜻 운운하는 권사와 다름 없다. 그렇다면 예수를 독실히 믿는 사람들이 재앙을 당한 것은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그의 그러한 무지한 주장은 김일성 주석이 죽었을 때 그것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기도의 응답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기독교인들의 말과 같다. 길일성 주석은 40년 이상 권좌에 있었고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25백만 북한 인민들이 모두 땅을 치고 통곡을 하였으며 80세 까지 살고 그 날도 그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한 남.북 정상회담 준비를 마무리 하느라 몸소 점검을 한 후 밤에 자는 사이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그렇다면 50 전에 죽은 목사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죽었다고 할 수 있는가? 한국 기독교인들의 기도의 응답이라면 더 일직 죽었다면 모르되 80년이란 평균 수명도 넘어 살았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어떤 통치자가 20년 이상 권좌에 있다면 그가 설령 악한 통치자라 하더라도 정치적인 영웅이라고 믿는다면 김일성 주석이 40년 이상을 주석으로 있으면서 북한이란 나라를 통치하였다면 이는 정치적인 영웅이 아닌가? 그리고 동양인들 - 모든 인류의 소망일 것이다 - 의 소원은 인생을 다 살고 죽을 때 그렇게 고통 없이 밤에 자는 듯이 가는 것이 아닌가?
그의 무지는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에 대한 무지에도 있다. 이락크 전쟁을 제 2의 `십자군 전쟁`으로 본 부시와 다를 바 없는 역사적인 사실에 무식하다고 또 인류 양심과 도덕의 비난의 표적이 되어 마땅하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그의 무지의 정도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상 십자군 전쟁은 실로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저지러 진 야만적인 죄악일 뿐이다. 그런데 소위 `해방`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들의 원초적인 감정에 호소하여 예루살렘을 단순히 이슬람 신도들인 `이교도`의 지배로 부터 탈환하려고 한 것이 십자군 전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오늘과 같은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적합한 목사가 못됨은 물론 그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식의 정도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신학에 근거하여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설교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낡은 시대의 유물로 없어지고 없는 그 자신의 반공논리나 이미 역사의 유물로 봉괴되고 퇴조한 냉전논리를 뱉어낸 것 뿐이다. 그는 이미 지나간 반공 논리와 냉전 논리를 폄으로써 역사를 뒤로 후퇴시키고 있는 사람 같다. 반공 논리나 냉전 논리는 더 이상 현실에 없는 것이란 점에서 반공이란 악령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무덤 속에 살고 있는 악령들인 자`와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성서에 나오는 무덤 속에 살고 있던 악령 들렸던 병자는 그리스도를 만나 멀정한 사람으로 치유를 받았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고도 치유되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어제란 무덤에 살고 있는 악령 들린 병자로 그대로 있는 것 뿐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자신의 말, 이 둘을 구별할 능력도 지식도 없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기대하여 그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안스러울 뿐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여전히 그런 반공 논리와 냉전 논리를 펴고 있는가? 반공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진정한 의미의 설교란 무엇인지 알 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진정한 설교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은 정말 무엇인가?
지금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해방이 필요로 하는 때이다. 설교 아닌 설교를 감내해야 하는 설교의 청중들인 교인들, 이들은 되먹지 않은 성서 지식과 상식의 소유자인 설교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설교는 인간의 교양과 상식에 토대한 인간의 말이 아니다. 설교는 시대의 발전을 저해하고 가로 막는 인간의 말이 아니다. 설교는 인간들 사이를 여러 가지 인간적인 요소로 서로 갈르고 이간시키는 편협한 인간의 짓거리와 다른 바다 같이 넓고 하늘 같이 높은 하나님의 아량과 너그러움에 토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은 물론 원수 사랑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사랑이다.
지금은 설교의 청중들인 교인들이 무지와 관용과 무책임의 긴 잠에서 `깨어나서 일어서야` 할 때이고 정신을 차리고 경성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