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시글은 구게시판 어딘가에 있던 글입니다)

1. 얼굴도 보지 못한 내 할아버지는 경상북도 포항시 죽장면 상옥교회를 세우셨고 영수셨다고 한다. 큰아버지(盤石)과 아버지(盤壽)는 모태신앙이지만 난 모태신앙은 아니다. 내 어릴 적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시는 어머니를 박해하셨다. 늘 자애로운 아버지 덕분에 나는 아버지의 이유가 타당하다 느꼈고 교회에 갈 이유가 없었다.


2. 교회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1977년 여름 여자친구를 만나면서부터이다. 교회생활에 열심인 그녀를 만나기 위해선 내가 교회로 가야했다. 그러나 일요일엔 교회보다 등산에 더 열심이었다. 군생활 3년을 포함해 만 7년동안 만남의 결실을 1984년 1월 15일 맺었다. 결혼 후 한달에 세 번은 교회, 한 번은 등산의 약속은 한 달밖에 지켜지지 않았다. 그 후론 네 번 모두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3. 장위동 셋방에 살 땐 가까운 장석교회에 다녔다. 그러나 직장을 옮기고 집도 이사를 가게 되자 교회를 계속 옮겨야하는 문제가 생겼다. 아내와 의논한 끝에 도심의 교회를 선택하면 어디로 이사를 가던 교회는 옮기지 않아도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교회가 새문안교회(1985년)였다. 고 김동익 목사는 역사적 인식이 깔린 설교를 자주했다. 그는 목자의 뜻을 조금 아는 leader sheep이라 했다. 광화문의 기습 시위에 교회는 집결지로도 이용되었다. 큰아들을 안고 교회에 다녔던 우리 부부는 최루가스를 피해 다니기에 바빴다. 마음의 응원은 했지만 몸으로 나설 수는 없었다.


4. 아내와 함께 유치부, 성가대 봉사도 함께 했다. 두 아들도 교회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변화는 김동익 목사의 죽음과 함께 찾아왔다. 새 목사는 극우의 입장에서 설교를 자주했다. forum을 결성해 정치 설교의 자제를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결국 내가 20여년 다녔던 교회를 옮기기로 했다.


5. 향린을 등록하지 않고 몇 달 다녔다. 고등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치고 있어 좋아하는 여행이 계기가 되어 김태준, 강정구 교우 등과 교제하게 되었다. 권위적이지 않은 사람들이어서 좋다. 향린이 추구하는 예수닮음도 몸은 낮은 곳을 향하지만 의지는 높이 있을 거라 믿는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에 뒤따라오는 이를 위해 바른 걸음을 걸으리라 믿는다. 이 시대 우리의 삶이 후세의 역사가 된다는 두려운 맘으로 사는 향린 공동체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