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가운데 살아가기
2004;12.16


나는 예정대로 지난 11월 16일 저녁에 귀국하였다. 두 달 동안 의 미국 여행을 끝내고 귀국하였으나 개인적인 볼일, 가정적인 일로 부득이 부산을 다녀와야 했다. 물론 서울 집에는 산적한 일들이 쌓였고 내가 오도록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은퇴한 지 1년 반, 내 나이 67세 4개월에 귀국한 나에게 재앙이 잇따라 일어 났다. 처음에는 감기가, 그 다음에는 머리를, 그 다음에는 화상을 각각 입었다. 나는 ‘독감감기예방’ 주사는 임승계 장로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맞았다. 그러나 ‘일반 감기’는 부방비 상태로 주의할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감기기운이 있을 때 평통사의 배려로 아래 층의 한의원에서 약을 복용하였다. 감기로 몸이 불편한 동안 집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몸이 좀 나아가자 갑갑하여 견딜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몸이 불편하여 어려웠지만, 감기를 다른 사람에게 퍼드리는 것 같아서 사람들 만나는 것을 삼갔다. 결국 감기로 여러 날을 고생한 셈이었다.
그러다가 감기가 나아갈 무렵 다시 집에서 철로 된 출입문에 머리를 찌어 피가 났다. 사소한 일인 나사가 문 끝으로 굴러가서 그것을 줏으려 한다는 것이 넘어지면서 철문을 드리 받았다. 내가 생각해도 체중 때문에 세게 받힌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손을 대 보았더니 피가 손에 많이 묻었다. 그러나 옛날 생각으로 병원에 가지 않았고 견디었는데 다음날 출근했을 때 역시 평통사의 젊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적했고 어쩔 수 없이 이실직고하였더니 간호로 약을 사다가 사무실에서 치료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낮에 화상을 입어 결국 두문불출하게 되었다. 그게 지난 12월 14일(화)일었다. 컴퓨터를 하다가 시간이 되어 결국 집을 나서게 되었으나 점심 먹을 시간이 바득했다. 향린교회에서 모이기로 한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의 상임대표자 회의로 가야 해서였다. 나는 향린교회 근처에서 점심을 먹을까 하고 생각하고 정장을 하고 집 현관을 나가서 신발을 신었다가 또 한편 집에 음식을 많이 사놓은 것이 보여 그것을 해 먹고 나가면 좋겠다고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나는 외투와 바지를 벗고 양말을 신은 채 곰탕을 끓였다. 그런데 곰탕그릇이 끓었는데 좀 얇은 그릇이지만 그 그릇에 곰탕을 따루었다. 그 순간 그 그릇이 뜨거움에 견디지 못하고 깨지면서 그 국이 상 밑 내 발로 손아지면서 결국 발을 대었다.
뜨거워서 양말을 벗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모양이었다. 발이 무척 아팠으나 옛 가정처방처럼 간장을 환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