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에 대한 안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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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ᄋᆞᆯ의 소리 2015년 9,10월호 게재 원고]
안병무선생을 기리며
조헌정목사(향린교회)
(약력) 1922년 평남 안주 출생, 용정 은진중학교 졸업.
일본 와세다 대학 재학 중 징집령을 피해 간도로 귀환.
서울대 사회학과. 하이델베르크대(신학박사).
1963년 함석헌과 함께 북유럽 여행.
중앙신학교 교장, 한신대학 교수. 한국신학연구소장 역임
『역사와 해석』, 『갈릴래아의 예수』 등 30여권 저술.
1996년 10월 19일 향년 75세로 별세
[안병무와 필자]
필자는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을 1972년부터 1976년까지 다녔다. 당시 안병무교수는 한신대 교수로 봉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기간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그 마각을 드러내던 시기로 나의 대학생활은 휴강, 휴업 그리고 휴교령이 반복되었다. 첫해를 제외하곤 한학기도 제대로 수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1학년은 기초과목을 하던 때라 안병무선생의 강의는 들을 수가 없었고, 설교나 특강을 통해 접할 수가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 1학년 때 안병무는 교무부장으로서 당시의 쟁쟁한 여러 분야의 학자들을 강사로 초빙했고 그 중의 한분이 함석헌선생님이셨다. 지금도 책 두어 권이 들어간 작은 보따리를 들고 하얀 도포자락과 수염을 흩날리며 교정을 올라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학년 때의 안병무선생의 강의는 시국상황으로 인해 몇 번의 수업으로 그치고 말았으며, 3학년에는 해직교수가 되셨고, 이후 졸업식장에서 만나 인사를 하게 되었다. 복음서 전승에 관련하여 논문상을 받았던지라 사진을 찍고 잠시 얘기를 나누었고, 그때 나는 독일어 신학동아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부탁했고,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하자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함께 참여할 학생들을 물색하고 있던 중, 열흘도 되지 않아 선생님께서는 명동성당 [31구국선언] 사건으로 영어의 몸이 되셨고, 그리고 나는 반년 후 군대 징집을 받았고, 군복무가 끝나자마자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난 그것으로 안병무선생님과의 인연은 끝난 것으로 알았다. 그러니 그게 끝은 아니었다.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안병무선생의 마가복음 민중신학에 기초하여 석사학위 논문을 썼고, 이후 이민목회를 하던 중 워싱톤을 방문하신 선생님을 만나 하루 저녁에 불과하지만 제자로서의 해후를 풀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은 지병인 심장병으로 유명을 달리하셨고, 난 태평양 바다 건너에서 추모의 정만을 품고 있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안선생께서 서울대기독학생 친구 10여명과 함께 시작하고 오랜 시간 대표적인 설교자로 봉직하셨던 향린교회의 3대 담임목사로 오게 되었고, 지금은 ‘심원안병무기념사업회’를 책임지고 있으니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한신대 1학년.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청년 시절 돌이켜 보면 당시 필자는 쏟아져 오는 새로운 (혁명) 사상을 마른 스폰지마냥 흠뻑 빨아들이던 한해였다. 함석헌선생의 우주의 생명을 담는 동양사상 강좌를 비롯하여 강제 폐간된 사상계에 실린 김지하의 오적(五賊) 시, 씨ᄋᆞᆯ의 사상, 김재준목사의 제3일지, 그리고 안병무선생의 현존(現存)지는 이제 세상과 사회에 막 눈을 뜨게 된 필자와 같은 젊은이들에게는 생명수나 다름이 없었다. 모태신앙인으로 신학대학을 들어가서 받은 신학적 충격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하랴. 그중에서도 안병무선생의 『역사와 해석』의 전편이 되는 『역사와 증언』이라는 성서 전체를 해석한 작은 문고판 책은 당시 나의 신앙이 철부지 없는 유아신앙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필자는 향린교회의 부임 이래 지금까지 매년 두 차례 이상 주로 새 교우들과 함께 『역사와 해석』 성서배움반을 이끌고 있다. 신학을 공부한지가 40년이 넘었고, 그간 수많은 세계의 유수한 학자들의 책을 만났지만, 성서해석서로서 필자는 단연코 『역사와 해석』을 꼽는다. 기독교서적으로는 가장 오랫동안 읽히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기독교에서 안병무전집 10권을 번역 출판할 예정인데 첫 번째 책으로 『역사와 해석』이 올해 출간될 예정이다.
[바닥으로 내몰리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물음을 품고 독일로 가서 세계적인 석학 불트만의 학문을 중심으로 10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안병무는 역사적 예수는 ‘알 수 없다’고 하는 답을 내어 놓는다. 그러던 그에게 변화의 기회가 왔다. 그건 [31구국선언문] 사건으로 옥에 갇히면서부터이다. 0.78평의 좁은 독방 안에서 쥐와 빈대와 여러 벌레들과 함께 살아가야 했지만, 동시에 사회의 밑바닥에서 벌레같이 살아가던 저주받는 자들을 만나게 된다. 강도, 좀도둑, 소매치기, 강간범, 경제범, 사상범 등 곧 그 시대의 씨ᄋᆞᆯ이자 민중들이었다. 안병무는 바로 저들이 예수와 함께 했던 갈릴리의 민중들 지배세력으로부터 억압받고 차별받았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이었음을 깨닫는다. 곧 감옥에서 만난 저들이 마가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예수를 따라다니던 무리, 오클로스임을 깨닫는다. 여기에 결정타를 가져온 사건은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다.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했던 한 이름없는 노동자의 분신 사건이 역사를 움직여가는 거대한 민중사건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한국적 해방신학인 민중신학이 태동하게 된다.
물론, 민중신학은 6,70년대의 미국의 흑인해방신학이나 남미의 해방신학과는 ‘해방’이라는 주제에서는 같지만, 신학의 방법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다. 서구사고의 기본인 주객도식 방법이나 이분법적인 사고를 배제하고 민중과 예수를 고립된 실체나 별개로 보지 않고 둘이 둘이 아닌 관계, 곧 불이적(不二的)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은 당시 해직교수들(문익환 서남동 안병무 문동환 이문영 현영학 등)이 함께 예배하고 신학적으로 토론하는 가운데서 시작했지만, 이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이는 안병무교수와 서남동교수이다. 안병무교수는 성서신학자였고, 서남동교수는 조직신학자였다. 이 둘이 하나로 엮어지면서 학문적 체계가 섰고, 그리고 민중신학은 당당히 세계 신학계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며, 지금도 세계신학계는 민중신학을 한국신학의 거봉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민중신학이 지금도 살아 있느냐? 혹은 유효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물론 모든 신학은 특정한 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상황신학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철저하게 복음서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쓰인 마가(혹은 마르코) 복음서의 핵심 사상인 예수의 수난과 함께 했던 오클로스 사상에 기초하고 있기에 복음서가 존재하는 한 민중신학은 죽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다. 민중신학이 서구신학 없이 홀로 설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구신학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는 그 근본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민중신학은 서구신학이 기초한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의 인간 죄의 문제를 사회역사적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본다.(서남동은 개인의 죄(罪)를 집단의 한(恨)으로 대체한다.) 안병무 또한 예수 이야기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고, 사회역사적 차원에서 일종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곧 서구신학이 중심으로 삼았던 ‘말씀’이 아니라 ‘사건’이 먼저 있었다고 말한다. 말씀은 혼자 전할 수 있지만, 사건은 집단이 만들어낸다. 여기서 안병무는 예수사건을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예수 무리’ 곧 민중 사건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함으로 안병무는 역사의 예수를 회복한다. “예수를 시멘트로 가둔 것, 그것이 바로 교회가 만들어 낸 그리스도론이다. 그의 머리에 씌워진 금관, 그것은 바로 예수로 하여금 기존 교회를 옹호하도록 만든 이데올로기이다. 한국은 가톨릭 200주년, 신교 100주년의 그리스도교 전통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랫동안 서구에서 형성된 도그마에 의해 화석화된 예수만 제시했으며, 이로써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고뇌를 같이하는 예수는 가두어졌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급속하게 성장했던 20세기의 남한교회는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그 힘이 점차 약해져가고 있다. 아마도 성장 속도에 비례하여 급속하게 몰락하리라고 필자는 내다본다. 그 이유는 바로 안병무가 지적한 대로 민중과 더불어 고뇌를 같이 하는 예수는 가두고 그 이름으로 목사들이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개독교’로 전락하고 목사가 ‘먹사’로 평신도가 ‘병신도’로 전락한 오늘, 매주일 서울에는 백만이 넘는 ‘가나안’(↔‘안나가’) 성도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오클로스]
안병무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 사건의 전승 모체인 오클로스가 케리그마(‘신앙고백적으로 선포된 말씀’)로 예수 사건을 전승한 부류와 다르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입증한다. 그간 복음서에 대해 서구신학이 주장해왔던 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종교적 문서로 여겨온 그 근본을 뒤집는다. “예수사건의 전승모체는 어떤 소종파를 이루었거나 또는 예수 케리그마를 보존한 어떤 교회가 아니라, 교회원이라는 의식을 가지기 이전의 예수 사건의 목격자였으나 정치적 여건과 교회의 위치 때문에 그 사실을 공적으로 전승할 수 없었던 민중이었으며, 그들이 유언비어의 형태로 예수사건을 전승했다.” 마가복음서는 예수 사후 40년, 로마의 식민통치에 저항했던 유대독립전쟁(66-70년) 직후 씌어졌다. 예루살렘 성곽은 완전히 무너지고 모든 가옥은 불에 탔으며 주민들은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모두 쫓겨남을 당한 직후에 쓰인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는 어떤 존재였는가? 그는 로마가 자신들의 통치를 거부하는 게릴라들을 처형하였던 십자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상이나 행동이 불온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로마 정보부는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불온시 여겼으며 그들이 전하는 예수의 이야기 곧 복음서를 불온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예수 이야기들은 유언비어의 형태로 전승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기록한 복음서 저자들은 저들의 감찰에 걸리지 않도록 소위 말하는 ‘종교적 기적’의 틀 안에 예수의 (혁명적)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민중신학이 논해지던 당시 또한 박정희군사독재 시절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수많은 사회종교지도자들과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간 극심한 언론탄압이 자행되던 유언비어의 시기였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복음서는 결코 심미적이고 철학적인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전하지 않는다. 사건 자체에만 집중한다. 그러기에 마가복음은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시간 접속사는 거의 대부분, ‘곧,’ ‘즉시로,’ 이어지고 있으며, 내용의 3분지 1 이상이 십자가 처형을 앞둔 예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이 처한 정치사회적인 실존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유니온석사학위 논문에서 소위 말하는 예수의 치유기적이야기들을 개인들의 병 치유 이야기가 아닌 ‘유언비어’라는 사회적 시각에서 민중들의 집단 한풀이로 새롭게 조명하고자 시도한바 있다.
제자 김명수는 말한다. “안병무가 바라본 오클로스는 기본적으로 귀속성 박탈에 있다. 즉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해야 할 말을 박탈당한 존재, 그렇지만 그런 그들이 결국 예수와 함께 사건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들은 치유됐고, 봉쇄된 언어가 회복된다. 자기 언어를 박탈당한 이들이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들의 잃어버린 언어도 되찾은 것이다. 예수 이야기, 그들의 예수 기억은 곧 타자화된 민중, 오클로서의 자기 회복 사건이다.”
필자는 사건 초기부터 지금까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얘기를 계속 들어왔다. 필자는 동영상과 함께 인터넷을 떠도는 수많은 유언비어(?)들을 통해 세월호 사건은 단순 침몰사고가 아닌 국가폭력이 개입된 사건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를 점차 인지해가고 있는 희생자 가족들은 9명의 남은 시신 회복과 진상 규명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강력 요구하면서 저들의 말투가 점점 변화해가는 것을 본다. 처음에는 슬픔과 수줍음으로 말을 머뭇거리던 저들이 점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정부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자기주장을 펴나가고 있으며 지금은 정부의 회유를 뿌리치고 법정 소송을 시작했다. 이는 저들이 희생된 자기 아들딸들을 타자화된 민중으로 바라보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박탈당한 자리를 되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살림]
안병무는 70년대 운영하던 계간지 ‘현존(現存)이 강제 폐간당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승리의 착시현상을 가져왔던 87년 민주항쟁 이후 ‘살림’이라는 제호로 새로운 잡지를 출범시킨다. ‘살림’은 죽인 것을 살리는, 또는 죽을 것을 살게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의 투쟁이다’라는 글에서 유교, 불교, 기독교의 종교적 특징을 각각 주검, 죽음, 죽임의 개념으로 요약한다. 유교는 사체와 무덤, 그것에 연루된 제의 형식에 중요성을 둔다면, 불교는 생로병사 인간고의 궁극으로 죽음을 상정하고 여기에서 해방된 상태를 해탈로 본다. 이에 비해 기독교는 국가폭력에 의한 예수의 십자가 타살 곧 죽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태동했으며, 그 죽임은 부활로 이어진다. 이 부활은 예수 한 개인의 부활이 아닌,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민중의 부활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 민중의 부활은 역사 속에 이루어지는 정의ㆍ평화ㆍ평등ㆍ생명의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된다.
많은 사상가들이 그러하듯이 말년의 안병무는 자연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숲을 산책하며 생명에 대해 명상을 주로 했다. 그는 자연으로부터 존재의 참 모습은 언어 너머에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청년시절에는 교회 부흥사로 사회학도로 그리고 신학자로서 평생 언어를 생명으로 했던 안병무가 아니었던가? 그가 설교에서 보여주는 언어의 창조적 기술과 청중의 마음을 꿰뚫는 탁월한 강의법을 배우기 위해 신앙인이 아닌 일반대학 교수들도 향린교회를 자주 찾았다는 안병무가 아니었던가? 대학시절 필자도 분명히 기억한다. 대체로 당일의 성서 구절과 제목 그리고 도입부분을 들으면 그날의 설교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할 것인가를 대체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병무는 번번이 필자의 기대를 산산이 부셔버렸다. 도대체 그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비판과 판단의 주체로서의 내가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안병무는 언어를 쓰되 언어를 넘어선 학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안병무야 말로 유영모와 함석헌을 이어가는 우리 시대의 빼어난 사상가였다고 주장한다. 그가 자주 언급했던 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의 말과 功成而不居是而不去(공을 이루고 나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아야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 있다)라는 노자의 말로 안병무의 얘기를 끝맺는다.
참고 및 인용 서적: 『역사와 해석』, 『안병무평전』(김남일 지음), 『안병무의 신학사상』(김명수 지음)
알림: 매년 10월 19일 직전 일요일 오후 3시 향린교회에서 안병무선생을 추모하는 신학강연이 열리고 있다. 올해는 10월 18일에 모인다. 강연자는 이재원 한신대 초빙교수이며 저녁식사가 제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