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전을 허물어라’ (요한 213-21)

-부천영광교회 입당감사예배-

 

입당감사예배에 축하의 소리는 하지 못할망정 제목부터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고 했으니 이 정도면 망언에 가까운 제목입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위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믿는 것으로 이런 신앙은 수없이 많습니다. 오늘은 이 사람 따라 이렇게 믿고 내일은 저 사람 따라 저렇게 믿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낸 자와의 관계를 믿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온 뜻을 묻는 신앙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 신을 믿는 것이며 이 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교회들이 말하는 것을 따르는 것으로 이런 교회는 수없이 많습니다. 작은 교회 목사들은 일 년에도 수차례씩 목회성장세미나를 참석하는데, 이 교회 목사가 이렇게 해서 교회가 성장했다는 얘기를 하면 이 프로그램을 채택하고 저 교회 목사가 얘기를 하면 저 프로그램을 채택하게 되어 매년 이리갔다저리갔다 하다 사라지는 교회가 됩니다. 그러나 참 교회의 길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직접 관계, 곧 많고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왜 우리 교회를 부르셨을까를 묻고 답하는 가운데 얻는 깨달음인데, 이는 하나입니다.

 

교회의 문자적인 의미는 교를 믿는 회중 혹은 무리를 말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당(敎會堂)하여 집 당()자를 쓰면 건물이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무슨무슨 교회라고 간판을 붙이다보니 교회가 건물로 오해되고 있습니다. 교회당 해야 보다 정확한 표현이 됩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나누고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건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건물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상위 개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는 이 땅에서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건축을 하기 위해 가건물을 짓는 경우가 있는데,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종의 가건물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들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들은 둘 이상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지 건물이나 장소를 전제하는 말은 아닙니다. 헬라어 Basileia tou Theou'하느님의 나라'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하느님의 왕국이라고 말하는데 이 또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번역입니다.

 

나라나 왕국은 장소를 전제합니다. 오늘날은 나라 사이에 국경이 분명하지만, 2천년 전에는 국경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한 나라의 왕의 말이 전해지고 시행되는 거기까지가 그 나라의 왕국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법으로 시행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공간의 의미보다는 시간의 의미가 더 큽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말할 수 없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라 보다는 하느님의 통치라는 단어가 성서에 더 가까운 번역입니다. 영어 단어 Kingdom은 장소가 전제되고 있어 정확한 번역이 아니고 독일어 Herrshaft 혹은 Herrlichkeit가 통치를 강조하고 있어 보다 정확한 번역입니다.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데, 여기 공회(公會)가 뭡니까? 한자어로는 공적 모임이라는 뜻인데, 이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왜 교회라고 번역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건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이 땅의 건물로 존재하는 교회가 아닌 단 하나의 보이지 않는 우주적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catholic 이라고 합니다. 영어 사도신조는 I believe in holy catholic Church.입니다. 이때의 가톨릭의 의미는 보편적 혹은 유일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교회도 영어로는 가톨릭이라고 부르는데, 그때에는 영어로 대문자로 써서 구별합니다.

 

2천년 역사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사라졌습니다. 고린도교회나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지금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건물로 말해지는 보이는 교회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지금은 수만 수십만명이 모여도 대체로 2,3백년이 지나면 대부분의 교회들은 건물의 수명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제가 신학생 시절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는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Crystal church였습니다. 로버트 슐러목사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모든 목회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리로 지어진 교회 또한 너무 웅장하고 멋있어서 관광명소로도 유명했습니다. 7,80년대 교회 성장의 대명사였습니다. Mega church(초대형교회) 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교회였습니다. 80년대에 드라이브 인 극장처럼 자동차에 탄 채로 예배를 드려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15년 전 자식 때에 와서 재산 싸움을 하더니 지금은 파산을 하여 남미사람들의 Catholic 성당으로 변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라는 공관복음서와는 매우 다른 복음서입니다. 시기적으로도 보다 후대에 씌어졌고 영적 복음서라고도 말합니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가장 큰 차이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다른데, 제게 있어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숙청 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서는 성전 숙청이 예수의 생애 맨 마지막 주에 일어나고 그의 십자가 죽음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를 예수 사역의 맨 앞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숙청이 아닌 성전 해체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 제사용 비둘기와 양을 취급하는 장사하는 사람들과 성전용 화폐로 환전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집어엎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난하시면서 채찍을 들어 사람을 내어 쫓으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들이 성전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아나바다 장터를 열거나 선교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슨 물건을 팔면 이를 못 마땅이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장사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해지는 그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시장에서 먹고 살기 위해 물건을 파는 그런 장사꾼이 아닙니다. 이들은 대제사장의 허가를 얻어 제사용 물품을 파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주 이상 한 달이 걸려 멀리서 오는 순례자들은 제사용 동물을 끌고 올수가 없으니 제사용으로 도장이 찍힌 동물을 성전에서 구입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또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야훼 하느님께 드리는 일은 상을 새기지 말라는 십계명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니 얼굴이 없는 성전용 화폐로 바꿔주는 일은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폭리를 취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을 뒤집어엎고 사람을 내어 쫓을만한 범죄행위는 아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강도의 소굴이란 비난을 받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성전 폭동이 상인들의 폭리를 막기 위한 숙청의 의도인가 아니면 제사 자체에 대한 금지 의도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사람들을 내어 쫓은 후에 제사용 물건을 나르기 위해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도 금하셨다.”고 말합니다. 성전 뜰이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떤 뜨락이 아닙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뜰의 크기는 오늘날 축구장 세 개의 크기만큼 큽니다. 거대한 광장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질서유지를 위한 경비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수백 명의 로마 군인들, 수백 명의 레위지파 성전 종사자들, 제사장만도 2백명, 그리고 최대 명절인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최소 수만 명의 순례자들이 운집해 있는 거대한 성전 광장을 장악했다면 이는 예수와 그 일행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말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전용 제기들을 들고 뜰을 질러 다니는 것을 금하셨다는 마가의 의도는 예수께서 제사를 금지하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제사는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인데,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예배를 반대하시는 것인가요? 복음서에는 제사 자체를 부정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인지? 안식일의 근본을 물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에게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제사 자체가 아닌 제사의 근본을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와 기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요구되었는데, 첫째는 자신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용 동물이요, 둘째는 모든 유대 성인에게 부과된 성전세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십일조에 해당하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도 돈 없는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가는 일조차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성전이란 만인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특히 가난하고 설움 많고, 소외된 이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드나들면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는 하느님의 집이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가진 자들만이 드나드는 성전이 되었던 것이고 이를 예수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의 접근을 막는 이 악의 구조를 깨뜨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이 갖는 약자 보호의 기본 정신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단어가 성서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이 어디이지요? 우리는 창세기가 가장 먼저 있기에 가장 먼저 씌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창세기 특히 1장은 제1성서에서는 후기에 쓰인 장입니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입니다. 노예제도가 있었던 고대 시대에 주인은 마음대로 쉴 수 있었지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던 노예는 쉴 수가 없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갔던 유대인들은 당시 노예로 살아가야 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은 바벨론 신 마르둑이 아니라, 야훼의 신임을 말하면서 이레째 되는 날에 하느님께서도 쉬셨다고 선포하면서 자신들 또한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 과정에 대한 과학적 서술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찬양이자 동시에 인권선언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이 쉼은 단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까지도 확대 적용되었고, 더 나아가 땅까지도 쉬어야 한다는, 오늘날의 생태신학을 훨씬 앞지르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는 말은 우리의 모습을 역추적하면 하느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는 신인동형론적 얘기가 아니라 바벨론 제국 시대 당시 황제만이 신의 얼굴을 닮았다고 하는 전제군주론에 대항하여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는 인간 해방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성전 숙청 얘기로 돌아와서 요한복음은 약간 애매하게 서술되어 있는 공관복음서의 성전 숙청의 의미를 분명하게 말하면서 이 성전을 허물라고 말합니다. 성전을 허물다니요? 돌 하나만도 수십 수백 톤에 이르는 성전을 물리적으로 허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는 체제저항이 담긴 상징 언어입니다. 요한복음 본문은 유대인의 말을 빌려 이를 표적’(sign)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의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힘은 이 성전체제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라는 것은 권력자들과 가진 자들만의 기득권의 성전 체제를 부수라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선언은 예수 부활의 몸을 말하는데, 이는 공간을 초월하는 통치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3년동안 가난하고 헐벗고 국가의 폭력으로 집을 떠나 길거리에서 유리방황해야 했던 갈릴리의 민중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셨듯이 참다운 교회는 오늘 아픔을 당하는 민중 속에 함께하는 현장으로서의 교회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다녀가면서 남한 사회에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실 교황이 말한바 교회는 세상 속에서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은 이미 예수께서 그리고 요한복음이 시작부터 강하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용어는 로마제국이야 말로 제우스신이 인정하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거짓 선포에 대한 폭로와 저항의 의미가 전제되어 있는 말입니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파동 이후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는 현장 교회로서 촛불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비롯한 해고자, 쫓겨난 세입자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약자들과 매주 목요일 거리에서 함께 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두 교회를 출석해야 합니다. 하나는 향린교회입니다. 여기서는 예배를 드리고 교육을 받고 친교를 나눕니다. 여기서 얻어진 힘으로 민중의 현장 아픔의 현장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 부활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세우십시오.

 

부천영광교회 교우 여러분 이렇게 예쁘고 반듯한 교회를 세우시느라 그간 참으로 애쓰셨고 수고하셨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세우는 첫 번째 교회입니다. 이제부터 여기서 얻어지는 기쁨과 힘을 갖고 두 번째의 현장 교회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세우기 위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머리되시며 말씀을 통해 늘 새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