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건 (4)

사람의 아들

미가 4, 1 - 5 ; 루가복음 2, 25 - 35


한 문 덕 목사


[대림절을 보내며]


        대림절은 교회력의 시작으로 2천 년 전 아기로 탄생하셨던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약속대로 다시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의 다시 오심은 구원의 소식이자 동시에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해석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대림절 기간 동안 한편으로 설레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긴장하며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각 교회에서는 예배 전에 매주 한 개씩 4개의 대림절 촛불을 켭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사랑, 희망, 기쁨, 평화의 순서로 촛불을 밝히지만 각 교회 전통에 따라 빛(light), 정의(righteousness), 기쁨(joy), 희망(hope)을 상징하기도 하고, 기다림, 회개, 나눔, 기쁨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한 대림절 색깔은 설렘과 동시에 근신과 겸손을 상징하는 보라색입니다. 태극기 한가운데는 하늘과 땅 즉 음과 양을 상징하는 파랑과 빨강의 태극 문양이 있는데 이 파랑과 빨강을 합한 색깔, 즉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색깔이 바로 보라색입니다. 하늘이 땅으로, 하느님이 사람으로 오시는 역사적 순간을 준비하는 계절에 참 잘 어울리는 색깔인 것 같습니다. 한해를 정리하고 예수 오심을 기다리는 12월, 하늘과 땅이, 하느님과 사람이,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화해하고 하나 되는 뜻 깊은 계절을 보내면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돌아보는 특별한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처럼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일정한 시간을 잡아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거나, 동방박사들처럼 세계평화를 기원하고, 깊고 추운 밤 외로움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직무에 충실했던 목자들처럼 맡은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냄새나는 외양간 여물통같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을 찾아가 보고, 세례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멋진 노래하나 지어 불러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림절 기간을 보내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예수의 재림에 관해서입니다. 사도신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마지막 날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문자 그대로 믿으라고 하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선 부딪히는 문제는 사도신경이 가지고 있는 신화적 언어가 과학적 언어를 가진 현대인들에게 무의미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서 하늘에 계시다가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말 자체가 실험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증의 가능성도 없기 때문에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이들에게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두 번째는 설사 이 고백을 무조건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재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계속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8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마르코 9:1, 루가 9:27, 마르코 13:30, 마태 24:34, 루가 21:32, 마태 10:23 참조)라고 하셨는데, 그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고, 2000년이 지나도 아직까지 예수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재림의 목적이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행위에 따라 심판하는 무서운 “세계 심판자”로서의 예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을 당하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담지자로서의 예수와 상당히 어긋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초림과 재림을 말하면서 생기는 오류입니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오셨고,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하늘에 계시다가 나중에 다시 오셔서 자신의 나라를 완성한다는 생각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와 무관한 예수님을 상정하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예수께서 전혀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인들이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을 했을 때 그것은 물리적 시간이 흐른 뒤에 지금 우리와 같은 몸뚱아리를 가진 예수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현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다시 오심은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이 아니라 도리어 현재의 고난과 박해를 극복하는 하나의 좌표였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시련과 고통을 참아내는 힘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안일과 나태함과 유혹을 물리치고 완전에 이르도록 하는 동력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다시 오심은 현재를 살아가게 하고 변혁시키는 힘이었지, 모든 것을 미래의 구원자에게 내맡기고 현재의 삶을 회피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희망하는가?]

        

        독일에서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하시고 한국에 들어와서 인권과 평화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이춘선 박사의 대림절 묵상집 『꼭 오시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꼭 와야 할 사람/ 꼭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꼭 오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그 사람이 내게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이 내게 꼭 오기를 지금 기다리고 있는가?”


        대림절을 맞아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꼭 당신에게 오기를 기다리십니까? 또 여러분은 어떤 세상을 기대하며, 무엇을 희망합니까? 여러분 각자는, 여러분 가정은, 그리고 우리 교회는 2009년을 보내며 또 2010년을 맞이하면서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나요?

        아가서 3장은 사랑의 열정은 가득한데 짝이 없는 남녀 청춘들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며, 사랑하는 임 그리워 애가 탔건만, 찾는 임은 간 데 없어 일어나 온 성을 돌아다니며 이 거리 저 장터에서 사랑하는 임 찾으리라 마음먹고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였네. 성 안을 순찰하는 야경꾼들을 만날 때 마다 물었지. ‘사랑하는 나의 임 못 보셨소?’” 이런 마음으로 지내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할까요? 그래, 지난 새청/청신/희청 연합수련회에서 우리교회 장 00 집사님은 어렵게 만난 애인을 놓칠세라 그 분의 손을 꼭 잡고 입은 귀에 걸린 채로 싱글벙글하며 “나를 구원해 주신 분”이라고 청년들에게 소개했답니다.

        제 큰 아이가 5살인데 매일 제가 출근할 때 묻는 말이 있습니다. “아빠, 몇 밤 자면 교회 안가는 날이야?” 이사한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아 아직 친구도 못 사귀고 하루 종일 엄마와 그리고 말 못하는 2살 동생과 있어야 하는 아이는 아빠가 자기와 놀아주는 아빠의 휴일을 매번 기다리지요. 또 매일매일 두 아이와 치대며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제 아내 또한 제가 쉬는 날만을 기다립니다.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살 속을 파고드는 추운 겨울! 밖에서 생활해야 하는 노숙인들,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피해 도시의 맨홀 뚜껑 아래서 지내는 몽고의 가난한 아이들은 따뜻한 봄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명절이 되면 도시로 떠나간 자녀들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고향의 부모들과 통일전망대를 찾아 북녘 땅 바라보며 반평생의 설움과 그리움을 달래야 하는 실향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그리워하는 것은 모두 님이다”라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말처럼 누구나 사람은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벼락을 연속으로 두 번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로또 당첨을 기다리고, 아파트 값이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자신이 산 주식이 대박을 터뜨리길 기다립니다. 또 어떤 여성은 명품 가방 하나 사서 옆에 끼고 나이트클럽에 앉아 자기를 구원해 줄 갑부집 사내의 부킹을 기다리는가 하면, 뒷골목 사내들은 한탕 잘 해서 인생역전해 보기를 기다리고, 비닐하우스로 위장한 도박판에서는 나에게 좋은 패가 들기를 기다리겠지요.

        이처럼 희망과 기다림은 각 개인이 가진 욕망과 얽히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어떤 것이었나를 새삼 성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논어에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면 그가 행동하는 바를 지켜보고, 그렇게 하는 까닭을 헤아려보고, 그가 가장 편안히 여기는 곳을 따져보라(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瘦哉! 人焉瘦哉! 『論語』 「爲政」.)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덧붙여 그 사람의 꿈과 희망, 기대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 또한 그 사람을 알아보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


        오늘 제2성서 본문은 오래도록 메시아를 기다려온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시므온입니다. 성서는 이 사람에 대해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려 왔고, 성령께서 늘 함께 하셨으며, 죽기 전에 하느님께서 보내실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설명은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다는 것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하느님의 가르침 즉 율법에 따라 살 때에만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준수하기 위해 몇 십 개가 넘는 세부적 조항들을 만들어 놓은 것도 삶의 모든 과정을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고 사람답게 만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들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나서는 이런 모든 삶이 망가지게 됩니다. 황제숭배와 경제적 착취, 온갖 비인간적인 폭력이 난무하게 되어 유대인들은 민족적 종교적 자부심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피폐한 삶 속에서 인간다움조차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렸다고 성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시므온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였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머물러 계셨다는 것은 시므온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하느님의 살아계신 영과 함께 하루하루를 견디어 냈음을 나타내 줍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죽기 전에 꼭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아기를 보게 되는데 그 순간 자신의 기대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므온은 이 아기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요? 시므온의 이야기는 역사비평적 연구에 의하면 예수 사후에 예수의 일생을 기억하면서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루가복음 1-2장에 걸쳐 길게 나오는 세례요한과 예수의 수태와 탄생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구원사건에 대한 노래가 등장합니다. 마리아와 즈가리야, 천사들의 입을 통해 불린 것처럼 쓰여 있지만 사실 이 노래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부르던 찬양의 가사였고, 오늘 시므온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찬양은 아마도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교회에서 불리던 찬양일 것입니다. 이 노래들은 모두 예수가 가져온 구원에 대한 찬양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루가 1:49-53)


“하늘 높은 곳에 구원의 태양을 뜨게 하시어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루가 1:78-79)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14)


        이 노래들은 공통적으로 평등과 평화를 노래합니다. 평화를 향한 염원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번도 단절되지 않았던 바램이었습니다. 오늘 제1성서 본문인 미가서는 야훼의 성전이 우뚝 서는 날,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나라와 나라 사이에 칼을 빼어 드는 일이 없어, 다시는 군사를 훈련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공자는 정치군사적 통치자를 뜻했던 “군자(君子)”라는 말을 도덕적 감화력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군자”로 바꿔 춘추시대의 환란을 없애려 했고, 노자는 왕을 도와 책략을 세우는 진정한 조력자는 군대로 천하를 강압하지 않는다고 역설했습니다(爾佐人主者, 不以强兵天下. 『道德經』 30장). 잘 아시겠지만 고대의 문명사회는 전쟁을 통해 얻은 물자와 노예 노동력을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쟁과 불평등으로 가득한 세상]


        자본주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오늘날의 세계 산업자본주의는 전쟁 속에서 태어나 전쟁을 기회삼아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주기적 불경기로 시장이 위축되었을 때, 적당한 투자처가 없는 엄청난 잉여자본을 가격이 안정적인 무기 생산에 쏟아 부어 불황을 유보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중요한 운영기법이고, 바로 미국이 세계 제1, 2차 대전을 통해 오늘날의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초강대국이 됩니다. 1차 대전 막바지에 전쟁에 뛰어든 미국은 전쟁비용 지출로 지출 전체가 2년 만에 7억 달러에서 190억 달러까지 늘었고, 공업생산량은 40%나 증가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대공황에서 회복시켜준 일등 공신으로써, 23%에 달했던 실업률이 1%로 떨어지고 워싱턴 근로자의 실질소득이 전쟁 호경기로 42%나 늘어났습니다.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이 성장하고, 베트남 전쟁특수로 한국이 급격한 발전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체주의적 파시스트 독일이든,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미국이든 적어도 ‘주류’에 속하는 대중이 ‘경제를 살리고 자국의 위세를 높이는’ 대량학살에 대부분 열광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다 알면서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수많은 한국인들의 의식이 여기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도 또한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1)   

        요즘 모라토리움을 선언해서 그 진면목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두바이는 영국 스카이뉴스가 보도한대로 ‘현대판 일일 노예’라 할 수 있는 동남아 저임금 노동자들의 고혈을 빨아 이룩한 것입니다. 두바이 220만 인구 중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8분의 1에 불과하며, 인구 60%는 동남아 출신 노동자인데, 이들은 평균 12시간 노동에 하루 5달러, 한 달 약 15만-25만원을 받습니다. 연간 노동재해 사망자 수는 900여명에 이르고, 두바이 외곽에 지어진 ‘노동자 캠프’라는 집단 수용소에선 컨테이너 같은 방에 8-30명이 몰려서 생활합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수용시설 때문에 자살률도 높아 한해 자살하는 노동자가 80-100명에 이르고, 취업 사기를 당하거나 여권을 빼앗기고 강제 구금되는 일도 흔한데, 노동조합도 불허되고, 국제노동기구의 노동 규정은 무시됩니다(시사 IN, 제117호, 25-26.).

        이런 이야기는 사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비약적 발전은 사실 두바이와 같이 노동자/농민의 피땀의 결과임을 기억해야 하고, 오늘날도 여전히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시내버스 요금이 50원인 줄 아는 어떤 사람은 주식배당금으로 600억원을 받지만,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해 공부방에서 혼신을 다해 가르치는 사회복지사는 한 달에 80만원도 못 받는 현실입니다.

        매년 80만 명 안팎의 인구가 18살이 되는데 이중 13만 명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32만 명은 2년제 대학, 산업대, 방송통신대, 기술대, 사이버대학 등에 진학하고, 일반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이들은 35만 명 정도입니다. 대략 60%정도가 일반대학의 간판조차 따지 못하고, 한국 사회의 불안정 빈곤 노동의 밑바닥을 이루게 됩니다. 명문대학에 입학한 2-5만 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30만 명에 이르는 4년제 대학생들도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다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는 빈곤의 악순환 대열에 합류할 확률이 높습니다.

        이렇듯 오늘날에도 2000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소리가 들리고, 불평등 또한 여전하기 때문에 평화와 평등은 인류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임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예수의 다시 오심이란 바로 예수에게서 맛보았던 평화와 평등을 재현하겠다는 소망이 강력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고, 평등과 평화의 세계는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에 다름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人子)의 나라]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이루어 내고 또 하느님을 대신하여 그 세계를 다스릴 통치자를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이란 말은 때로는 보편적 인간을 뜻하기도 했으며 위에서 말한 대로 새로운 통치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다니엘서 7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곳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다니엘서 7장에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강대국들을 물리치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자, 곰, 표범, 그리고 초자연적인 괴물은 강대국 메디아,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시리아를 상징하는데, 하느님은 이 나라들을 없애버리고 통치권을 사람의 아들에게 넘기십니다. 이제 이 사람의 아들이 영원히 그의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맥락에서 사람의 아들이란 바로 앞에 나오는 짐승의 나라를 대체할 사람을 뜻합니다. 즉 다니엘은 짐승 같은 세계를 인간미가 넘치는 나라로 만드는 사람의 아들을 말했고, 예수는 자신을 바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먹고 먹히는 야수의 세계가 아닌 인정 넘치는 인간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한 말은 예수가 참다운 인간의 나라를 만들면서 겪었던 내용, 그리고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따라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면서 겪었던 것을 압축하여 말해줍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만민에게 허락된 구원은 저절로 오거나 평화롭게 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수많은 사람을 넘어뜨리면서, 많은 반대를 무릅쓰면서 옵니다. 세상의 평화와 평등을 가져오는 아기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부모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면서 오는 것입니다.

        개인이 되었든, 공동체가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자부하는 교회가 되었든 진정한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넘어질 수도 있고, 또 일으켜 세워 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넘어질 준비를 해야 하고, 우리가 넘어져 있다면 용기를 내어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자, 그럼 다 같이 이제 우리 일어설 준비와 넘어설 준비를 해 봅시다. 또 동시에 진작 무너져야 하는데 무너지지 않은 것은 빨리 무너뜨리고, 벌써 일으켜야 하는데 일어나지 못한 것은 일으킵시다. 오늘은 무건리 훈련장 확장저지 500회 촛불집회가 있습니다. 다음 주 목요일에는 평화를 위한 남북공동기도회가 있고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용산현장에서 촛불기도회가 있습니다. 미디어 악법, 4대강 죽이기,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 국가보안법, 서울광장조례, 집회와 시위에 관한 잘못된 법 조항들. 눈만 들면 무너져야 할 것들 투성이입니다. 고개만 들면 일으켜 세워 줄 곳도 많습니다. 교회만 보더라도,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멀뚱하게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새교우들, 교사를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교육부서, 아직도 부장을 구하지 못한 부서들을 위해 우리가 조금 더 애쓰고 힘쓰고 나서야 할 것입니다.


[시중(時中)의 몸짓으로 희망을]


        제가 서두에서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하게 올 것이라고 문자 그대로 믿을 때 생기는 문제점들을 얘기했지만 이미 1세기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데살로니카 교인들은 생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리라 믿었는데,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죽고 만 것입니다. 죽은 이들은 깜깜한 어두운 곳에 갇혀 있어서 예수의 재림을 목격할 수 없다고 믿었기에 교인들이 적잖이 당황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편지를 써서 주님의 재림 때 벌어질 일들을 차분히 설명하고 그런 일이 언제 생길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또 밤중의 도둑같이 갑자기 오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늘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초대교인들이 예수를 기다렸던 이유, 예수가 꿈꾸었던 것, 그리고 동시에 우리 모두가 희망하는 세상! 그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바울 사도의 조언처럼 늘 깨어 있어서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주변의 상황에 적절하게 때에 따라 끊임없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한국의 그리스도인이라면 두 눈을 크게 뜨고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실, 지구의 생태계의 변화, 우리 민족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들도 배워서 종교가 지닌 왜곡된 신앙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 주변의 모든 사태를 살펴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 동양전통에서는 이것을 때에 알맞는다 하여 시중(時中)이라 하고, 또 중용(中庸)이라고도 불렀고, 독일의 신학자 블룸하르트는 이런 신앙인들의 자세를 “기다리면서 서두르고, 서두르면서 기다리는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기독교교육을 이야기하는 학자들이 미래를 바라보며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으로 ‘관계를 맺는 능력’, ‘서로를 평등하게 여기는 것’, ‘여러 가지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는 마음’을 이야기하듯이(총회회보 12월호 77.), 대림절의 참 의미는 바로 지금 나에게 오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어 놓고 나 자신에게 또는 우리 공동체에게 발생하는 어떤 경험도 상실하지 않고 단 한 사람도 소홀하지 않으면서 모두 평등하게 평화를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짧은 동영상 한편을 보여드리고 하늘뜻펴기를 마칠까 합니다. 이 동영상 속에서 작은 기쁨과 희망을 보셨으면 해서입니다. 세계는 피를 흘리는 전쟁으로 가득하지만 참으로 신나고 재밌고 아름다운 전쟁도 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시겠지만 제가 소개하는 전쟁은 매년 독일에서 열리는 세계 비보이들의 월드컵 Battle of the Year입니다. 춤 대회에 전쟁이란 말이 들어간 것은 1970년대 후반 미국 각 지역 간의 패싸움과 뉴욕 뒷골목의 갱들의 세력 다툼으로 소모적인 싸움이 거듭되던 중 누군가 “싸움을 멈추고 평화적인 춤으로 승부를 가리자”는 제안을 했고, 그 뒤 폭력적인 싸움을 춤 대결로 대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보잉은 흔히 뒷골목 애들이나, 학교생활에 적응 못하는 소위 문제아들이나 하는 춤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팽배해 있는 한국의 문화적 상황에서 한국 비보이들은 무시당하고 외면당해 왔는데,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의 각종 비보이 대회에서 한국팀들이 우승을 휩쓸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피겨 스케이팅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가 김연아 선수를 배출하고, 수영의 박태환 선수를 내 놓은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아무도 후원하지 않는 비보잉의 세계에서 한국 젊은이들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세계 젊은이들의 감각을 익혔다는 것은 세계적 삶의 양식에 한국의 청년들의 감성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비보잉은 모든 춤의 신체적 가능성을 결합한 것으로 즉흥성, 표현성, 안무의 시공성과 몸의 훈련에 있어서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합니다.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이기 때문에 모든 춤사위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하고, 여럿이 함께 추기 때문에 서로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하나가 되는 배려와 협력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춤입니다.

        전 세계 국가대표가 참석하는데 전체 상금이 겨우 3천불도 안되기 때문에 1인당 100불 정도나 받을까 하는 대회에 오로지 춤을 추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기쁨과 참가하여 서로 실력을 겨루는 모든 과정에서 인간애를 만끽할 수 있다는 느낌 때문에 젊음을 불사르는 청년들의 순수함 또한 돈에 찌든 세상에 또 하나의 빛입니다.

        사회를 이끌고 계시는 지도자들이 제발 거짓말 좀 그만하고 이 청년들처럼 돈에 물들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분야에서 고도의 몸의 훈련을 하여 자연스러움과 전문성, 동료들에 대한 배려와 팀웤이 세계적 감수성에 뒤쳐지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아마도 좀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이들의 열정과 노력에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릴 팀은 갬블러즈(Gemblerz)입니다. 이들은 2004년 Battle of the Year에서 우승했고, 우승자 자격으로 자동 출전한 2005년에는 3위를 하였고, 올해 또 우승을 했습니다. 오늘 볼 동영상(www.youtube.com/watch?v=SpCaLvkaoe8)은 이들이 2005년도에 보여주었던 춤입니다. 남북을 상징하는 빨간 옷과 파란 옷을 나눠 입고, 개성 넘치는 스타일무브를 통해 남쪽의 유연성을, 힘이 가득한 파워무브를 통해 북쪽의 경직성을 표현했고, 그것이 서로 대비되어 대결의 양상을 보이다가 결국 하나가 되는 춤사위를 무척이나 역동적이고 아름답게 그려냈습니다. 6분정도 되는 동작 속에 과거 우리 민족의 겪은 아픔과 분단의 현실을 그려낸 뒤 서로 화합되는 미래를 압축적으로 상징화해서 대회에 참석한 1만 여명의 세계 젊은이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발칙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면 아마도 이 청년들과 함께 춤을 추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멋진 춤사위를 보시면서 기쁘고 즐거운 대림절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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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www.youtube.com/watch?v=SpCaLvkaoe8

http://www.youtube.com/watch_popup?v=SpCaLvkaoe8#t=55