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산 역에서 솟아난 2005년의 처음 햇살을 보고
2005.1.1, 도라산 역에서


나는 2005년 새해 - 닭띠인 을유년이라 하였다 - 를 맞아 새해 맞이 철도기행으로 도라산 역에 가기로 하였다. 그곳은 민통선 이북에 존재하여 말로만 들었지 판문점과 함께 일반인들에게는 통행이 금지된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남한에서 갈수 있는 최북단이다. 나는 민주노총으로부터 재야 통일인사들과 장기수 어른들과 함께 초청인사로 초청을 받아 도라산에서의 2005년 새해 맞이 철도기행을 위해 용산역을 향해 떠났다.
정해진 시간인 2004년 12월 31일 밤 11 용산역에 가기 위해 그날 밤 10시 가까이 되어 홍은동 집을 나섰다. 밖은 아주 추웠다. 용산역에는 벌써 목포와 부산 등지에서 온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 동지들이 모여서 행사가 시작되었었다. 행사 이름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새해맞이 철도기행’이었다.
행사 취재하는 기자들이 눈에 띠었다. 통일 뉴스의 이현정 기자가 금년도 소원을 묻기에 행사를 하는 요란한 분위기 가운데서 ‘새해를 맞아 금년에는 반드시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고 이어서 새해에는 미군들이 철수하기를 바라고 이를 위해 총력 투쟁을 계속하기 바란다. 그래서 금년은 분단 60주년이 아니라 민족자주 통일의 원년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였다. 주위는 매우 시끄러워 잘 듣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밤 11시부터 약 1시간 반 동안 용산 역에서 축하 행사가 집회형식으로 있었다. 새해 카운트 다운도 있었고 우리는 춤을 추었다. 지는 옛 해와 함께 작년 2004년 동안의 모든 실패와 잘못을 떠나보내는 행동도 하였다. 그리고 새 해를 축복하는 말도 옆 사람들과 나누었다. 미국에서는 아무나 하고 포옹하고 키스하는 것이 관례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한국의 문화는 아닌 것 같았다.
용산 역 광장에서의 행사가 끝난 후 우리는 2005년 1월 1일 새벽 1 시경 지정된 기차 좌석에 타고 떠나는 4시까지 자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4시에 요란한 차내 방송으로 자는 사람들을 깨우는 순서를 진행하였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있는 동안 민주노동 일꾼들은 기차를 타고 있는 우리들에게 푸짐한 선물도 주었다. 우산, 고급 마호병, 그리고 볼펜 등의 푸짐한 삼품이었다.
앞서 간 차도 있어 다시 30분을 더 기다려 우리가 탄 무궁화는 오전 4시 반에 용산역을 출발하였다. 이날 아침에 도라산 역으로 간 기차는 경부선과 호남선이었다. 호남선에 탄 우리는 서울 용산을 떠나 불과 2시간 남짓 달리는 도라산 역이 도착하였다.
기차에 약 1 시간 그대로 기다리다가 7시부터 도라산 역의 북쪽 역 쪽의 옥외 광장에서 새해맞이 행사가 시작되었다. 추운 겨울날 아침이었다. 주위는 아직 어둠이 깔려 있었다. 사물패의 놀이, 무용수들의 무용, 사물패의 놀이와 제사, 통일기 게양, 그리고 통일염원 모으기, 소원지 불태우기 등 통일염원 비나리 행사가 치러졌다. 나는 전 범민련 남측 의장 이종린 선생과 함께 행사장 무대에 올라가서 통일염원 절을 올리고 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단일기 게양을 하였다. 그리고 솟아오르는 해를 향해 소원을 빌었다. ‘금년은 우리 가족들의 만사 형통과 김영 목사가 좋은 목회와 성봉이의 결혼을 위한 해’가 되기를 빌었다. 그리고 또한 ‘민족적으로는 분단 60년, 또 미군 점령 60년으로가 아니라 민족자주 원년, 통일.평화 원년’이 되기를 빌었다. 바다 위로 솟은 해돋이를 많이 보았지만, 성지처럼 산 위로 솟아오르는 아침 해돋이도 볼 만 하였다.
떡국을 급히 먹고 아침 8시 30에 서울역을 향해 도라산 역을 떠났다. 생각 같아서는 내친 김에 200 여 킬로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평양에 이 기차로 가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50여 킬로 미터 떨어진 서울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기차가 도라산 역을 떠날 때에 ‘이곳은 남한에서의 마지막 역이 아니고 북을 향한 첫 역이다’는 말이 쓰여 있었던 그 말을 옆에 앉았던 한상렬 목사가 환기시켰기에 나도 그것을 이미 보았다는 말과 함께 그 말은 미국인이 좋아하는 ‘오늘에 대한 정의’에서 본 받은 말 같다고 하였다. 미국인은 오늘을 ‘지금까지 살아 온 나의 생애의 마지막 날이지만, 동시에 남은 여생 - 그것이 얼마가 되었던지 - 의 첫 날이다.’라고 정의하였다. 한 목사도 그 말을 듣더니 그 말을 본 뜬 말 같다고 동의하였다. 그렇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곳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서울로 오는 기차 속에서 소감을 물어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이수호 위원장의 지도력 하에 민주노총이 이번 도라산 역 광장에서 새 해 첫 해돋이 행사를 한 것은 내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할 좋은 행사였다. 금년 한해 동안민주노총과 여러 동지들 위에 그리고 가정과 댁내 제절에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국가 보안법이 2004년 내로 철폐되지 못하고 금년으로 넘어온 것은 불행이지만, 금년 2월 임시국회에서는 기어히 폐지되기를 바란다. 작년 투쟁의 성과이지만, 우리가 투쟁을 꾸준히 하면 정치권에서 이미 한 말들은 후퇴할 수 없으므로 더 이상 후퇴는 안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금년 2월에 국가보안법은 폐지되리라 생각한다.
이제 문제는 미군철수이다. 우리는 금년에 어떻게 하든지 미군철수를 위해 대 투쟁,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 못지 않는 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금년은 분단 60주년이 아니라 민족자주 통일 원년으로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을 하였다.
간 밤에 한 쉼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새해 첫날 낮이지만, 자기 위해 거실에서 배게와 덮는 이불을 내놓았다. 신문을 보면서 잠들기 전에 김종일 처장으로부터 저녁에 몇 사람 간부들이 찾아와서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좀 잤다. 전화 벨에 깬 나는 미국 뉴욕 시에 사는 성봉과 수빈으로부터였다.
전화를 받고 그들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가 왔다. 그곳은 12월 마지막 날 밤이겠지만, 이곳은 벌써 2005년의 오후였다. 새 해를 축하하는 전화였다. 내가 혼자 이곳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수빈의 아버지처럼.
약속 대로 김종일 처장이 윤영수 집사와 함께 저녁 6시에 왔다. 부인인 고정림 집사는 무리하여 몸살이 났다면서 윤 집사 혼자 왔다. 우리는 구기동의 옛날 민속집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왔다. 윤 집사가 고마웠다.
저녁에 최영선 권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침에 전화했으나 응답이 없어 결국 아침 떡국을 드릴 수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대신 케익과 잡체를 가지고 와서 케익은 변형숙 권사, 조향식 권사, 최영선 권사, 이렇게 셋이서 샀다고 했고 잡채는 최 권사의 요리라고 했다. 내일 먹기 위해 냉장고에 넣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